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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칼빈주의는 튤립이 아니라 세계관이다

▲ 19세기 종교개혁자들. 사진 : TGC 제공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 소천 1주기를 맞아, 연재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J.I. 패커의 에세이(2)’<편집자>

 칼빈주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과 사건의 다양성을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과 교회를 위해 미리 정하신 위대한 계획의 성취로 보는 통일된 역사 철학이다 

우선, 칼빈주의는 ‘5대 강령’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온 세상의 창조주이며 왕으로 믿는 명확한 시각에서 비롯된 세계관(whole worldview)이다. 칼빈주의는 창조주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모든 일을 그분의 뜻대로 행하려는 한결같은 노력의 결과물이다. 또한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지시와 통제 아래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으로 삶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칼빈주의는 성경에 입각한 성경의 신학이다. 즉 창조주를 자연과 은혜 안에서 모든 만물들의 근원이자, 수단과 목적으로 바라보는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이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유신론(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자 종교(만물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의존)이며, 또한 복음주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고, 이 모든 것에서 가장 순수하고 고도로 발전된 형태이다. 그리고 칼빈주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과 사건의 다양성을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과 교회를 위해 미리 정하신 위대한 계획의 성취로 보는 통일된 역사 철학이다. ‘5대 강령’은 사실상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주장하는 것 이상도 아니지만, 칼빈주의는 구원의 영역을 넘어서서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주권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훨씬 더 광범위한 주장이다.

다음 두 번째로 살펴볼 점은 칼빈주의 자체는 본질적으로 설명적일 뿐 아니라 또한 목가적이며 건설적인 반면, ‘5대 강령’은 칼빈주의적 구원론을 부정적이고 논쟁적인 형태로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칼빈주의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언급 없이도 얼마든지 성경의 관점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정의할 수 있으며, 그 주장을 지속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또는 가상의 세상에서 굳이 알미니안과 계속해서 싸울 필요가 없다. 칼빈주의는 부정적인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칼빈주의자가 싸운다면, 그건 오로지 긍정적인 복음주의적 가치를 위해서이다. ‘5대 강령’이 던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주로 세 번째(제한 속죄 또는 특정 구속)와 관련한 것인데, 이는 종종 형용사를 강조함으로 마치 칼빈주의자가 하나님의 자비를 특정 사람들에게 제한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의 목적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살펴보겠지만, 사실상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구속주’라는 복음의 핵심 진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건적 선택과 저항할 수 있는 은혜라는 교리를 거부하는 이유도 구원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시라는 긍정적인 진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진짜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건 알미니안주의이다. 알미니안주의는 선택과 구속을 부인하고 또한 부르심이 하나님의 구원 행위라는 사실도 부인한다. 칼빈주의는 믿음을 강화하고 교회를 세우는 긍정적인 목적을 위해서, 또한 복음의 긍정적인 내용을 주장하기 위해서 알미니안주의의 부정을 부인할 뿐이다.

세 번째로, 칼빈주의적 구원론을 5대 강령이라는 형태로 만든 행위(굳이 다섯 개가 된 이유는 도르트 총회가 답해야 할 알미니안의 선언이 다섯 개였기 때문이다)는 구원에 관해 칼빈주의가 가지는 유기적 성격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비록 이 강령이 다섯 개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도르트 신조’가 의미하는 측면에서 볼 때, 다섯 개 모두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들은 서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

칼빈주의 관점의 구원론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단 한 가지,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삼위일체 여호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택하신 백성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주권적인 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함께 일하시는 세 인격이시다. 성부께서 택하시고, 구속하심으로 성자가 성부의 뜻을 이루시며, 새롭게 하심으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목적을 이루신다.

구원하심 – 죄 안에서 죽은 이를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며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행하신다. 구속을 계획하고 성취하며 전달하며 부르고 지키며 의롭게 하고 또한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한다.

죄인 – 하나님 앞에 인간은 죄를 지었고, 비열하고, 무력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거나 스스로의 영적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이런 고백이 가진 능력은 삼위일체 사역의 통일성을 깨뜨리거나, 구원의 성취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누어 결정적인 부분을 사람의 것으로 삼거나, 인간 타락의 정도를 살짝 약화시킴으로 죄인이 자신의 구원에 대한 찬미를 구주와 함께 나누도록 하려는 모든 시도를 막는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 구원론의 한 가지 요점인데, 이는 다름 아니라 ‘5대 강령’이 확증하려는 내용인 동시에 알미니안주의가 어떻게 하든지 부인하려는 사실이기도 하다. 결국 핵심은 이것이다. 죄인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과거에도 또 현재와 미래에도, 온전하고 완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오로지 그분께만 영광이 영원하길! 아멘.

