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이아침 칼럼] 일상에서 딴 생각하기

▲ 사진: James on unsplash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3:1)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브리서 3:7~14)

일상에서 딴생각하기

삶의 자리에서 크리스천은 마음을 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인정을 받고 그것을 통해 불신자들이 예수님께 올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잘해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삶의 자리에서 여전히 딴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이고 그것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더이상 사랑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예배드리고 싶다고 말하지만, 주일 예배에 나온 사람 가운데 80% 이상은 딴생각을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삶에서 급한 문제와 중요 한 문제가 생기면 예배의 자리에서도 딴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돈 문제가 크면 돈 문제에 대해 생각합니다. 자녀로 인해 기뻐하든 염려하든 자녀만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크리스천은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딴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주인 되시는 주님이 주시는 생각과 뜻과 힘이 무엇인지 읽어내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3:1)

두 가지입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형제자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입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사명을 갖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대제사장이란 직분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가 되어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깃들게 하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불어넣어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시는 중보자라는 뜻입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거룩한 형제자매들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부름을 받았기에 공동체입니다. 반대로, 거룩하지 못하기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없겠다는 말도 됩니다. 마음에 가득한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왜 마음에 세상을 두고 살까요? 우리가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계실 때, 흘러나오는 말과 행동이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계실 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말을 원어적으로 보면 ‘못질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못질했기 때문에 떨어져 나가지 못하고 고정됩니다. 마음을 주님께 고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못이 빠지면 천사숭배 사상에 빠지기도 합니다(히브리서 1, 2장).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 신령한 것을 첨가시키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마음에서 떨어져 나가면, 부족한 예수를 반드시 경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으로 안 되니까, 돈이 있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삶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여건을 갖춰야 한다며 그것을 채우기 위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그릇이 되기 원한다면서 금 그릇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런 부담스러운 금 그릇 말고 편한 그릇이 되고 싶습니다. 마음에 주님이 남아 계실 때 나올 수 있는 진한 고백일 것입니다. 세상의 문제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전전긍긍함도 사라지고, 그저 주님이 쓰시는 편한 그릇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바쁜 시간 가운데 그런 마음이 들어서 울컥했습니다. “하나님, 저 다른 게 아니라, 주님께서 쓰시는 편한 그릇 되고 싶어요! 언제든지 주님께서 손 뻗으시면 닿을 수 있는 편한 그릇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받아놓고 사는 시한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살 것처럼 삽니다. 시한부 인생인데 왜 영원히 살 것처럼 그토록 세상에서 전력투구하며 삽니까?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천사 이야기를 하고 모세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3:7~8)

주님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면 삶에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래서 그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길이야, 진리야, 생명이야!” 하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은 오히려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보면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가 진리라고? 돈이 있어야지. 예수가 생명이야? 내가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그런 욕구가 있습니다. 감춰져 있어도 문제이지만, 드러나지 않아도 문제입니다.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히브리서 3:9)

마음이 완고해지면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시험을 하나님이 보고, 우리가 합격과 불합격을 판정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의 배경은 출애굽기 17장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이르렀는데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이 물을 달라고 모세에게 나와 불평하는데, 모세는 어찌하여 나와 다투며 너희들이 어찌 하나님을 시험하느냐고 말합니다.

무조건 믿는 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 믿음을 혼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하며 믿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바로의 군대를 몰살시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뜻을 직접 봤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물을 주지 않으십니다. 백성들은 매우 목이 말랐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어차피 주실 것, 목마르기 전에 주시면 더 좋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늦게 주십니까? 왜 마음이 완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시는 겁니까?’ 그럼 영광의 하나님이십니까, 쪼잔한 하나님이십니까? 정직하게 우리 마음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물을 줬으면 하는 우리 마음을 아셨지만 물을 늦게 주셨습니다.

