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신 앞에 놓인 함정
갱신의 가능성을 품은 운동에는 많은 함정이 있기 마련이다. 위험을 미리 인식하고 피해야 한다. 교회 갱신으로 가는 길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 모든 교단과 기관이 과거에도 저질렀고, 지금도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실수를 피해야 한다.[1] 지난 수십 년 동안 주류 교회의 위축은 복음주의의 성장과 맞물려 있었다. 많은 이들의 눈에 그 사실이 주는 교훈은 단순했다. 종교에서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보수정통주의가 통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이제는 더는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복음주의 교회도 쇠퇴하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남침례교는 무려 100만 명이 넘는 교인을 잃었다.[2]
교회 갱신의 길은 진보와 보수 교단 및 기관이 지금 현재 저지르고 있는 실수를 피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잘 알려진 비유를 사용하면 양쪽에 괴물이 있다. 선원들은 스킬라로부터 제대로 떨어져서 항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카리브디스의 손아귀에 빠지고 말았다. 오늘날 미국 교회에는 조심스럽게 피해야 하는 경쟁적인 “괴물”이 몇 가지 있다.
괴물 스킬라 피하기
첫 번째 글에서 나는 왜 자유주의/진보 기독교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지, 왜 교회 갱신 프로젝트에서 그 방향을 피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했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모든 세기와 문화에 걸쳐 보편적으로 믿어 온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거부한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재정의하는 것만이 현대 과학 시대에서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자유주의 개신교는 결국 현대 자유주의 세속주의와 하나도 다르지 않게 되었고, 본질적으로 그들은 실재에 관해서, 하나님의 본성과 방식에 관해서,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서 세속주의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현대 문화가 결코 제공하지 못하는, 구별되는 뭔가를 세상 사람들에게 제시할 능력은 이제 그들에게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보수 교회의 지독한 실패에 분개하는 많은 전-복음주의자(ex-evangelicals)가 복음주의라는 괴물 카리브디스를 피하려고, 오히려 다른 괴물 스킬라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완전히 ‘탈 회심’(de-convert)하지 않은 사람들은 (관점에 따라서 모호하다고 할 수도 있는) 교리적 자유와 진보적인 정치적 의제 때문에 주류 개신교 교회로 향한다. 그러나 정치와의 긴밀한 연계는 주류 교회 자신을 쇠퇴시키는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를 쇠퇴시키는 이유가 되고 있다.
괴물 카리브디스 피하기
두 번째 글에서 나는 복음주의의 쇠퇴에는 많은 뿌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19세기 초부터 반지성주의와 반엘리트주의 성향이 강했던 미국 복음주의는 고등교육과 학문, 과학을 크게 불신했다.[3] 물론 모든 보수 종교는 자연적으로 율법주의와 독선, 즉 “죽은 정통”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4]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대중의 눈에 세 가지 심각한 불신을 일으키게 하는 실수로 이어졌다.