이 사실은 우리를 네 번째 사실로 이끈다. 즉, 5대 강령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구원론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깊이를 모호하게 한다. 바로 이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강령에서 강조점은 형용사에 가해지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세 가지 위대한 구원 행위와 관련한 논쟁이 형용사에 관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즉, 두 진영 다 명사에 해당하는 선택, 구속 그리고 내적 은혜라는 선물에는 동의하지만 단지 이 명사들과 관련한 인간의 위치에 관해서만 다르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믿음과 관련한 선택이 조건적인지 아닌지의 여부, 두 번째로 구속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의도하는지 아닌지의 여부, 그리고 세 번째로 내적 은혜가 거부할 수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각 경우에 있어서 형용사의 변경은 명사의 의미 자체를 바꾼다. 조건부 선택, 보편적 구속, 저항할 수 있는 내적 은혜는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선택, 구속, 내적 은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적절한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양측은 논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우리도 그 점을 똑바로 보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사이의 논쟁을 어떤 목적으로든지 제대로 논의할 수 없다. 각각이 내린 정의를 나란히 살펴보는 것은 가치가 있다.

1. 알미니안파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 행위는 정당하게 자격을 갖춘 부류의 사람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아들 자격과 그에 따른 영광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해결책(resolve)으로 정의된다.

이것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건,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믿게 될 우발적인 사건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겪을 사람들은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선택의 교리를 이해하는 경우, 최악의 경우에는 단 한 사람도 믿는 자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믿도록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칼빈주의자가 정의하는 선택은 죄에서 구원받고 영광에 이르는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속받고 성령의 확실한 부르심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자격 없는 특정한 사람들이 하는 결정(choice)이다. 알미니안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선택받은 것은 내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믿음은 내가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이라는 명사(단어)의 개념이 완전히 다르게 쓰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알미니안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믿는다는 조건 하에 죄인들을 기꺼이 용서하려는 하나님이 그 과정에서 만나는 장애물(정의_justice에 관해서 충족되지 않은 주장)의 제거로 정의된다.

알미니안주의에 따르면 하나님은 구속을 제안할 수 있는 권리는 갖고 있지만, 문제는 그 자체로만 볼 때 하나님의 제안을 인간이 받아들일 지 여부에 대한 보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믿음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획득하는 것이지 결코 갈보리에서 오는 선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하는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그것으로 전부였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구속을 특정한 죄인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견딘 실제적인 대속의 인내라고 정의한다. 그 결과 이제 하나님은 죄인들과 화목하게 되셨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인간의 죄는 영원히 사라졌으며, 그들에게는 영생이 선물로 주어졌다. 더불어 그들에게는 이제 하나님 보시기에 기업을 받아 누리게 될 유일한 수단인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을 권리가 생겼다.

다시 말해서, 갈보리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자들의 구원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믿음에 이르게 하고, 그 결과 그들의 구원이 현실이 되도록 한다. 십자가는 구원을 이룬다. 알미니안은 이렇게 말할 뿐이다. “갈보리가 없었다면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칼빈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나를 위해 구원을 이루셨다.” 전자가 십자가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간주하지 않는 반면, 후자는 십자가를 구원의 실제적인 원인으로 보고, 믿음을 포함한 모든 영적 축복의 근원을 오로지 갈보리에서 이뤄진 하나님과 그의 아들 사이의 위대한 사역의 결과로 판단한다. 양측은 분명히 구속에 대한 개념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3. 알미니안파에 의하면 성령이 주시는 내적 은혜의 선물은 ‘도덕적 설득’으로, 즉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해로 정의된다.

​이 사실은 그들이 인정하는 대로, 사실상 그 자체로만 볼 때 그 누구도 믿음의 응답을 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이 은사를 단순히 계몽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으로 정의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그들의 뜻을 새롭게 한다.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선한 것으로 결정하시며,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끈다. 그러나 그들이 값없이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원함을 입었기 때문이다.” 은혜는 저항하려는 성향 자체를 파괴하기에, 거부할 수 없음이 증명된다. 알미니안은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결정했다”, “나는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회심에 대해 보다 신학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싶어할 것이다. 누구의 공로인지에 대해서 좀 더 단순하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갇혀있던 나의 영혼, 오랫동안 누워 있었네
죄악과 어둠에 억눌린 영혼
당신의 눈은 나를 살리는 광선을 쏘았네
나는 깨어났고, 지하감옥은 빛으로 타올랐고
쇠사슬이 풀려진 후 자유로와진 나의 마음
나는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당신을 따라갔네

분명히, 내적 은혜에 대한 이 두 개념은 서로 첨예하게 대척점에 있다.

