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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칼럼] 죄를 죄로 인식할 때 살 길이 열린다

사진: Mo on Unsplash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13~25)

어떻게 하면 제대로 결론 맺는 인생이 될 것인가! 제가 목회라는 직임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제 속사람이 살아있는 것을 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에 주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소원하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열심을 내고 마음도 모으고 공부하고 기도하며 매진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주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선한 의도를 갖고 선한 생각을 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기 원하는데 왜 그럴 때마다 오히려 상처를 입고 속이 상하는 것일까요?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 어떻게 이런 상한 심령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참 많이도 물었는데 어느 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누구인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의 사람이냐, 나의 아들이냐?” 멍해졌습니다. 그 뜻을 깨닫지 못했을 때 주님께서는 제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실제 인식과 정체성이 선명했을 때 오는 사명! 제가 하나님께 속했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무릎을 치고 무릎을 꿇고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주님,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주님의 뜻과 생각과 의지를 갖고 계시는데,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면 되지, 너는 나를 신뢰하면 되지, 너는 나를 믿으면 되지.” 이 말씀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많이 헤맸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하는데도 다른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마음에는 두 법이 있고, 그 두 법이 싸웁니다. 진실로 주님을 따라가고 싶고 주님으로 마음을 채우고 싶은데, 속에는 또 다른 법이 있어서 두 법이 싸운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의 복잡한 마음이 나옵니다. 마음 가운데 두 법이 있다고 합니다. 한 법은 주님을 따라가고 싶은데 또 한 법은 육신을 따라가는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두 법이 싸운다는 의미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법이 싸우면 안 되지’ 하는 획일적인 논리도 깨지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을까요? 우리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7)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지만,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롬 7:13)

율법으로 죄를 깨닫습니다. 죄가 명확해집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롬 7:8)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계명이 있기 때문에, 죄를 죄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아니라 믿음의 사람에게 죄가 죄로 인식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믿음의 사람에게는 죄가 죄로 인식되는 그때만 십자가로 달려갈 수 있는 힘을 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달려갈 수 있는 강력한 추동력이 생깁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살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입니다. 십자가로 달려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탐심이 죄라고 선언하는 율법이 없다면 탐심을 죄라고 인식할 수 없습니다. 탐심을 부리는 것을 보고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지’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탐심은 내 것 아닌 것을 갖고 싶은 욕구입니다. “이것은 내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입니다. 에덴의 원리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내 것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이 마음에 들어올 때, 십자가로 달려갈 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계명이 10계명입니다. 10계명은 탐심에 대한 계명입니다. 계명이 없다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죄를 죄로 인식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명명했던 것이 죄입니다. 인권 이슈에 대해 의로운 분노가 있습니다. 죄를 죄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혼란스럽게 부르는 용어가 있습니다. 혐오스럽게 여기면 안 된다며 용어를 바꾸어버립니다. 동성애라고 말하면 혐오스럽다며, 성소수자라고 부릅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것은 죄 맞습니다. 징그러운 것 맞습니다. 고상한 이름으로 바꾸어버리고, 죄를 죄라고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정신세계는 깊은 돌이킴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양성평등에 대해 앞장섭니다. 남성 중심의 문화는 고쳐야 합니다. 설거지하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양성평등이 아닌 성평등을 부르짖는 ‘사탄스러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봐야 합니다. 양성평등이 아니라 성평등이라고 말하는 의도를 간과하면 안 됩니다. 죄를 죄라고 불러야 합니다. 애플이나 구글 같은 경우, 성별 기입란에 남성, 여성 외에 제3의 성들이 있습니다. 20개 넘는 성을 체크할 수 있는 공란이 있습니다. 그것을 죄라고 말하면 어려움을 겪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죄를 죄라고 할 수 있는 율법을 이미 주셨습니다. 죄를 죄라고 인식할 때만 우리는 십자가로 달려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죄를 죄라고 인식하지 못할 때는 십자가로 달려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주님과 연합할 수 있는 길을 원초적으로 잃어버립니다.

비대면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과는 비대면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는 얼굴과 얼굴, 마음과 마음을 맞대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모두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이 온전하게 계심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때로 비대면이 속편할 수 있습니다. 일정 부분 숨기고 싶은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비대면으로 자유함을 누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속마음을 펼쳐 보이기도 하고 안 좋은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과 관계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가르쳐주십니다. 죄는 죄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헤아리고 있는지 우리 중심을 다 아십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듯하게 앉아 있는지 아십니다. 모든 종교적 행위의 중심도 아십니다. 우리 중심을 아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격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죄와 허물을 모두 낱낱이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드러낼 때 드러내시지만 가리실 때는 가리십니다. 분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낱낱이 드러냅니다. 공동체에서 낱낱이 드러내는 날카로움은 그래서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시기에 가리실 때 가리십니다. 우리 중심을 보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죄로 보게 하셔서 돌이켜 십자가로 달려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인격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고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달려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 안에 두 법이 싸운다고 합니다. 죄와 허물은 원어로 ‘하마르티아, 파랍토마’입니다. 빗나가다, 본류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주님이 채워져야 하는데 다른 것이 채워져 있는 것이 죄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구가 마음에 채워져 있는 것이 죄입니다. 그것이 탐심입니다. 탐심 자체가 주님을 향한 과녁에서 빗나가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 주님께로 다시 달려가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했을 때, 영원한 생명의 역사가 깃들게 하겠다는 의미가 깨달아지기를 축복합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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