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르심의 의미는 더욱 명확해졌다. 필자의 경우, 선교사 헌신이 늦깎이였듯 새로운 사역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깨닫는 시간도 더딘가보다.
미련한 인생을 채근하지 않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은혜가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소망은 있다. 지금의 깨달음이 여기서 멈추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주님을 갈망하게 된다.
그동안 틈만 나면 약속의 말씀을 소가 여물을 되씹듯 되새겨왔다. 미디어 사역 출범 초기에 허락된 열왕기하 2장 19절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물 근원에 나아가 소금을 뿌리는 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잠언 4장 8절의 그를 높이라는 말씀을 사역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해야할까. 주님께 묻고 또 물었다.
반추(反芻)할 때마다 주님은 하얀 한지에 굵은 붓으로 글씨를 새기듯 은혜를 인 쳐 주셨다. 모두 다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공통분모가 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역사에 동역자로 부름 받은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열방이 주님께는 한 방울의 물과 같다고 했다. 주님이 그 열방을 회복시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여반장(如反掌)같은 일이다. 그런데 그 과업을 우리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이다.
물통에 물을 담아 오는 아빠를 돕겠다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손잡이를 잡고 함께 걸으면, 아빠는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더욱 힘이 들 수밖에 없다. 자아를 추구하며,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에게 그 중차대한 과업을 맡기셨다는 것이다. 그 주님의 마음이 신비롭기까지 할 뿐이다.
주님은 우리를 창세전 원형의 모습으로 바라보신다. ‘내가 너를 지었고 너는 내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깨어지고 부서지고,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었어도 주님은 우리를 흠과 티가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쏙 빼닮은 자로 보신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것으로 우리에 대한 심판을 마감하셨다.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겠단다.
우리의 언어, 우리의 사고, 우리의 행위 모두에 소금이 뿌려져야 한다. 터는 좋으나 물이 좋지 않은 그 계곡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엘리사가 물 근원에 소금을 뿌렸듯이 말이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바로 ‘컨텐츠의 회복’이다.
부패한 컨텐츠를 소독하고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우리의 지식을 날마다 십자가 복음의 소금이라는 다림줄 앞에 세워야 한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을 높이는 일이 우리의 몫이다.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 등 열방 곳곳에서 성도들의 비참한 죽음이 날마다, 어느 때보다 참혹하게 펼쳐져도, 그 일을 허락하신 분이 주님이심을 믿는다. 그 주님은 악한 자의 죽음을 기뻐하시지 않는 특이한 분이시다. 왜? 그 악한 자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단, 그들은 그 사실을 잊고 있을 뿐이다. 이 회복의 역사는 오직 성도들의 기도로 성취될 것이다.
오 주님! 어떻게 이 좁디좁은 우리의 심령에 그 마음이 부어질 수 있습니까? 우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찢어 넓히신다. 그 통로에 설 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 증인의 삶과 열방의 소식을 우리는 지난 4년간 이 복음기도신문을 통해 타전해왔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삶으로 정의(定義)하는 사람이다. 복음은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섬김이다. 이것이 회개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말하
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복음기도신문은 현장에서 복음과 기도를 결론으로 붙잡고 모든 분야, 모든 영역에 순종하며 주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그런 증인을 만났다.
그리고 열방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눈에 씌워진 비늘을 제할 수 있도록 다양한 관점과 주님의 지혜를 은혜의 통로가 된 글로 채웠다. 창간 4주년까지 신실하게 이끌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높이며…. [GNPNEWS]
발행인 김강호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