첫째, 상당수의 복음주의자가 기독교 신앙을 미국의 우익 포퓰리즘이라는 특정 정치적 의제와 결합시켰다. 많은 젊은 성인들, 특히 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눈에 복음주의자는 기독교를 단순한 파워 블록으로 격하시키는 존재로 비췬다.[5]
둘째, 복음주의자는 현대 문화를 향해 날카롭고 가혹한 발언을 함에 따라 사람들을 끌어당기거나 복음을 전하려는 의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국민의 절반이 넘는, 즉 자유주의와 세속적 인구에게 ‘우리는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음’이라는 표시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복음주의자가 호소할 수 있는 대상은 전통적으로 사고하는 덜 세속화된 미국인, 점점 줄어들고 있는 숫자에 불과하다. 복음주의자는 그들의 사역 방식을 역사의 새로운 단계인 탈 기독교 사회에 적응시킬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6] 하나님, 죄, 도덕적 절대성, 그리고 내세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참여시키고 설득하는 데 복음주의자가 그동안 진전을 이룬 건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진보 좌파의 인종과 젠더에 대한 과도한 이념적 주장에는 저항하면서도 많은 복음주의자가 인종차별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그들은 교회와 목사들을 성적 학대로 고발한 여성들에 대해 비극적이라고 할 정도로 잘못되고 방어적인 입장을 취했다.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와 교회가 여성 고소인을 ‘페미니스트’에 빠진 사람으로 호도했다. 용서와 화해를 내세운 것도 따지고 보면 다 피해 여성을 침묵시키고 성범죄자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대중의 눈에 비친 일련의 모습은 복음주의 신뢰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중도” 피하기
이제 우리는 반대편에 서 있는 두 개의 바다 괴물이라는 신화의 이미지는 뒤에 남기고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두 괴물의 손이 닿지 않게 정확하게 바다 한가운데에서 항해할 수만 있다면, 이론상 우리는 그 어떤 사망이나 손상 없이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교회 갱신의 길은 너무 보수적이지도, 또 너무 진보적이지도 않은 길을 택하는, ‘중도’를 걷는 것이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그것은 나쁜 조언이다. 자유주의 주류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개신교 교리를 보수주의보다 덜 지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을까? 인종 및 경제적 정의에 대해서는 꼭 조금만 걱정해야 하는가? 거기에 더 에너지를 쏟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현대 문화가 조장하는 우상과 권력 구조에 대해 꼭 온건한 비판만 해야 하는가? 성경의 권위를 꼭 적절한 수준에서만 인정해야 하는가? 교인들이 꼭 모두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항상 ‘중도’ 아니면 철저한 ‘비정치적’이어야만 하는가?
전혀 아니다. 새로워진 교회는 역사적 교리에 있어서 완전히 정통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이어야 한다. 진정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차이를 줄이는 것’ 또는 양쪽 모두를 다 조금씩 받아들이는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양극단에 빠져 범할 수 있는 실수를 피하는 방법도 있다.[7]
믿음, 윤리, 영성, 그리고 실천에 있어서 새로워진 교회는 자신의 길을 개척할 것이다.
(a) 갱신된 교회는 더 수준 높은 지적 온전함(integrity)과 철저한 학문을 추구할 것이다. 교회는 그럼으로써 주류 교회보다 공동선과 공공 정의에 더 큰 공헌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이제 철저하고 공들인 주석과 보수적인 개신교보다 훨씬 더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고 전파하는 모습을 통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b) 윤리적인 면에서, 갱신된 교회는 인종과 빈곤에 대한 ‘자유주의적’ 견해와 낙태, 섹슈얼리티, 가족, 젠더에 대한 ‘보수적’ 견해를 묘하게 결합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이 외부인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함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개인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갱신된 교회는 사회 개혁에 대한 헌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경청,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희생적인 사역과 전도, 새로운 교회 개척, 변증, 현대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대한 깊은 헌신 등 이 모든 것을 결합할 것이다. 교회는 새로운 문화에 복음을 맥락화하고 신학과 현대 사상이 서로 대화하도록 해야 한다는 당면한 필요를 신학의 회복뿐 아니라 역사적 교리와 전통의 충실함(faithfulness)이라는 점과도 결합할 것이다.[8] 교회는 (성공회, 루터교, 개혁파와 같은 정통 고백 교파 중심의) 역사적 교리에 대한 강조와 (오순절 및 기타 부흥 전통에 의해 강조하는) 영적 경험 및 (주류에서 중시하는) 사회 개혁에 대한 강조를 하나로 합칠 것이다.
(c) 갱신된 교회는 많은 백인 미국인이 지향하는 급진적인 개인주의[9]나 진보 좌파 대부분이 주장하는 세속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인종과 정의에 대한 방향을 찾을 것이다.[10] 정의에 관한 성경 말씀과 더불어, 미국의 유색인종이 겪은 경험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실제로 좌파, 우파 또는 중도가 아닌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리키는 작가와 사상가가 있다.
