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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칼럼] 세상 살아내기

사진: ⓒ pixabay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딤전 4:6-13)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세상 사는 것이 가능할까요? 세상에 의미를 두고 세상을 목적 삼고 이 세상을 살아도 어려움은 많습니다. 그러면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 이 땅에서 거뜬하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딤전 4:6)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앞으로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될 텐데 교인들에게 이것을 깨우치게 하고 가르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것을 교인들에게 깨닫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와 가정과 관계 가운데 반드시 거룩함을 깨닫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룩함은 곧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구별됐다는 거룩함을 깨닫게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 무엇이고, 거룩의 영광이 어떻게 깃드는지, 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 왜 거룩함이 힘이고 능력이고 생명인지 깨닫게 하라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거룩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룩은 흉내를 내거나 훈련을 통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됩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20)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됐습니다. 하나님 편이 됐고 하나님께 속한 인생이 됐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우리의 욕구는 세상에 있습니다. 교회 교역자들과 이 말씀을 나누며 다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이시고 사신 값입니다. 높은 값을 치르시고 사셨는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무엇으로 그것이 드러날까요? 가장 먼저, 우리를 사신 그분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교역자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공적인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고 나누기로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내 생각이 나오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가치를 주장하고, 내 경험상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게 되고, 내 형편이 허락하는 것만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셨다면, 그분의 말씀이 생명처럼 여겨진다면, 내 형편과 관계없이 말씀을 흘려보내는 인생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이 정돈됩니다. 말씀으로 거룩함이 일깨워집니다. 말씀으로 거룩해지고 싶다는 소망이 일어나, 그 소망이 우리 마음에 채워지면, 삶의 자리에서 거룩을 깨우치는 능력이 자라나게 됩니다.

또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입니다. 급한 것을 간구하고 아뢰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와! 하나님의 마음이 이것이었네!” 하는 소통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서 살기에 다른 것이 자꾸 마음에 채워집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채워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서, 하나님의 길 따라가고 싶습니다! 내 삶에서 그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딤전 4:11-12)

명하고 가르치라고 했고,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교회 순전이(공동체 리더)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마음을 받아서 디모데에게 이야기합니다. 디모데는 다시 그것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막힘 없이 흘러가야 합니다. 말씀이 순전하게 흘러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었다면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도 이 말씀이 순전하게 흘러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고 주님을 향한 마음이 있는데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염려와 불안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염려가 마음에 오면 그 염려가 더 준비하게 만듭니다. 염려가 계획하게 하고 더 안달나게 만듭니다. 믿음이 준비하게 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염려가 준비하면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과 관계가 흐트러지면 염려가 들어옵니다. 교회에 본질적이지 않고, 진리가 아닌 것들이 들어올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려워집니다. 교회에 비진리가 들어와도 하나님과 관계가 신실할 때는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가 흐트러질 때는 그 비진리를 분별하고 물리치느라 모든 에너지를 씁니다. ‘명하고 가르치라’는 말씀은 비진리가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몰아내는 데 힘쓰지 말고 진리를 그냥 흘려보내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데 방점을 찍으라는 말씀입니다. 거룩을 깨우쳐야 말씀을 순전하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보통 자녀들에게 ‘이것 하지 말고, 저것 해라!’ 말하면서 애를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그대로 흘려보내야 생명이 깃들고 능력이 깃들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값으로 사셨습니다. 교회 각 공동체에서 연약한 모습을 보고 부족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채우고 막으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는 데 힘을 더 쓰자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늘에 뿌리를 내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이니까 성실하게 열심히 사역하면 주님께서 예뻐하실 줄 알았습니다. 목사니까 몸도 좀 상해야 하는 줄 알았고, 아내와 딸을 돌보는 것보다 성도들을 더 돌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한 계획을 세우고 성과가 나오면 주님께서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할수록 몸은 더 안 좋아지는 악순환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이 저를 모른다고 하시니 충격이었습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로 관계가 회복되면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힘써야 할 곳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한 것을 계획하고 성과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란다! 정말 힘써야 할 곳은 십자가란다! 달려가야 할 곳은 십자가란다! 그곳에서 나와 함께 연합하는 것이란다!”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정말 주님께서 하시는구나! 주님께서 역사하시는구나! 실제로 주님이 산성이시구나! 실제로 주님이 반석이시고 요새이시고 길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달려갈 곳은 십자가입니다. 우리 마음에 담겨 있는 다른 것이 많기에 십자가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 근심과 욕구가 참 많습니다. 십자가로 달려가 주님과 연합해 죽을 때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제가 갖고 있던 또 다른 믿음 하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를 통해서는 성도들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믿었으니 교회에서 프로그램을 많이 했습니다. 치유 프로그램, 훈련 프로그램, 제자화 프로그램. 설교로는 사람들이 안 바뀐다고 생각했으니 보조적으로 프로그램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고 난 뒤로는 프로그램이 없어졌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성경공부도 없고 훈련, 치유 프로그램도 없습니다. 1년에 한 번 하는 ‘교회 세미나’(교회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하루 종일 말씀을 듣고 나누는 프로그램)가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없어진 까닭은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설교를 통해 사람이 바뀐다는 것을 압니다. 실제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설교 자체가 시원찮아도 말씀은 역사합니다. 부부가, 자녀가, 가정이 바뀌는 것을 실제로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사역하시는 분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보통 부담을 느낍니다. 자신이 왜소하고 연소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깨고 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무엇을 사용할까요? 우리는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서 보통 세상의 가치를 들고 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세상의 조건을 통해 우리의 가치를 증 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조건과 가치를 통해 나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순전이(교회 공동체 리더)가 말씀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자리라면, 세상의 가치와 조건 때문에 기죽으면 안 됩니다. 세상의 조건이 부족해서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게 흘러감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심을 보는 거룩한 인생을 꿈꿔야 합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딤전 4:7-9)

