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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강을 보며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라

ⓒ unsplsah

“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 복음에 적대적인 땅에서도 번성하는 삶의 양식을 축적해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

사막같은 날씨에 강 근처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면, 시원한 물과 초록빛 강둑이 주는 신선함을 느낀 적이 있다면, 시편 126편 4절은 당신에게 그 어떤 구절보다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흐르는 물만 있다면, 아무리 말라 비틀어진 땅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유타에 있는 자이언 캐니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버진(Virgin)강이 사막과 다름 없는 마른 협곡 사이를 지나며 그곳을 푸른 빛과 야생의 생명으로 채운다. 미국 땅에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다 마찬가지고, 또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강이 다르지 않다. 강은 그 어디에서 흐르던지 생명에 영양을 공급한다. 강은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생명을 새롭게 만든다. 그래서 매년 여름이면 언제나 사람들은 강가에 모인다. 수영과 낚시같은 놀이를 위해서든 또는 강가에 앉아서 삶이 주는 위대한 경이감을 맛보는 명상을 위해서든, 강은 전 세계 모든 인류로부터 사랑받는다. 

그렇기에 성경에 강과 관련한 이미지 상징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성경 중에서도 가장 위로가 되는 시편 46편을 쓴 글쓴이는 그 누구보다도 이 강의 이미지를 잘 사용했다(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사도 요한은 또 이렇게 말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계 22:1). 성경 저자가 “강”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임재라는 메시지를 표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지구에 사는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으로부터 배우는 세 가지 교훈

감각이 둔하지 않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시 19, 롬 1 참조),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서도 특히 왜 강이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에게 설명하는 도구로 자주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성경 저자들은 자연의 이미지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도구로 자주 사용했는데, 자연이야말로 하나님의 작품일 뿐 아니라 그 안에는 그분의 특징(signature)이 자연스럽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자세히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피카소의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에서 몇 시간에 걸쳐 집중해서 그의 작품을 보다 보면 그 유명한 추상화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종종 스크린이나 디지털로부터 벗어나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건강에만 좋은 게 아니라 영적으로도 유익한 이유다.

하나님이 창조한 강 주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우리는 신학적인 교훈을 더 잘 얻을 수 있다. 여기 세 가지를 소개한다.

1. 강에 가까이 있을수록 더 번성한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이 내용은 4절에서 말하는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와 완전히 대비된다. 이런 이미지는 사막에서 강가에 다가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메마른 나무에서 갑자기 가지와 잎사귀가 자라면서 무성해지더니 참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강가에 있는 나무는 지속적으로 물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고 결코 마를 일이 없어서 잘 자란다. 그렇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런던과 파리 그리고 카이로와 로마같은 도시가 다 강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강은 비옥한 농지, 살아 움직이는 자연환경 그리고 무역의 통로까지 제공한다. 강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다. 그것은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생존 여부는 생명의 강이 되시는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유일한 “생수”(요 4:7–15)의 근원이기에 우리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유지시킨다. 

2. 강의 힘은 우리를 만들어간다

강이 평화롭다고 해서 거기가 항상 안전하다고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목양적인 평안을 주는 자이언의 버진강은 종종 치명적으로 바뀔 때가 있는데, 그것은 폭풍우가 엄청난 물길을 쏟아내릴 때다. 강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졸졸 흐르던 시냇물도 물살을 거슬러 헤엄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강하게 흐를 수도 있다. 그랜드캐니언을 보면 협곡을 따라 꾸불꾸불한 길을 만들어낸 강의 힘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우리를 평화롭게 하는 능력을 가진 만큼이나 강은 우리에게 엄청난 두려움이 무엇인지도 알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방식이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사자와 마녀와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에서 (아슬란으로 등장하는) 주님이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은 하나님이라고 썼다. 기독교인은 너무도 자주 하나님을 길들이려고 한다. 단지 토마스 킨케이드(Thomas Kinkade)의 그림에나 등장하는 평화롭게 흐르는 강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 우리의 개인적인 낙원을 장식하기는 하지만 결코 위험한 방식으로 우리를 만들어가거나 방해하지는 않는 평화로운 물줄기 정도로만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세고 거칠게 흐르는 강이다. 그렇기에 그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강둑에 안전하게 서 있으려는 생각 대신 그 흐르는 물살에 몸을 던져야 한다. 그가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가 주시는 신선한 물을 마시도록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흐르는 물살과도 같은 강한 능력이 우리를 움직이고 다듬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 돌”(벧전 2:5)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

3. 우리는 강 같은 통로가 될 수 있다

하나의 물줄기가 여러 지류로 나뉘어 흐르면서 각각 주변 토양을 풍부하게 하는 물과 침전물을 공급하는 지점인 삼각주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다. 통로(channel)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도구(vessel)가 되어 강이 가진 축복을 배분하는 데 쓰임 받는다는 의미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 복음에 적대적인 땅에서도 번성하는 삶의 양식을 축적해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른 땅에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해서 야곱의 후손을 통해 이 땅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사 44:3–4).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말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주변에 사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가? 동네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이웃들이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독성이 있는 하수구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고 있는가? 기독교의 존재가 새로움과 생명을 주고 성경 말씀을 축적하여 삼각주를 만들게 하는가? 행여나 우리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것이 오염되었거나 유독성 있는 물은 아닌가? 

이 타락한 세상은 바짝 말라서 이제 불모지가 되었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희망이 사라진 사막이 되었다. 이 세상은 실로 갈급하게 생수를 원하고 있다. 기독교인인 우리가 예수님 만이 공급하실 수 있는 생수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생수가 우리의 삶에 확실한 증거를 남길 때,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시원함을 주는 작은 시냇물은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삶과 공동체는 회색빛으로 둘러싸인 세상 안에서 푸르른 녹지가 되어야 한다. 비옥한 삼각주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생태계가 되어서 생명을 주는 이 강가로 지치고 힘든 이들을  초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다른 이들을 강가로 이끄는 초대장이 되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부르던, 종종 강가에서 가졌던 수련회에서 부르던 이 노래를 다시 기억하자. “강 같은 삶이 내 안에서 흘러 넘치네…. 더 넘쳐라, 오 좋다(철썩 철썩)/ 내 영혼 안에서/ 넘쳐라, 넘쳐라, 오 좋다(철썩 철썩)/ 나를 온전케 하소서/ 넘쳐라, 오 좋다(철썩 철썩)/ 내게 주소서/ 풍성한 삶을 주소서!” [복음기도신문]

“ 기독교인의 삶과 공동체는 회색빛으로 둘러싸인 세상 안에서 푸르른 녹지가 되어야 한다. 비옥한 삼각주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생태계가 되어서 생명을 주는 이 강가로 지치고 힘든 이들을 초대할 수 있어야 한다 ”

브랫 맥크레켄 Brett McCracken | 미국 TGC의 편집장. Southlands Church의 장로.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 저술.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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