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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포커스]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의 불교

▲ 미얀마 불교 사원. 사진: Julie Ricard on Unsplash.

동남아시아 선교를 위한 불교의 이해(2)

4. 미얀마 불교 승려들의 민주화 시위

태국과는 달리 미얀마는 특이하게도 불교 승려들의 정치적 저항의 전통이 강하다.

1885년 영국이 티보(Thibaw) 왕(재위 187~1885)을 왕비와 함께 인도로 추방하자, 민중이 무기를 들고 이에 항의했으며 이때 불교 승려들도 가담했다. 그해 수도 만덜레(Mandalay)가 영국 군대에게 점령되자, 우 오타마(U Ottama)라는 이름의 승려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계율을 스스로 어기고 1889년 체포되어 사형될 때까지 수천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무장 투쟁을 벌였다. 1930년에는 버마협회총회의 급진적 분파에서 활동하던 불승 사야산(Hsaya San)이 영국이 부과한 세금에 반대해 남부 미얀마에서 대규모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승려들의 이러한 반식민 저항에서의 주도적 역할에 대해 영국 식민 당국은 승려들을 정치적 선동가라고 보았다.

1980년대 말 자유를 억압하고 나라를 세계의 최빈국으로 만든 군부의 독재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폭증하는 가운데 1990년 총선이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아웅산수찌(Aung San Su Kyi)의 민족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이 압도적으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가 정권을 이양하지 않자, 민중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만덜레에서는 그해 8월 8일 승려 수천 명이 시내에서 행진했다가 군인들이 쏜 총에 여러 명 죽고 구타당했으며 약 400명이 체포되어 끌려갔다. 이에 만덜레의 승려들은 8월 27일 모여 군인 및 그 가족에게서 시주 받는 것과 그들을 위해 불교적 의식을 집전하는것을 거부하기로 결의했고, 이 운동은 양곤(yangon)과 사가잉(Sagaing) 등 다른 도시로 확산되었다.

불교 승려들은 2007년에도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그해 군부 정권이 서민들을 위한 오일 및 가스 보조금 지급을 중단해 물가가 폭등하자, 양곤 시내에서 시민들의 항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여기에 불교 승려들이 참가해 수천 명의 승려들이 거리 시위를 주도했다.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탄압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십 명이 죽고 수천 명이 체포되고 구금되었다. 2007년 시위는 미얀마 승려들의 승복 색깔 때문에 종종 ‘사프란 혁명(Saffron Revolution)’이라고 불린다.

5. 태국의 산띠아속 운동

상좌불교는 대중적인 사회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그중의 하나로 태국의 산띠아속 운동을 들 수 있다. ‘산띠아속(Santi Asok)’은 빨리어 ‘산띠(santi)’와 ‘아소까(asoka)’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근심 없는 평화’를 뜻한다. 승려 포티락(Phothirak)이 1975년 발족시킨 산띠아속은 ‘풋타사탄(Phuttha Sathan)’이라는 이름의 불교 공동체를 중심으로 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에 참가한 출가와 재가는 함께 풋타사탄에 살면서 금욕적인 생활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나무로 지은 오두막집에서 살고 채식 생활을 해야 했으며, 특히 비구는 육식 금지, 하루 한 끼 이상 식사 금지, 중독성 또는 습관성 있는 물질의 금지, 낮 시간 수면 금지, 신발 착용 금지, 가방 및 양산 사용의 금지, 돈이나 기타 불필요한 것의 소유 금지, 성수(聖水)의 제작 및 살포 금지, 불상 및 부적의 제작 금지, 제사 의식의 집전 금지 등 산띠아속의 독특한 열 가지 계명을 지켜야했다.

