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인 조카 웜우드에게 보내는 여덟 번째 편지 끝에 있는 이 짧은 문장이, 내게는 인생을 바꾸는 문장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믿음을 굳건히 지켜주는 문장이라고는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내가 얼마나 자주 이 문장을 되새기고 있는지 최근에 알아차리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 문장을 내가 쓴 나니아에 관한 책에서 두 번 인용했다. 또 C. S. 루이스에 대해 강연할 때마다 인용했다. 그중에는 전혀 계획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학생이나 교인과 상담할 때도 이 문장이 내 혀에서 맴돈다. 가장 중요한 건 심령이 건조해질 때면 이 문장을 사용해서 나 자신을 향해 설교한다는 사실이다.
기복의 법칙
이 문장은 스크루테이프가 편지에서 웜우드에게 “기복의 법칙”(law of undulation)을 이야기하는 중에 나온다. 기복(undulation, 起伏)은 “파도 같은 리듬”을 표현하는 멋진 단어이다. 기복의 법칙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간 삶의 영구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스크루테이프는 인간을 양서류라면서 조롱하는데, 한 발은 (천사처럼) 영원한 세계에, 한 발은 (동물처럼) 물질의 세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존재로서 우리는 영원한 세계에 속하지만, 동물로서 우리는 유한한 시간 안에 살고 있다.
영혼은 영원한 대상을 향할 수 있지만, 우리의 몸과 열정과 상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 결과가 바로 기복이다. “골짜기로 떨어졌다 꼭대기로 올라갔다 하며 끊임없이 후퇴했다 복귀”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한때 풍요로운 감정과 활력에 넘치는 육체를 경험하는 시기를 맞는다고 해도 다시 건조함과 둔감함, 무감각과 빈곤의 시기를 만나기 마련인 것이다.
꼭대기와 골짜기
스크루테이프는 하나님이 인간을 기복의 법칙에 복종시킨 이유를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우주를 자신을 닮은 작은 복제품으로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가 그분의 뜻에 자유로이 순응함에 따라, 당신의 형상을 지닌 우리 피조물의 삶이 하나님 속에 피조물로서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와 연합하는 동시에 그분과 구별되기를 원하신다.
골짜기, 특히 영적 골짜기는 바로 이런 더 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하다. 때때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하나님은 강하게 임재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우리가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참으로 지혜롭게도 우리가 유혹을 더 쉽게 이길 수 있도록 능력을 주는 감정적인 감미로움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럴 때면 순종은 마치 살아 있는 샘에서 솟아오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기도는 호흡처럼 자연스러워진다. 우리 삶에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임재는 가장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다. 이때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계곡 또는 골짜기가 따라온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거두어버리신다.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 경험, 또는 우리가 느끼는 현실로부터 하나님이 스스로를 감춘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분은 순종을 매우 자연스럽고 힘들지 않게 만드는 정서적 지원과 영적 동기를 제거한다. 그런 시점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임재가 제공하는 감정적 풍요와 즐거움 없이도 의무를 수행하라고 하신다. (물론 그렇다고 그분이 항상 주시는 은혜까지 거두신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더 온전하게 부합하는 피조물로 성장하게 된다.
갈망 대 의도
이런 현실이 우리를 믿음을 지키도록 하는 바로 이 문장으로 이끌고 간다. “인간이 원수의 뜻을 따르고 싶은 갈망을 잃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원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왜 그가 자기를 버렸는지 계속 의문이 생기는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그때보다 더 우리의 대의가 위협받을 때는 없다.” (김선형 옮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77)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문장을 부분으로 나눠보자.
루이스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하는 갈망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를 구분한다. 이 구별은 기복의 법칙에 의해 만들어진다. 골짜기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감미로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무겁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이 시기에 우리는 자신과 분리된 느낌을 받는다. 아예 갈망을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오로지 우리 몸과 밀접하게 연결된 현실에 대해서 거의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반응이라는 열정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차원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느낄 수 없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느끼지 못한다. 도무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기에, 우리의 열정은 (즉,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예 자극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과 의지라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바로 의도가 작동하는 단계이다. 이 수준은 열정의 수준보다 높거나 더 깊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깊고도 근본적인 헌신이 있다. 심지어 어떤 상황을 만나도 그 뜻을 따르겠다는 깊고 본질적이며 지속적인 열망이 깔려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뜻이 아니다”라는 건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잔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수준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 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여전히 당신의 뜻을 행할 생각이며, 이 의도는 내 마음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사라지지 않는 갈망을 반영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간격
루이스는 말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Malcolm, Chiefly on Prayer)에서 기도에 관해 말하면서 이 구분을 다시 언급했다. 그는 기도가 성가시게 느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도는 분명 귀찮네. 기회만 생기면 얼씨구나 하고 기도를 빼먹게 되고…”(113). 기도에 대한 이런 의무감이 우리를 정말 거북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장미꽃을 피우기 싫어하는 장미나무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혹은, 그런 장미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장미나무는 장미꽃을 피우고 싶어 해야 마땅하지 않나?”(홍종락 옮김, 개인기도, 1667, 167쪽)
우리가 완전해진다면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될 것이라고 루이스는 말한다. 우리가 의무로 분류하는 다른 모든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의무라는 범주는 자발적인 열망과 꼭 해야 할 의무 사이에서 생기는 간격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과 꼭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도덕적 노력이라는 전체 범주를 만든다.
