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다스리시고 축복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교회 안에 당신의 지도를 받는 지도자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Sing! Global 2021 Conference | Nashville
성경: 베드로전서 5:1-5
주제: 성경적 리더십
우리는 지금 리더십에 대해서만큼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냉소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단순히 우리 시대의 분위기 탓입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 그리고 아마도 지난 18개월 동안 그 분위기가 더 강해지고 더 선명해진 것은 분명합니다.
리더십의 남용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으며, 특히 실망스러운 그런 이야기는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나쁜 지도자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접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는 신뢰했던 지도자에게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고통과 혼란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로 인한 상처가 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미래의 실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냉소주의는 그런 면에서 아주 현명한 방패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이목을 끄는 리더십의 큰 실패는 우리가 가진 불만의 진정한 근원을 숨길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가 내 주인이 되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이 갈망을 리더십에 관한 우리 세대의 왜곡된 인식과 결합해 보십시오. 리더십이 지위와 성취와 특권의 상징이 될 때 (많은 사람들이 리더십을 그렇게 바라보는데)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축복하고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지도자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 결과 너무도 당연하게 나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이 나에 관한 권한을 가지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선물
그러한 혼란 속에서 기독교 신앙은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합니다. 리더십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 지도자의 인도를 받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그러니까 하나님이자 동시에 사람인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 예수님은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아버지 오른편에서 모든 권위를 행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다 인도함을 받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과 몸이 결코 자율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합당한 지도자의 지혜와 공급과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 주셔서 당신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을 맞이하기 전까지만 해도 근본적으로 반문화적이었던 진리, 실로 놀라운 진리인 만인제사장직은 오늘날 지역 교회에서 리더십의 본질과 선함을 조명하기 위해서라도 새롭게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진리 속에는 매우 중요한 은혜로운 불평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다스리시고 축복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교회 안에 당신의 지도를 받는 지도자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엡 4:11-12). “목사와 교사”에 대한 언급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에게 매우 개인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에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여러분의 특정 지역 교회의 목사들이 포함됩니다(목사들이 복수형이라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도들을 만난 적은 물론 없지만(그럼에도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목사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신실한 목사는 오늘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인도하고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목사들에게 결함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죄는? 유감스럽게도 똑같은 죄인입니다.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심각한 죄를 짓기도 하며, 양 떼를 버리고 떠나기도 하고, 보호해야 할 교인에게 도리어 처참한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슬프게도 그런 목사들이 일부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들의 이러한 실패를 가지고 예수님이 의도하신 진정한 기독교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지도자는 결코 예수님이 꿈꾸신 리더십 비전의 성취가 아닙니다. 그러한 실패는 하나님의 비전에 미치지 못하거나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사실상 그런 실패를 통해 우리는 교회 내에서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지도자, 특히 “지도자 직분” 또는 “교사 직분”을 “목사” 또는 “장로” 또는 “감독자”로 부르셨는데, 신약성경은 이 세 가지 용어를 동일한 직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은 회중과 지도자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그리스도께서 지역 교회의 리더십에 대해 어떤 비전을 제시했는지 살펴볼 때 이 글이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팀워크: 좋은 친구들이 있는 좋은 사람들
저는 목사들이 복수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목양 사역에 대해 연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 목양 사역은 팀워크라는 점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서와 같이, 신약성경에서 지역교회 목사와 장로가 언급되는 모든 문맥에서 그 명칭은 복수형입니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님으로 홀로 통치하십니다. 그는 머리이시며(엡 1:22; 5:23; 골 1:18), 홀로 대장이십니다. 단일 리더십의 영광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주님의 종인 목사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 팀으로 일하고 번성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바라는 목사는 좋은 친구가 있는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친구란 어떤 사람입니까? 힘들어도 친구에게 틀렸을 때 틀렸다고 말해 주고, 또한 친구가 가진 책임감의 불에 더 불을 붙이고, 사역의 삶을 더 힘들지만 더 가치 있게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독려하는 사람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목자들
베드로전서 5:1-5의 주요 동사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고 명령합니다. 동사 ‘목양하다/[양을] 치다’(shepherd)에는 아주 풍부한 이미지가 들어 있습니다. 목자들(shepherds)이 하는 모든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먹이를 줍니다. 물을 먹입니다. 돌봅니다. 무리를 모읍니다. 보호합니다. 이끕니다. 목초지로 인도합니다. 관리합니다. 기릅니다. [양을] 친다는 것은 목자의 선이 양의 선과 결부되는, “지배하는 것”과 반대되는, “선한 지휘”라고 부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
길을 준비함
목양이라는 개념은 단지 족장 시대, 이집트와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뿐 아니라, 가장 위대한 왕이 된 양치기 소년이자 장차 오실 위대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예표한 다윗 왕을 포함해서 아주 풍부한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결부된 양을 친다는 개념에는 메시아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물론, 다윗조차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실패를 겪기도 했지만, 다윗 이후로 왕들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5세기가 지나고 선지자 에스겔은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양을 먹이지 않고 “스스로를 먹이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난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란 양 떼를 먹이는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기는 하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았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 (에스겔 34:2-4)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백성을 먹였어야 했습니다. 백성을 강하게 하고, 치료하고, 결박하고, 다시 데려오고, 찾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포악으로”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백성은 자신들을 원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드러운 힘과 권함과 자비와 오래 참음과 은혜로 다스리는 그런 목자 또는 왕을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내가 내 양 떼를 구하겠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 위에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도록 하겠다. 그 목자는 내 종 다윗이다. 그가 친히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겔 34:22-23). 양을 치는 목자에게 먹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목해 보십시오.
선한 목자와 그의 도움
미가는 다윗의 성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가 5:2; 막 2:6)고 예언했습니다. 일생 동안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1). 주님은 양들에게서 뭔가를 빼앗는 게 아니라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 주는 선한 목자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복음 말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5, 16, 17). 여기서 “먹이다”(feeding)와 “목양하다”(pastoring)는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지만 곧 떠나실 것이며,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양을 베드로와 다른 여러 목자들, 곧 사도들뿐 아니라 지역 교회의 장로들, 감독들, 목사들을 통해 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사도행전 20:28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장로들은 또한 감독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아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해야” 합니다(장로=감독=목자).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에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두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이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계 7:17)이며, 다른 세 구절에서, “철장을 가지고” 다스릴 것입니다(계 2:27; 12:5; 19:15).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강압적이시거나 가혹하시다는 뜻이 아니라, 쇠막대기로 그들을 대적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양 떼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이처럼 목양(shepherding)의 이미지와, 먹이고 물을 주며(“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 시편 23:2), 보호한다는 행동에는 풍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목양이란 곧 양을 돌보고 온유와 친절과 설득과 오래 참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동시에 보호의 막대기를 들어 양 떼를 여러 가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복음기도신문]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지만 곧 떠나실 것이며,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양을 베드로와 다른 여러 목자들, 곧 사도들뿐 아니라 지역 교회의 장로들, 감독들, 목사들을 통해 치실 것입니다”
David Mathis | 데이비드 매티스는 desiringGod.org의 주필이며,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Cities Church의 목사이다. ‘은혜받는 습관’의 저자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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