산띠아속은 그 추종자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원칙에 입각한 삶을 요구했다. 첫째, 농사가 생계의 바탕을 이루는 단순한 생활이다. 이에 따라 풋타사탄에 사는 사람은 모두 자신이 입을 옷의 천을 스스로 짜며, 쌀을 직접 빻고, 채소를 손수 기르고, 식수원을 자체적으로 마련하고 모든 식품과 생필품은 공동체의 창고에서 공급받아야 했다. 산띠아속은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비롯되는 자본주의적인 소비문화를 비판하면서, 물질 만능주의를 버리고 ‘분 니욤(bun niyom)’ 즉 ‘공덕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덕주의의 정신은 ‘적게 먹고, 적게 쓰고, 많이 일하고, 사회를 위해 나머지를 모아두자’는 산띠아속의 유명한 슬로건에 반영되어 있다. 둘째, 불교 공동체적인 생활이다. 산띠아속의 불교 공동체는 비구 중심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출가와 재가 모두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하고 이상적인 불교 사회의 구축에 동참하는 것을 중시한다. 산띠아속은 특히 태국의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비도덕성에 대해 기성 불교계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온 점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태국의 정치 및 사회의 개혁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활동한 산띠아속의 대표적인 멤버로 짬롱 시므앙(Chamrong Srimuang)을 들 수 있다. 1985년 방콕 시장 선거에 출마한 그는 한편으로는 기존 정치권의 권력 남용과 부패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반 속인(俗人)이자 반 승려(half-man and half-monk)’로 불리는 자신의 금욕적인 생활 스타일을 부각시키고 ‘미스터 클린(Mr. Clean)’으로 불리는 자신의 청렴 이미지를 내세워 선거에서 압승했다. 그는 그 후산띠아속 세력을 등에 업고 1988년에는 ‘불법(佛法)의 힘’을 뜻하는 팔랑탐(Palang Tham)당을 창당했다. 이 팔랑탐당에는 탁신(Thaksin)이 1994년 가입해 그 이듬해 당수로 선출되었으며, 2001년에는 태국 총리가 되었다.

산띠아속 운동은 철저한 계율 준수와 검소한 생활로 많은 타이인들에게 매력을 주었으며, 태국의 불교계뿐만 아니라 정치 및 사회 전반에 대한 도덕적 비판으로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귀에 거슬릴 정도로 지나치게 격렬한 비판의 논조는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무엇보다도 기존 승가의 권위에 대한 반항과 급진적인 불교관은 보수 불교계와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 포티락을 포함한 산띠아속의 주요 멤버들에 대한 1989년 재판 이후 이 운동은 그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오늘날 산띠아속은 공동체의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6. 캄보디아의 토암마이어뜨라 운동

동남아시아 상좌불교 국가들에서 일어난 또 다른 중요한 불교 사회 운동으로 캄보디아의 토암마이어뜨라가 있다. ‘토암마이어뜨라(Dhammayietra)’는 빨리어 ‘담마(dhamma)’와 ‘보행, 행진, 여행’ 등을 뜻하는 빨리어 ‘야뜨라(yātrā)’의 합성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는 ‘불법(佛法)의 행진, 순례’를 의미하지만 대개 ‘평화의 행진’으로 알려져 있다. 1992년 시작된 토암마이어뜨라 운동의 배경에는 1970년 이후 약 20년 동안 전개된 캄보디아의 비극적인 현대사가 놓여 있다.

1970~1975년 친미(親美) 론놀(Lon Nol) 정권 시대 캄보디아 내 공산주의자와 베트남인이 숱하게 살해당했으며,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일환으로 캄보디아 동부 지역에 대해 행한 이른바 ‘융단 폭격’으로 많은 주민이 죽고, 그 지역 주민들의 프놈펜으로 대규모 이주가 일어났다. 특히 1973년 6개월 간 괌(Guam)과 태국에서 출격한 미 공군 폭격기들이 동부 농촌 지역에 투하한 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 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것보다 거의 두 배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캄보디아의 토암마이어뜨라 행진에 참가한 승려들과 시민들

이어진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까지 크메르루주(Khmer Rouge) 시대 캄보디아 사회에는 공포와 학살이 만연했다. 계급이 없고 평준화된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꿈꾼 크메르루주는 이를 위해 사적인 재산뿐만 아니라 고향, 선조, 지역 수호신 등의 친숙한 공간을 박탈했으며 심지어 가족을 포함한 전통적인 사회 구조와 전통적 정체성의 바탕인 불교 신앙을 파괴했다. 그들은 특히 도시 주민들을 시골로 강제 이주시켜 집단농장에 재배치해 혹독한 육체노동에 종사시켰다. 새로운 체제에 대한 철저한 순응을 요구한 크메르루주는 자신들이 ‘파인애플의 눈’으로 주민들을 감시한다고 선포해, 사람들에게 공포심과 절망감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새로운 질서에 복종하지 않는 자를 학살하거나 때로는 벌로 식량을 주지 않아 숱한 사람이 기아로 죽었다. 크메르루주 통치의 3년 9개월 간 약 1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상당수는 숙청되었고 나머지는 강제 노역, 질병, 기아 등으로 죽은 자들이었다.