기도할 때, ‘앞서서 행하시는 하나님!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랑받는 것 같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선명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야 예수 잘 믿는 것 같고, 이루어지는 그 간증을 통해 열방이 돌아오게 한다는 믿음의 패턴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대신 오히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면 무언가 첨가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갈증은 목이 타서 죽을 것 같은 극심한 갈증입니다. 수십만 명이 느끼는 그 갈증은 보통 갈증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목이 마르면 우리 존재는 그 목마름에 묶입니다. 우리를 묶은 목마름은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그것이 완고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일찍 물을 안 주셨을까요? 우리 자아의 문제를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끌고 가고 있고, 무엇이 우리를 묶고 있는가!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믿음의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우리 실존입니다. 사실은 부족한 돈 문제가 우리를 끌고 있는 것인데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완고한 사람입니다. 문제가 기도하게 하고, 문제가 열심을 부리게 하는 믿음의 빛깔이 이제 보여야 합니다. 갈증을 심하게 느낄 때마다 우리의 몸은 그것에 더욱 붙들립니다. 우리를 끌고 가는 그것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청년들의 취직 문제, 결혼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해결하려고 하고, 무엇에 힘을 쓰고,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드리라고 하셨을 때,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녀를 죽이라고 할까봐 겁나지 않으셨습니까? 믿음으로는 ‘아멘’ 하고 받아들이지만, 실제 마음으로도 대환영하십니까? 하나님 보실 때,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간 날강도는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을 잡으라는 말씀은 마음을 빼앗아간 그 강도를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마음에서 죽였습니다. 마음에서 죽였더니 이삭은 오히려 살았습니다. 저도 마음에 살이 된 제 딸을 마음에서 떼어내느라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을 마음에서 떼어내느라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강도였습니다. 목사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예전에는 새해가 되면 성도들의 기도제목을 모두 받았는데 요즘에는 받지 않습니다. 예전에 성도들 기도제목을 다 모으면 1000개가 넘습니다. 석 달 동안 읽고 기도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옵소서!” 하고 석 달 동안 기도하다가 제가 깨달았습니다. 제가 성도들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삯꾼 목사도 아니었지만 선한 목자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완고한 마음을 더 강화시키는 기도였습니다. 문제가 떠나가면 기쁨이요 희망이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본질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깊이 못 박아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기도가 그치고 난 뒤 제 건강이, 영혼이, 마음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성도들이 부부싸움을 하면 해결시켜 주는 것이 목사의 일이었습니다. 부부학교, 아버지학교, 중보기도교실, 자녀교실, 내적치유, 영적치유 등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말씀이 삶을 변화시킨다는 믿음이 없으니 얼마나 많은 보조장치가 필요했겠습니까. 지금은 부부싸움하고 오는 부부에게 “십자가로 가! 빨리 가! 그게 살 길이야” 하고 말합니다. 실제로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마음에 예수가 못 박히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힘을 써야 할 것은 십자가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염려도, 근심도,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것이 마음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아픈 마음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아직 증인이 안 됐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 직전에 “이스라엘 회복이 이 때니이까?”(행 1:6) 하고 물었습니다. 자신들은 선민이고, 메시아가 오시면 회복이 일어나니까 로마 압제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선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보고, 주님의 부활을 경험해도 그들의 관심은 땅에 있었습니다. 땅에 대한 마음을 걷어내지 않으면 결코 증인으로 서지 못합니다. 마음에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영이 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주하면! 증인으로 산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일상적으로 우리 마음에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브리서 3:12~13)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 앞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날마다! 서로 권면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인들을 명하고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 그 말씀이 생명처럼 되었기에 디모데는 다시 그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합니다. 말씀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그 과정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것에 너무 주목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 비진리가 들어올까봐 겁을 내고 분별하려고 하고 막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힘만 빠졌습니다. 그것이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냥 진리를 흘려보내면 됩니다. 비진리를 분별해 막아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흘려 보내는데 힘써야 합니다. 피차 권면 함으로! 서로 말씀을 흘려보내며 예수님이 주인되는 것을 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 부부 사이에 보이는 것이 있게 됩니다. 보이는 그것을 개선하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말씀을 그대로 흘려 보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필로그

십자가를 이야기하는데 결국 말하는 내용이 온통 이 땅이라면, 주님의 거룩을 이야기하는데 결국 문제를 말한다면, 그것이 복음이겠습니까? 예전에 하루에 세 시간, 다섯 시간씩 기도했습니다. 많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고 열심을 내는지 봐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못 박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의지로 됩니까? 안 되니까 십자가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다윗의 유명한 고백!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 할 때, 그 힘은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힘을 말합니다. 작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때도 주님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주님이 실제로 못 박혀 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힘이신 하나님의 손길을 실제로 봐야 “주께서 하셨습니다!” 하는 고백이 실제가 됩니다. 날마다 일상에서 딴생각!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주님과 친밀해지는 역사가 실제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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