(d) 갱신된 교회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급진적인 개인주의나 부정적인 혐오를 반영하지 않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육체의 긍정, 동의, 다양성, 자유, 안전, 그리고 사랑에 대한 문화 고유의 내러티브를 사용함으로써 교회는 기독교 성윤리를 거부하기보다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더 큰 틀 안에서 설득력 있는 용어로 성에 대한 성경적 비전을 제시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e) 갱신된 교회는 정치와 국가에 대한 더 나은 방법을 찾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등장한 새로운 포퓰리스트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는 국가에 대한 기존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멀어졌다. 우파에서는 점점 더 많은 보수주의자가 국가 권력을 사용하여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을 억압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독교를 홍보하는 데 매력을 느낀다(예: 헝가리의 빅터 오르반(Victor Orban)에 대한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의 매료). 다른 한편으로, 대부분의 젊은 성인들은 진보적이며 국가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국가가 부와 권력과 지위를 특권 집단에서 불리한 집단, 특히 인종 및 성 소수자 및 여성에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이런 주장은 수혜 집단 구성원의 자유와 평등한 대우,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까지도 정당화한다.[11]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국가의 역할과 정치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거의 전쟁을 치른다고 할 정도로 서로 다른 견해로 다투고 있다. 갱신된 교회도 이런 논쟁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는 모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일각에서 들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무시하면 안 된다. 그건 모두가 다 동등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2] 교회는 현재 미디어 ‘거품’ 중 하나에만 완전히 또는 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뚜렷한 세계관을 특권으로 하는 유망한 제안도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더 중립적인 방향을 지향함으로 공공 영역에서 여러 종교가 다 함께 번성하고 참여를 촉진하는 제안을 채택해야 한다.[13]
갱신을 위한 리더십
효과적인 운동의 핵심은 리더십이다. 리더십은 다음과 같은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다중 민족(multi-ethnic). 앞서 말했듯이 갱신된 교회는 처음부터 다중 민족이어야 한다. 초기 성립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몇 명의 나이든 백인 남성이 처음에 교회를 시작하고는 젊은 다민족 지도자를 초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나 처음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이 처음에도 또 시간이 가도 계속해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다중 교파(multi-denominational). 교단과 전통을 초월한 지도자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특정 전통에 지나치게 지배받는다면, 교회는 신뢰성을 잃고 “사실상 침례교” 또는 “사실상 장로교” 등으로 비췰 것이다. 참을성 있는 경청과 노력 없이는 결코 함께하지 않을 많은 그룹(루터교, 오순절, 전통적인 흑인 교회)이 있다.
다중 “접점”(multi-“nodal”). ‘노드(node)’는 네트워크의 교차점이다. 기독교 지도자는 공적인 교단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인과 교회 및 사역의 강력하고 다양한 네트워크와 비공식적이지만 많은 경우에 엮여서 살고 있다. 갱신 리더는 네트워크가 잘 형성되어야 한다.
이런 부분에서는 다를 수 있다.
(a) 영적 은사, 적성, 재능 및 전망. 광범위하고 심오하며 지속적인 운동은 결코 한 명의 지배적 인물에 의해 주도될 수 없다. 심지어 예언적 기질이나 예술적 기질, 경영적 기질 또는 학문적 기질이 다 비슷하다면, 아무리 여러 사람이 모였다고 해도 제대로 된 운동이 일어날 수 없다. 리더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리더를 분류하는 방법은 다양해야 한다! (아래 목록은 중복된다.)
• 다양성을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은 에베소서 4장에 기초한 앨런 허쉬(Alan Hirsch)의 “APEST” 목록이다. 이것은 사도적(apostolic), 예언적(prophetic), 전도적(evangelistic), 목양적(shepherding), 그리고 가르치는(teaching) 은사와 성향을 의미한다.[14]
• 다양한 은사를 생각하는 또 다른 방법은 흔히 조직의 이사회에서 자주 인용하는 네 가지 유형의 리더로 구분하는 것이다. (1) 비전가 또는 ‘아이디어 형’ (2) 예산, 기금 마련 및 비즈니스 모델을 이해하는 금융 전문가, (3)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을 이해하는 전략가, (4) 조직의 실제 제품을 꿰뚫고 있는 해당 주제 전문가.
