소명에서 도망친 제자들
본문은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1절). 그때 갈릴리 호수 부근에 있던 일곱 제자는 시몬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 요한) 그리고 또 다른 제자 둘이었다(2절).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3절).
이것은 단순히 낚시하러 가겠다는 말이 아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로 일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베드로는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눅 5:10-11). 예수님의 소명을 받고도 큰 부자라 근심하며 떠났던 관리를 기억하는가?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말했다(눅 18:28). 그런 베드로가 다시 버렸던 것을 취하려고 했다. 사람을 취하는 소명에서 도망쳐 어부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다.
메시아라고 굳게 믿었던 예수님께서 힘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1절에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만났다(20:19-29).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고(20:22), 소명도 주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도마는 믿지 못하다가 예수님의 책망을 받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기까지 했다(20:28). 그런데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겠다는 말에 도마를 비롯하여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함께 갔다. 왜?
예수님께 실망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실망해서다. 잡히시던 날 밤 모두 주를 버리고 도망갔을 뿐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 눈앞에서 그분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맹세하며 부인하지 않았는가? 그런 배신자가 어떻게 주님께 다시 쓰임 받을 수 있겠는가? 주님 보내실만한 일꾼이 되겠는가? 그들은 예수님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그분 없이도 잘 해왔던 생업에 종사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 하지만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3절). 날이 새어갈 때까지(4절).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다. 이 말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 말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 부인을 한다는 말이다.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말과 삶으로 증언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리스도인인가? 제자들처럼 당신도 소명을 받았다.
그런데 왜 소명에서 도망치려 할까? 교회를 떠나거나 믿음을 저버리진 않더라도 왜 자꾸 소극적으로 소명을 인식할까? 왜 자꾸 예수님 몰랐던 평범한 일상에 안주하려 하고, 소명은 위대한 소수 일꾼이 충성하기를 바라며 자신은 그 부르심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걸까? 주님께 실망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실망해서다. 나는 참으로 별 볼 일 없고, 연약하다. 신실하지 못하고 주님 앞에 부끄러운, 차마 주를 위해 살겠다고 말도 꺼내지 못할 존재다. 주님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데, 자기를 위해 날마다 주를 부인하기 일쑤다. 이런 나를 주님이 어떻게 사용하시겠는가?
처음 구원받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고 기쁨으로 크고 작은 일에 달려들었던 우린,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을 겪고 또 겪으면서 슬그머니 소명에서 도망친다. 주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이란 말을 도저히 들을 자신이 없다. 우리가 얼마나 볼품없는지 너무 잘 아시는 주님도 굳이 우릴 찾지 않으실 게 분명하다.
소명으로 부르신 예수님
기억하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롬 11:29). 부르심 받은 자들이 자신에게 실망하여 도망쳐도 주님은 그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기쁨으로 충성하게 하신다(예: 요나, 엘리야).
5-12절까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라. 그 어떤 책망이나 정죄가 있는가? 없다. 주님은 먼저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시고,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6절, 153마리-11절). 베드로와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곧 처음 소명을 주셨을 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누가 이런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겠는가? 주님 밖엔.
“주님이시라”라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외쳤을 때, 베드로는 즉시 바다로 뛰어내렸다(7절). 주님이라고 직감한 것이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알았다(12절).
주님은 밤새 심신이 지친 제자들을 먹이셨다(10절). 직접 준비하신 생선과 떡으로(9절). 소명을 피해 물러난 제자를 추격해 잡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여기로 보낸 줄 아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12절). 주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다. 숯불로 그들의 몸을 따뜻하게 녹이셨고, 사랑으로 그들의 마음을 더 따뜻하게 녹이셨다. 우리를 소명으로 부르신 예수님은 참으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자기 멍에를 메고 배우라 하신다(마 11:29).
조반 먹은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다. 자기에게 실망했던 그 상처를 그대로 직면하게 하는 질문이었다(근심하여 이르되, 17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었다(마 26:33). 예수님은 세 번 물으셨다. 그가 세 번 주를 부인한 것처럼.
베드로는 용기를 내어 진심을 고백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5, 16, 17절). ‘완벽하진 않지만, 한결같지 않지만,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진실합니다.’ 주님은 그거면 됐다고 하셨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15, 16, 17절). 다시 소명으로 부르셨다(19절). 우리의 소명은 주님의 소명이다. 우리가 자신 있어 해서 부르신 게 아니다. 우리 능력이 대단하고 성품이 특출나서 부르신 것도 아니다. 주님이 사용하시려고 부르신 것이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연약하지만,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우리에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맡기셨다.
소명으로 회복된 제자들
소명은 특별히 목회자, 교사, 선교사, 전도자에게 한정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받은 은사, 받은 소명이 다를 수 있지만, 은혜로운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다. 모습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다. 우리를 부르신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같은 사도이지만, 베드로와 요한만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달랐다.
베드로는 요한의 소명이 궁금했다. ’그는 어떻게 되겠냐?’라는 질문에 주님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다(22절).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소명과 은사를 내가 받은 소명과 은사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똑같은 목적,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부르셨다.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대로 충성하면 된다. 하나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니다. 절대평가다(달란트 비유).
당신의 소명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무엇을 하든지 내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게 하기 위해 한다(빌 1:20). 우리는 그리스도인 부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한다(엡 6:4).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다.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세상에 나타낸다(엡 5:22-33).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인 직장인이다. 사람에게 하듯 눈가림만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주께 하듯 일한다(엡 6:5-9).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드높이기 위해 한 몸되게 하신 것을 사랑과 용납으로 힘써 지키고, 받은 은사로 서로 섬긴다(엡 4:1-16).
여기서 “그리스도를 위한”을 빼면 사명감 없는 종교인, 부모, 배우자, 직장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한”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소명’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뒤에 있는 건 변할 수 있다. 자녀를 잃으면 더 이상 부모가 아니다. 부모가 먼저 떠나면 더 이상 자녀가 아니다. 배우자가 먼저 떠나거나 갈라서면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고, 직장을 잃으면 백수가 된다. 지역교회 지체로 섬길 수 있는 것도 이 땅에 한정된다. 뒤에 붙는 것은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앞에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존재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이 회복하신 소명을 붙들고 죽기까지 충성하였다.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도, 본문에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로 등장한 저자 요한은 주후 90년경 소명 때문에 밧모섬이란 곳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교회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계시받아 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했다. 그중 라오디게아에 쓴 편지는 정말 심각하다. 라오디게아는 한마디로 소명을 버린 교회였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라고 하셨다(계 3:16). 구역질 날 정도로 소명에서 멀어진 교회였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교회인데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평가하셨다(계 3:17). 그런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께서 하신 말씀은 정말 감동적이다. 주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고 소명으로 다시 불러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음성인가? 혹시 미지근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랑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당신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시고 함께 더불어 먹고(교제하고) 마침내 그 보좌에 함께 앉히기 원하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르심에 사랑으로 응답하라. 주님은 문밖에서 두드리고 계신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리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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