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화의 위기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건국
“오직 내 백성이 하는 기도의 초자연적인 능력만이 케냐를 향해 엄습해오는 환난으로부터 케냐를 돌이킬 수 있다!”
케냐의 주변 국가들이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산화, 이슬람화 되어 갔지만, 케냐를 위한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기에 이 모든 혼란의 와중에서도 케냐는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준의 정치적, 종교적 자유와 질서를 유지하면서 발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일은 믿는 이들이 자기 나라의 정부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우리(데릭 프린스 목사와 사모) 부부는 동아프리카의 케냐에서 교육 선교사로 섬겼다. 나는 케냐 서부에 있는 교육대학 학장이었다. 그 당시 케냐는 마우마우(Mau Mau:폭력으로 백인 이주자를 추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케냐의 키쿠유족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 운동의 피비린내 나는 고통에서부터 힘겹게 벗어나는 중이었다. 마우마우 운동은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사이뿐 아니라 수많은 아프리카의 부족들 간에도 더 깊은 불신과 증오를 가중시켰다. 이와 동시에 케냐는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가 되기 위해 서둘러 준비하고 있었다. 케냐의 독립은 1963년에 마침내 성취됐다.
케냐 서쪽에 있는 벨기에령 콩고는 1960년에 독립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적절한 준비 없이 수립된 자치정부의 무능력과 복잡한 민족 구성으로 인하여 콩고는 곧 길고 긴 유혈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고, 소름끼치는 투쟁과 혼란 상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케냐의 미래는 정말 어두워 보였다. 케냐가 콩고의 불행한 과정을 답습하게 될 것이며, 마우마우단이 남긴 내부의 반목으로 인해 문제가 더 심각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1960년 8월. 나는 케냐 서부 지역에서 일주일 동안 열린 아프리카 청년 집회에서 사역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 집회에는 약 200명의 아프리카 청년이 참석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교사이거나 학생이었다. 그 집회의 마지막 날 저녁 예배 때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7)
예배 중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꼈으며,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에게 임했다는 확신이 내게 다가왔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을 향해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케냐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라!” 강단에 오른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도전을 말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인 여러분에게 나라와 정부를 위해 기도할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케냐는 지금 역사상 가장 중대한 시점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케냐의 미래를 위해 기도합시다.”
내가 기도를 인도할 때 참석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큰 소리로 부르짖는 기도를 드렸다. 내 곁에 서서 스와힐리어로 통역했던 윌슨 맘보레오는 기도하는 시간 내내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기도 소리가 멎자 윌슨은 기도 중에 자기가 본 환상을 전했다.
“저는 붉은 말 한 마리가 동쪽으로부터 케냐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우 사나운 그 말 위에는 새까만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말 뒤에는 또 다른 붉고 사나운 말 몇 마리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그 모든 말들이 방향을 돌려 북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윌슨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하나님께 내가 본 것의 의미를 말씀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직 내 백성이 하는 기도의 초자연적인 능력만이 케냐를 향해 엄습해오는 환난으로부터 케냐를 돌이킬 수 있다!’”
그 이후 여러 날 동안 나는 윌슨이 우리에게 한 말을 계속 묵상했다. 그러던 중 윌슨이 본 환상이 스가랴 1:7~11에 기록된 것과 어느 면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윌슨에게 스가랴의 그 구절에 대해 아는지 물어 보았더니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차츰 하나님께서 케냐를 위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고, 당신이 케냐를 위해 분명히 개입할 것임을 윌슨의 환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에 케냐 역사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이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케냐는 1963년 12월 12일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 조모 켄야타(Jomo Kenyatta)가 선출되었다.
1964년 1월. 케냐의 역사에서 윌슨이 본 환상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케냐의 동쪽 해안에 있는 잔지바르 섬에서 유혈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쿠바의 카스트로 아래에서 혁명 전술을 배운 우간다 출신의 한 아프리카인이 이끈 혁명이었다. 이 일로 인해 잔지바르의 무슬림 지도자가 쫓겨났다.
같은 달에 공산주의 혁명 운동이 케냐 남쪽의 탄자니아의 국방군을 장악했고, 그 영향은 또 케냐의 군대까지 퍼져 나갔다. 혁명의 목표는 케냐의 민주정부를 전복시키고 공산주의자가 조종하는 군부 독재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케냐 대통령 조모 케냐타는 지혜와 단호함으로 대처했다. 영국군의 지원을 요청하여, 케냐군 내부의 쿠데타 세력을 진압하고 국가 전체의 법과 질서를 재확립했다. 그리하여 정당하게 선출된 케냐 정부의 권위는 회복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의 군사적 정권 탈취 기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윌슨의 환상에서 케냐로부터 방향을 돌린 붉은 말들은 북쪽으로 향했다. 케냐에서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북쪽 방향에는 소말리아가 있다. 케냐에서 실패한 공산주의자들의 군사 쿠데타는 소말리아에서 성공했다. 어떤 사람은 나중에 소말리아를 “공산주의자 군사 캠프장” 이라고 묘사했다.
케냐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 역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남쪽에 있는 탄자니아는 공산주의자들의 강력한 영향으로 정치적 자유가 여러 가지로 제한되었다. 서쪽에 있는 우간다는 이슬람교도들이 나라를 장악하였고 부족 간 내전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혼란의 와중에서도 케냐는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준의 정치적, 종교적 자유와 질서를 유지하면서 발전하는데 성공했다.
기독교에 대한 케냐 정부의 태도는 계속해서 우호적이고 협력적이었다. 케냐타 대통령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모든 공립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기독교의 메시지를 가르칠 수 있도록 다양한 기독교 단체들을 초청했다. 케냐는 주변 국가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을 양성하는 전략적 중심지가 되었다.
1966년 10월의 어느 날, 나는 신문에서 케냐에 관한 기획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요지는 케냐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프리카 대륙의 50개 신생 국가 중 가장 안정되고 성공적인 나라 가운데 하나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기사의 각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 영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러했다.
“이러한 일은 믿는 이들이 자기 나라의 정부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데릭 프린스의 ‘역사를 움직이는 기도와 금식’중에서. 제공: 지저스 아미> [복음기도신문]
데릭 프린스 목사(1915-2003) | 영국인 부모 아래 인도에서 출생.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와 캠브리지대학(Cambridge University)에서 헬라어와 라틴어,고대 및 현대 철학을 공부. 캠브리지대학에서 고대 및 현대 철학교수직 역임. 20세기의 뛰어난 성경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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