• 은사를 다양하게 갖추는 마지막 방법은 리더십의 직업 구성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다. 목사와 신학자가 기독교 갱신 운동에 중요한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성직자가 지배하는 갱신 운동은 단지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결과를 낸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건 결코 개신교와 맞지 않다는 점이다! 학자, 사업가, 예술가, 과학자, 언론인, 정치인, 변호사 등의 평신도 지도자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b) ‘자본’의 형태. 자본은 여러 형태를 가질 수 있다. 부와 같은 경제적 자본이 있다. 관계적 연결과 같은 사회적 자본뿐 아니라, 상징적, 문화적 자본 및 기타 세분된 다른 자본도 있다. 제임스 헌터(James Hunter)가 썼듯이, 중복된 자본과 다양한 은사를 가진 지도자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할 때 “세상은 진짜로 변한다.”[15]
그러나 이 분야에서는 달라선 안 된다.
영적 성숙. 새로운 운동이 저지르는 지극히 흔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는 아주 단순하다. 꼭 필요한 다양한 형태의 자본과 연결을 얻기 위해 영적 성숙이 부족한 사람을 지도자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물론 성장하고 있는 확고한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다양한 수준의 성숙과 영적 경험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교만과 자기중심적 태도, 또는 분노와 가혹함의 패턴이 익숙한 사람을 지도자로 끌어들이는 것은 비극을 부르는 치명적인 실수이다.
리더는 이래야 한다.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갱신을 위해 일하는 지도자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 활력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여한 사람들의 다양한 은사와 자본은 단지 인위적으로 결합할 뿐이다. 여러 사람의 다양한 관점과 지식이 우리 속에 깊이 스며들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더 현명해지고, 더욱 폭넓은 관점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더 창의적인 태도로 서로를 신뢰할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전형적인 예는 18-19세기 영국의 “클래펌 모임”(Clapham Group)이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친구들의 내부 서클로, 런던 교외의 클래펌 마을로 이사하면서 문자 그대로 공동체가 되었다. 그들의 공통 목적은 기독교/성경적 가치로 영국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노예제 폐지에 중점을 두었다. 클래펌 모임에서 파생한 것 중 하나가 격주 토론 그룹에 외부 인사를 초대한 성직자 그룹인 에클레틱 소사이어티(Eclectic Society)이다. 바로 에클레틱 소사이어티에서 처치 미셔너리 소사이어티(Church Missionary Society)와 중요한 복음주의 신문인 크리스천 오브저버(Christian Observer)가 탄생했다. 클랩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록을 참조하라.
너무 빨리 움직이지 말라.
클래펌의 사례는 깊고 지속적인 변화가 결코 한 번에 또는 빠르게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그보다 더 기초적인 다른 프로젝트가 먼저 완료되어야만 가능하다. 가장 빨리 이뤄져야 하는 것 중에는 이 시리즈의 세 번째 기사에서 언급한 ‘이니셔티브’가 있다. 공통된 신학적 토대가 구축되어야 한다. 회개와 특별한 기도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미래에 대한 비전과 구체적인 목표를 꿈꾸고 브레인스토밍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인도할 “프로테스탄트 사회 교육”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된 마음과 비전의 통일성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수행할 특정한 이니셔티브와 프로젝트를 결정하고 각 프로젝트를 장기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리더십 팀에 새로운 사람들을 모집하라. [복음기도신문]
[1] 어떤 사람은 우리가 미국 교회의 갱신을 위해 주류 개신교나 복음주의 개신교를 기대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가톨릭교회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게 어떻겠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톨릭도 매우 심각한 성적 학대 스캔들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급격한 쇠퇴에 직면해 있다. 로스 두타트(Ross Douthat)은 다음과 같이 썼다. “최근 들어, 우리[가톨릭]는 교황이 바뀔 때마다 신학과 이데올로기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나라와 교회 사이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있고, 현재의 교황 제도 아래에서 벌어지는 교리적 갈등은 추기경 사이에도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일반 신도 수준에서 말하자면, 서유럽에서 라틴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이전에 가톨릭이었던 많은 국가와 지역에서 가톨릭은 종교 개혁이라는 위기를 능가하는 신도 이탈을 경험했다.” “The Shadow of Failure: A Reply to Edmund Waldstein,” First Things, June 2022.
[2] “Southern Baptists Drop 1.1 Million Members in Three Years,” Christianity Today, MAY 12.
