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선교를 위한 불교의 이해(1)
현재 동남아 지역 국가의 개신교 인구는 대부분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라가 많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한국 선교사 최다 파송국 10위권 내 6개국이 동남아 지역에 있다. 현재 동남아 지역의 선교사역을 위한 사역자와 기도자를 위해 동남아 지역의 주요 종교인 불교의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알아본다. <편집자>
1. 불교의 민족주의적 역할
불교는 동남아시아 상좌불교(개개인의 수도와 해탈을 중시하는 불교전통. 또다른 전통은 대승불교로 호칭. 편집자주)권 국가들의 민족주의 운동에 이념적 바탕의 하나를 제공했으며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태국은 와치라웃(Vajiravudh) 왕 즉 라마6세(재위 1910~1925)가 20세기 초 나라를 서구식으로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불교를 근대적 국가의 핵심적인 바탕 중 하나로 중시했다. 미얀마에서 불교의 민족주의적 역할은 1906년 설립된 청년불교도협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1920년대 미얀마에서의 민족주의 운동은 청년불교도협회로부터 발족된 버마협회총회의불교 승려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캄보디아에서는 프랑스 식민 통치 시대 민족주의적인 불교 단체가 결성되지는 않았으나, 불교 승려들이 식민 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에 참가한 경우가 있었다. 1942년 헴찌어우(Hem Chieu)라는 이름의 비구(남자 승려)가 반프랑스 쿠데타 음모로 다른 동료 승려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그해 7월 20일 1000명 이상의 군중이 모여 프놈펜에서 시가행진을 하며 그들의 석방을 요구했는데, 시위대의 반은 승려였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시위 군중은 프랑스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고 주요 인물은 체포되었다. 그 이듬해에 프랑스 식민정부는 캄보디아어의 크메르 문자 대신 로마 문자를 도입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많은 캄보디아인들 특히 승려들은 그 발상을 캄보디아의 전통 문화 및 교육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이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다.
2. 현대 국민국가 건설에서의 불교의 역할
제2차 세계대전 후 불교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국가의 정치ㆍ경제 발전을 위한 시책의 이념으로, 혹은 국민 통합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캄보디아의 경우 그것은 1950년대 중엽 ‘불교 사회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미얀마에서도 사회주의 이념을 불교에 접목시킨 정치ㆍ경제 발전 프로그램이 비슷한 시기에 추진되었다. 미얀마의 우누(U Nu) 총리(재임 1948~1956, 1957~1958, 1960~1962)는 1952년 발표한 국가 발전 계획에서 농업 개혁과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제시하면서 그 이념적 근거를 불교에 두었다.
일례로 그의 농지 국유화법은 사람들의 삶의 목표가 열반(불교 실천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깨우침의 지혜를 안성하고 완전한 정신의 상태. 편집자주)에 가능한 한 빨리 도달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사유재산은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필요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누는 이 정책을 통해 민중과 소수 계급 간 물질을 둘러싼 투쟁은 종식되고 지상에서 열반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태국에서는 사릿(Sarit) 총리(재임 1959~1963)가 1950년대 말부터 불교를 국가의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을 위한 주요 이데올로기로 이용했다. 태국이 국왕에 대한 존경과 불교 신앙에 기초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본 사릿은 태국 국민이 불교라는 타이 문화의 응집력과 국왕이라는 타이 사회의 구심점을 바탕으로 타이 국가에 대한 정체성을 가져야 하며, 이것이 모든 학생들에게 불상에 대한 경배를 가르치는 태국의 한 초등학교대로 이루어질 때 태국이 통합된 국민국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릿의 뒤를 이은 타놈(Thanom) 총리(재임1963~1973)도 국가 통합에 불교를 동원했다. 그는 승가(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불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집단. 편집자주)가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면서, 1960년대 중엽 ‘탐마짜릭(Thammacharik)’ 프로젝트를 승가와 협력해 실시했다. ‘탐마짜릭’은 빨리(Pali)어 ‘담마짜리까(dhamma cārika)’에서 파생된 것으로, 대략 ‘행각(行脚)하는 불법(佛法)’을 뜻한다. 이 프로젝트의 직접적인 목표는 태국의 소수민족들 특히 고산족들을 불교로 개종시키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불교를 바탕으로 한 국가 통합이었다.
국가에 대한 정체성에서 불교가 얼마나 중시되었는지는 태국 서북부의 매사리앙(Mae Sariang)군의 한 공립학교에서 일어난 다음의 에피소드에서 엿볼 수 있다. 타놈 총리 집권 시기인 1960년대 말 이 학교의 조례에는 교정에 세워져 있는 불상에 대한 합동 경배가 그 순서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기독교 신자 학생 몇 명이 거부하자 학교 당국은 그들에게 불상 경배를 강요했다. 이에 그 지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학교뿐만 아니라 군청에도 찾아가 항의했다. 그러나 학교와 군청 측은 불상에 대한 경배가 태국 국민의 의무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국 정부는 1970년대 말 국가정체성부(National Identity Board)를 설립해 타이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규정하면서 그 바탕에 국가ㆍ불교ㆍ국왕 등 세 요소를 두었다.
3. 국가에 대해 협조적인 태국의 승가
태국은 전통적으로 승가와 정부의 관계가 상호 협력적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 무렵, 국가를 비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군부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승려도 있었다. 방콕 최대의 마하니까이(Mahanikai) 종파의 사찰인 왓 마하탓(Wat Mahathat)의 주지였던 피몬탐(Phimontham)은 승가에 대한 정부의 개입뿐만 아니라 특히 정부의 반공(反共) 정책을 반대하다가 결국 1962년 체포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국가 정체성의 핵심 중 하나를 구성하는 태국에서는 낏티웃토(Kitthiwuttho) 승려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정부와 승가의 관계가 대체적으로 상호 친화적이다. 1970년대 중엽 낏티웃토는 ‘나와폰(Nawaphon)’ 운동을 통해 체제옹호적인 활동을 펼쳤다. ‘나와폰’은 빨리어 합성어 ‘나바팔라(nava-phala)’에서 파생된 것으로, ‘새로운 힘’을 의미한다. 그는 ‘계행(戒行)’ 내지는 ‘도덕’을 뜻하는 ‘실라(sīla)’, ‘지혜’를 뜻하는 ‘빤냐’, ‘삼매’ 및 ‘정신 집중’을 뜻하는 ‘사마디’ 등 불교의 핵심 개념 세 가지를 도입해, 이들을 태국 국민이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국민들이 ‘실라’ 차원에서 국가법을 준수하고, ‘빤냐’ 차원에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의무와 책임을 깨닫고, ‘사마디’ 차원에서 국가, 국왕, 불교 등에 대해 마음을 집중해야 국가적 단결이 이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낏티웃토는 군부의 반공 정책을 지지하면서 심지어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것은 악업이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계속> [복음기도신문]
조흥국 교수(부산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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