크메르루주의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정권은 1978년 말 베트남 군대의 침공으로 붕괴되었으나, 캄보디아는 그 이후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점령한 1989년까지 10년 동안 내전에 시달렸다. 특히 베트남 군대가 진입하자 캄보디아와 태국 국경 지대의 난민 캠프들로 피난한 수천 수만의 캄보디아인들은 거기서 살해, 아동학대, 구타, 성폭행 등을 겪었다. 특히 가족, 이웃 혹은 친구를 잃은 젊은 난민들 중에는 극도의 공포와 좌절에 직면해 트라우마에 시달렸으며, 심지어 삶의 방도는 물론 그 의미를찾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암마이어뜨라 운동이 모하 코사난(Maha Ghosananda, 1913~2007) 승려에 의해 프놈펜에서 창시되었다. 1992년 4월 12일 처음으로 개최된 토암마이어뜨라에 350명의 승려, 여승, 재가 신도들이 참가했다. 그들은 캄보디아 국경에 인접한 태국의 아란야쁘라텟(Aranyaprathet)의 난민 캠프에서 그곳의 캄보디아인 난민 수백 명과 함께 출발했다. 행진은 그때가 낮에 45도까지 치솟는 무더운 계절이라 새벽 2~3시에 시작되었다. 행진 과정에서 마을사람들이 행렬에 종종 끼어들어 일부 구간을 함께 걸었다. 어떤 마을들에서는 주민들이 밥과 과일을 갖고 와 행진 참가자들에게 주었으며, 걷는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승려들은 행진 도중에 마을사람들에게 종종 물을 부어 축복해주었다. 난민 대부분은 행렬이 수도까지 가는 도중 여러 마을을 지나가면서 잃어버린 가족 및 친척과 재회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행진 참가자들은 매일 보리수 묘목을 심는 행사를 가졌다. 보리수 묘목은 스리랑카에서 갖고 온 것으로, 그 행사는 그들이 지나가는 지역의 마을에 동정심과 화해의 씨를 심겠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350킬로미터의 여정을 한 달 동안 걸어 5월 13일 프놈펜에 도착했다. 토암마이어뜨라 행사는 사전에 태국과 캄보디아 양국의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치러졌다. 이 행사에는 국내외 여러 단체가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었다. 특히 유엔의 세계식량계획(WFP)은 토암마이어뜨라 행진 참가자들을 위해 음식 통조림을 제공했다.

토암마이어뜨라는 1970년대 이후 캄보디아인들이 겪은 심리적 고통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 그 운동의 목적이었다. 이 운동은 그 이후 매년 기획되어, 1993년에는 행진 참가자들이 5월 4일 앙코르왓을 출발해 프놈펜까지 17일 동안 걸었으며, 도중에 끼어든 사람들로 행렬이 프놈펜을 진입할 때 그것은 거의 3천 명으로 불어 있었고 프놈펜에서 사흘 간 도시를 도는 행진에는 근 1만 명이 참가했다. 1994년의 세 번째 토암마이어뜨라는 4월 24일 밧덤봉(Battambang)주에서 출발해 5월 16일 앙코르왓에서 끝났다.

이처럼 토암마이어뜨라 운동은 매년 그 행진 기간과 구간이 조정될 수 있었고 참가자 숫자도 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크메르루주의 악몽을 씻어내고 캄보디아인들에게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공동체 정신을 회복시켜준다는 것이 그 운동의 목적이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그 기획의 중심에 있는 캄보디아 승가는 토암마이어뜨라를 통해불교가 캄보디아 사회에 화합과 평화를 위한 정신적 바탕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보아 이 운동을 캄보디아인들의 불교 신앙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간주했다.<끝>

cho.hk

조흥국 교수 | 부산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동남아선교정보센터

[월드포커스] 불교, 동남아국가의 불교민족주의와 국민국가 형성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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