경건과 거룩, 자기의 십자가! 예전에는 이런 말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말이 좋습니다. 그 안에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경건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훈련할 수 있을까요? 경건 훈련이 익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은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하는 말과 드러나는 행동입니다. 자기 수양 끝에 나타나는 모습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의 경건이 훈련될 때만 세상의 가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께서 하심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보면, 경건한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경건이 훈련되면 반드시 말이 달라지고 행동 양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됩니다. 부담스러운 말씀이 아닙니다. 경건 훈련을 통해 ‘되어진’ 내가 있습니다. 바뀐 언어, 바뀐 행동이 있습니다. 믿음을 체득한 내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 3:17)

믿음은 마음에 예수님이 계신 것입니다. 경건을 훈련할 때 마음에 예수님이 채워집니다. 우리는 이 경건 훈련을 세상에서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기에 세상에 의미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경건 훈련을 하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둡니다. 세상에서는 삶의 의미를 ‘성공, 가정의 행복, 자녀들이 잘 되는 것’에 둡니다. 경건을 훈련하는 사람은 ‘거기에 삶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니야, 내 마음에는 주님만 계셔야 해!’ 하고 말합니다. 모든 삶의 자리에서 그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볼 때, 부부가 서로를 볼 때, 우리 삶의 모든 터전이 경건을 훈련하는 장소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은 이것입니다. “디모데야, 너의 조건이 부족한 것으로 염려하지 말고, 부족한 것을 세상의 조건으로 채워서 너를 증명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말씀이 흘러가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거라”

토브원형학교 면접 때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또래에게 삶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토브원형학교에 오면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유익이 있을까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냥 외워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싶어요’ 하고 대답하면 불합격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말하면, 그것을 왜 하고 싶은지 다시 묻습니다. 외워서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투박해도 실제 삶에서 끄집어내야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입니다. “거룩을 기준 삼으려고 왔구나, 그런데 삶이란다! 삶은 만만치 않단다! 친구들을 통해서도, 선생님을 통해서도 어려움은 온단다. 그때 억울할 수도 있단다. 항변할 수도 있고 항변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단다. 그때는 어떻게 할 거니? 그냥 참을 거니?” 또 존재론적인 죄인에 관한 질문도 합니다. “주님과 관계 속에서 기쁨이 실제로 날마다 지속될까? 우리 의지는 왜 그렇게 오래 가지를 못할까?” 어려도 경건의 훈련 과정에 있다면, 투박해도 진짜를 말합니다. 경건 훈련은 마음에 하나님이 계셔야 시작할 수 있는데 아이들에게 그것이 보여서 놀라고 감사했습니다.

경건의 훈련이 익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통 세상 속에서 세상을 준비하다가 인생이 끝납니다. 세상에서 홀로 안전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하는 자녀가 잘 되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십니까? 자녀를 사랑하고 사랑할수록 이기적이 된다는 것도 아십니까? 아내와 남편을 깊이 사랑할수록 가장 이기적인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주님을 사랑할 때 자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가정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사도 바울이 로마 법정에 서서 아그립바 왕에게 직접 심문당합니다. 결박되어 자유가 박탈된 상태입니다. 미결수지만 판결에 따라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때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내가 결박된 것 외에는 당신도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행 26:29).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왕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씨가 먹히는 이야기입니까? 씨가 먹히지 않으니 우리는 아예 하지도 않습니다. 그 논리를 내팽개친 것입니다. 경건 훈련이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경건의 훈련이란 우리 마음에 왕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은, 아그립바 왕의 마음에도 예수님이 온전히 왕 되시기를 바란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럼 추구하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취한 사람, 마음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상대가 누구든, 상대가 권력자든 교육자든 사업가든 당당하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당신이 취하려고 하는 것, 너무 취하지 마십시오!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경건의 훈련이 실제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돈 없는 사람은 돈이 없기 때문에 돈을 더 욕망할 수 있습니다.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의 문제입니다. 그 예수님이 계실 때만,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 원합니다 하고 말하는 신앙이 하늘에 깊이 뿌리내리게 됩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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