그렇지만 루이스는 “언젠가 우리는 의무와 도덕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천사들은 당위라는 단어의 의미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단지 의무를 넘어서는 수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기도와 사랑이 “종달새의 노래처럼, 꽃의 향기처럼 자연스럽게”(169) 우리에게서 흘러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의무의 영역에서, 곧 시도 때도 없이 열망과 해야 할 일이 나눠지는 곳에서 살아야만 한다.
루이스는 우리를 격려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리가 드린 최악의 기도가 최선의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까 경건의 느낌이 조금도 없고 전혀 내키지 않는데도 억지로 드리는 기도 말일세. 거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이런 기도들이 감정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나오기 때문일세”(172). 그러나 여기에 굳이 덧붙이자면,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다시 스크루테이프로 돌아가서, 우리의 열망을 자주 질식시키는 것은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하나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흔적이 실제로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 것 같다”는 말이 중요하다. 그분의 모든 흔적은 사실상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실재는 창조주를 계속해서 증언하고 있다. 하늘이 지금도 영원히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시 19:1).
그러나 골짜기에서 이런 실재를 인식하는 우리의 능력은 줄어든다. 실제로 느끼는 현실은 종종 현실 그 자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럴 때면 하나님이 마치 “사라진 것 같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매우 강력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힘, 그러니까 ‘그런 것 같은’ 때의 그 힘을 우리는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단지 주기적인 (심지어 영구적인) 겉모습이 우리 행동을 지배하는 독재자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루이스는 더 나은 방법을 소개한다.
골짜기 인정하기
골짜기에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 정직하게 시작하라. 골짜기에 있음을 인정하라. 그 골짜기의 이름을 정하라. 하나님이 없는 것 같으면, 그렇다고 큰 소리로 말하라.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이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속 환자는 “왜 그가 버림받았는지를 묻는다.” 그는 마치 자신을 버린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향해, 관찰의 방향을 위로 바꾼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위대한 성경적 혈통을 따르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부재에 직면하여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왜?”라고 간청한다. 그리고는 “얼마나 오래?” 또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외친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되풀이한다. 예수님은 시편 저자를 인용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시 22:1). 이것이 바로 골짜기에 빠졌을 때 바른 믿음의 모습이다.
절망과 혼란 속에서 터지는 외침은 하나님이 부재한 것 같이 느껴질 때 드러나는 믿음의 모습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메마른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야말로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풍부한 소통의 지원 없이, 신앙의 정점이 주는 정서적 감미로움이 없음에도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가장 깊고 끈질긴 갈망과 헌신을 담고 있는 영혼의 깊은 곳, 즉 마음의 중심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여전히 순종한다
마지막 세 단어와 함께 이 문장이 주는 울림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런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열렬한 열망이 없고 하나님의 명백한 버림 앞에서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순종한다. 하나님의 부재는 결코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감정의 빈곤과 건조함과 둔감함이 결코 불순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실수하지 말라. 그것은 골짜기에 숨겨놓은 악마의 계략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게 하려고 악마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부재한 것 같다고 느끼는 우리의 경험을 악용한다. 그렇기에 모든 합리적인 지원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오로지 예수님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처럼 사탄의 대의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도 없고 또 하나님의 부재가 주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예수님을 붙들고 빛 가운데 행하려 한다면, 그런 상황에서 이 마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늘진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갈고 닦은 신실한 순종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하는 길이 된다. 루이스의 영웅 조지 맥도날드(George MacDonald)는 “순종은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인의 부재야말로 오히려 주인의 존재가 주는 기쁨으로 이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복음기도신문]
조 리그니 (Joe Rigney) | Bethlehem College & Seminary 의 학장이다. 지은 책으로는 ‘전투 이상: 정욕에서 벗어나 어떻게 승리와 자유 그리고 치료를 경험하는가(More Than a Battle: How to Experience Victory, Freedom, and Healing from Lust)’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