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GTK 칼럼] 사회정의와 복음

사진: Elio Santos on Unsplash

지난 주일에 아침 예배를 마치고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한 여인이 나를 만나기 위해 긴 회중석 끝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긴 회중석에서 복도로 나가는 길이 막혀 회중석에 갇힌 것 같이 된 상태에서 그녀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자신이 타지에서 왔다고 말했지만,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사회정의”에 대한 나의 이해를 도와주려고 했다.

“당신이 뭐라고 생각하든지 간에 사회정의에 대한 문제는 “복음의 문제”입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불의한 일이 이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정의를 위해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건강보험 회사에 여러 개의 소송을 제기하는 중입니다. 제게 이러한 투쟁이 복음 사역이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사회정의에 대해서 싸우지 않는다면 당신은 신실한 증인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너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복음의 메시지와 바로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나는 최대한 그녀의 말에 동의하려고 노력했다. “맞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도덕법에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정의 문제를 한 계명으로 함축해서 말한 것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두 번째 계명입니다.”

“맞아요.” 그녀는 말했다. “저는 “너는 네 주를 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을 복음이라는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흠, 그것은 첫 번째 계명이고요.” 나는 계속 말했다. “그것은 여전히 계명이지 복음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는 말했다. “나는 성경에서 그 구절을 보여 줄 수 있어요.”

“예, 부인. 압니다.” 나는 말했다. “그 말씀은 마태복음 22:37-40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을 설명한 것이지 복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녀는 계속했다. “그러니 그 말씀은 복음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복음과 율법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복음의 전주이지 복음의 일부가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에게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책망하고, 조그마한 죄 하나라도 어기는 사람을 저주합니다. 하지만 우리중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2:10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48에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기준은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준에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하지(롬 4:15) 구원 얻게 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단지 우리가 죄인이기에 우리의 죄를 책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모두 죄인입니다.”

게다가, 억압받는 고통이 어떤 사람의 잘못도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권을 가졌다고 사람을 더 죄스럽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대가로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율법이 말하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 없는 것이 더 많은 율법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형벌과 율법의 지배에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과 부활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 그 핵심은 죄, 용서, 화해, 죄인들이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딜레마에 대한 답입니다.”

그때 그녀가 다시 끼어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하는 자들을 용서하라고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단지 불의를 더 많이 쌓아 갈 뿐입니다.”

“성경은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스도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는 신실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단 하나의 죄도 결코 범하시지 않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의를 모두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의롭고,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 나아온 죄인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은 복음 대신에 율법을 선포하거나 복음과 율법을 혼합하는 사람을 단호하게 책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압제하는 것을 책망하고, 악행하는 자들을 저주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킬 수 없고, 그들을 압제하는 사람들을 선한 사마리아 인으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녀는 금새 다시 끼어들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지만, 만일 불의와 싸우지 않는다면, 당신은 복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나는 압니다. 날 믿으세요. 나는 늘 불의한 단체와 투쟁합니다. 나는 심지어 이러 이러한 여러 소송들을 진행 중입니다.”

우리들의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불의의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신하는 자칭 복음주의 사회정의 옹호자로 헌신하는 사람의 실제적인 반응이었다. 그 간단한 대화는 진보적인 복음주의자가 사회정의가 “복음의 문제”라고 주장할 때마다 내 머리 속에서 경보음이 울리는 이유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블로거들이나 다른 여러 단체 대표들이 이러한 주장을 확신을 가지고 말하면서, 이것을 복음을 방어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복음과 사회 활동을 혼합하는 것은 여러 번 시도되어 왔었다.(구글에서 “Walter Rauschenbusch” 또는 ”social gospel”을 찾아보라) 그것들은 항상 소시니즘[1], 세속적인 인본주의, 또는 더 불길한 형태의 영적 불모지로 가는 지름길로 드러났다. 이러한 방법의 제안자들이 아무리 좋은 의도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사회적 메시지는 필연적으로 세상을 뒤덮게 되어 복음의 메시지를 대신하게 된다.

“사회정의(세속적인 세계에서 사용되거나 실제로 사전에 의해 정의되는 표현)”는 실제로 성경적 주제가 아니라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상적인 사상에서 빌린 어떤 것도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없다. 철학, 정치, 대중 문화 또는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이것들을 간단한 복음의 메시지와 혼합하는 것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 2)”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계획과 반대되는 것이다.

“사회 정의”에 대해 설교하는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골로새서 3:2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설교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죄인이 아닌 희생자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회개보다 분노를 조장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메시지이다. 그것은 용서보다는 비난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을 복음이 아닌 율법을 향하게 한다.

사회정의 행동주의가 복음 진리의 본질적 신조라고 주장하는 것은 할례를 복음의 문제라고 주장했던 초대교회 사람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신학적 율법주의의 한 형태다.

사회정의를 주요한 주제로 열심히 설교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매우 신중하게 고려하고, 율법과 복음의 중요한 차이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단순한 진리에 대한 확신을 회복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 말한다. 이 진리는 모든 진정한 복음 문제의 핵심이고 정수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 3-4)

무엇보다도, 이 간단한 메시지는 1세기에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메시지이다.

만약 현대의 복음주의 운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해진다면, 대중문화를 해석하려는 모든 어리석은 노력을 버리고, 잘못된 방법으로 “사회 문제와 관련성”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어나서 깊은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 간단한 메시지는 여전히 세상을 이길 능력이 있고, 인종 간의 분규와 심지어 포스트 모던 시대의 우리 문화가 처한 모든 다른 병폐들을 다 치유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1] 소시니즘: 16세기와 17세기 폴란드 소개혁 교회안(the Minor Reformed Church of Poland)에서 폴란드 형제들에게 영항을 주었던 파우스토소치니(Latin: Faustus Socinus)의 이름을 딴 기독교 교리체계이다. 그들은 반삼위일체론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절하였다.

필 존슨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제보 및 문의:

Print Friendly, PDF & Email

관련기사

Andrik-langfield on Unsplash
[GTK 칼럼] 성경이 말하는 결혼: 8. 부부의 대화(1)
299_6_1 Gospel(1068)
모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복음!
20240503_egypt
[최요나 칼럼] 꼼수 종교인을 주의하라!
bible-221031-unsplash
[TGC 칼럼] 복음은 보편적이다

최신기사

[GTK 칼럼] 성경이 말하는 결혼: 8. 부부의 대화(1)
어린이날에 생각하는 가정과 교회공동체의 역할
모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복음!
[최요나 칼럼] 꼼수 종교인을 주의하라!
미 대학의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 탈진실 시대의 산물… 분열의 시대 진리와 도덕은?
교권, 학습권 추락 원인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올바른 선택
[오늘의 한반도] 올해 1분기 입국한 탈북민 43명… 여성이 대부분 외 (5/4)
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