[3] Nathan O. Hatch, The Democratization of American Christianity, Yale, 1989.
[4] “Live Orthodoxy” in Richard Lovelace, Dynamics of Spiritual Life: An Evangelical Theology of Renewal(Expanded Edition), IVP, 2020, 271-288; Sinclair Ferguson, The Whole Christ: Legalism, Antinomianism, and Gospel Assurance―Why the Marrow Controversy Still Matters, Crossway, 2016.
[5]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주의자는 개신교 주류가 자유주의 및 민주당과 결합했을 때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보수주의 및 공화당과 관련해서 저질렀다.
[6] See Lesslie Newbigin, Foolishness to the Greeks: The Gospel and Western Culture, Eerdmans, 1988, and “Can the West Be Converted?”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January, 1987.
[7] 단순한 조합이나 ‘중간 타협책’이 아닌 대안을 찾기 위해서 가장 접근이 쉽고 탁월한 방법은 크리스토퍼 왓킨(Christopher Watkin)이 곧 출간할 책에서 찾을 수 있다. Biblical Critical Theory: How the Bible’s Unfolding Story Makes Sense of Modern Life and Culture, Zondervan, 2022.
[8] For example, Michael Allen and Scott Swain, Reformed Catholicity: The Promise of Retrieval for Theolog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Baker, 2015.
[9] Christian Smith and Michael O. Emerson, Divided by Faith: Evangelical Religion and the Problem of Race in America, Oxford, 2000; Also see C. Smith, American Evangelicalism, especially chapter 7- “Ironies of Subcultural Distinction,” 178-217.
[10] 미공개 논문에서 제임스 헌터(James D. Hunter)는 “분석적이고 비판적 인종 이론”과 “존재론적이고 비판적 인종 이론”을 구분한다. 후자는 당신의 인종을 당신의 궁극적인 정체성으로 바라보고, 다른 모든 요소를 제거하거나 주변화함으로 인종을 “구체화”한다. 내 생각에 헌터의 논문이 출판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우리가 다루는 모든 가능성(option)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할 것이다.
[11] Eric Kaufmann, “The Politics of the Culture Wars in Contemporary America”, Jan 25, 2022, The Manhattan Institute.
[12] 갱신된 교회가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들어야 할 두 개의 에세이는 에릭 카우프만(Eric Kaufmann)의 Manhattan Institute 기사와 아담 조이스(Adam Joyce)가 쓴 “만약 ‘제3의 길’이 있다 해도, 이건 아니다(ABC Religion and Ethics, May 10, 2022.)”이다. 조이스는 매우 진보적인 입장에서 말한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닌 사람을 중도주의자로 구분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 중 상당수가 그의 말과 달리 실제로 권력과 인종 분석을 실시했다. 또한 어떤 주제에 있어서 단지 스펙트럼 양쪽의 다른 주장을 결합하는 것이 중도주의자라는 그의 주장도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에세이는 단지 ‘중도’ 입장을 취함으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떻게든 정치적 수준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유익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13] See Rowan Williams, “Secularism, Faith, and Freedom”, chapter 2 in Faith in the Public Square, Bloomsbury, 2012—can be found on-line at VIRTURONLINE; Wilfred McClay, “Two Kinds of Secularism” in The Wilson Quarterly(Summer, 2000). A sophisticated dialogue on this subject can be found in R. Audi and N. Wolterstorff, Religion in the Public Square: The Place of Religious Convictions in Political Debate(Lanham: Rowman and Littlefield, 1997).
[14] See Alan Hirsch, 5Q: Reactivating the Original Intelligence and Capacity of the Body of Christ, 100 movements, 2017. 앨런은 아주 세세하게 각 유형의 리더의 특성을 설명한다. 어느 리더나 혼자로는 안 된다는 사실, 누구나 다른 성격을 가진 리더와 동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하게 강조한다.
[15] James Davison Hunter, To Change the World: The Irony, Tragedy, and Possibility of Christianity in the Late Modern World, Oxford, 2010, 43.
팀 켈러(Tim Keller) | 팀 켈러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이이다. City to City의 회장과 The Gospel Coalition의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을 저술해오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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