이제 칼빈주의자들은 선택, 구속, 부르심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위로 보지 않는 알미니안 사상이 성경적 의미의 핵심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한다. 그건 다른 말로 해서, 알미니안적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이 선택하는 건 오로지 믿는 자들이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건 모든 사람을 위해서이고, 성령이 소생시키는 대상은 오로지 말씀을 받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이건 사실상 성경적 의미에서 하나님은 아무도 택하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는 그 누구를 위해서 죽은 것도 아니며, 성령 또한 그 누구도 소생시키지 못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쟁에서 문제가 되는 건, 이러한 성경적 용어들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은혜의 언약, 동사 ‘구원하다’와 같이 구원론적으로도 중요한 일부 다른 용어들을 그 동의어까지 포함해서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는 점이다. 알미니안주의자는 구원이 하나님의 어떤 선포나 행위에 직접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독자적 활동에 달려있다는 관점에서 이 모든 용어들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그런 원칙 자체가 비성경적이며 비종교적이고, 무엇보다 용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의미를 명백하게 왜곡할 뿐 아니라 성경이 적용되는 모든 지점에서 복음을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알미니안 논쟁의 주제이다.

다섯 번째 ‘5대 강령’의 부족한 점이 있다. 강령의 형태(알미니안 주장에 대한 일련의 부정) 자체가 칼빈주의가 알미니안주의의 수정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알미니안주의는 자연적 순서로 볼 때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거기서 발전된 칼빈주의는 그 파생물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것이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입관이 이 두 가지 견해의 상관성에 대한 바른 설명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왜냐하면 알미니안주의(지금 드러나는 바와 같이 우리 시대의 새 복음과 매우 밀접하게 일치하는 생각)는 성경을 ‘자연스럽고’ 편향되지 않고 또한 단순한 방식으로 읽은 결과이며, 칼빈주의는 그에 반해 자연스럽지 못한 해석, 텍스트 자체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텍스트를 왜곡해 뽑아낸 불경한 논리의 산물, 텍스트가 전혀 제공하지 않는 논리의 틀을 사용해서 텍스트를 강제함으로써 본문이 가진 평범한 의미를 왜곡하고 균형을 뒤엎었다는 것이다.

개개인으로 따지자면 이런 비난에 어울리는 칼빈주의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만, 칼빈주의자 전체에 대한 평가로 볼 때 이것처럼 심각하게 왜곡된 평가도 없을 정도이다. 확실히, 알미니안주의의 해석은 구원에 있어서 조차도 주도권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 내 운명과 영혼의 주인은 오로지 나 자신이라는 망상을 도무지 포기할 수 없는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기에 성경의 가르침을 타락한 인간이 심각하게 왜곡한다는 점에서 매우 ‘자연적’이다. 이런 식의 변태적 왜곡은 교부 시대의 펠라기우스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를 통해서 또한 후기 스콜라주의에서 이미 나타났으며, 17세기 이후 로마 신학과 개신교 사이에서 다양한 유형의 합리주의적 자유주의와 현대 복음주의 가르침에 이르러서까지도 끊이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런 왜곡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그대로 있는 한, 알미니안적 사고 방식은 인간에게 극히 자연스럽다는 허울을 쓴 왜곡된 형태로 계속에서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볼 때 이 사고 방식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사실상 칼빈주의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의미로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칼빈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바 그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구원하신다. 구원하시려고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은 분명히 구원하시며, 공로가 아닌 은혜로만 구원하시기에 그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자이며, 그 구원은 오로지 십자가에서부터 흘러나온다. 그렇기에 구속 사역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서 끝난다. 이처럼 다른 곳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에게만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게 바로 칼빈주의이다. 칼빈주의자는 그렇기에 이렇게 노래한다.

저 멀리 푸른 언덕, 성벽 없는 곳
바로 거기서 주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셨네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분
우리가 용서받도록 그가 죽었다
우리를 선하게 만들기 위해 그가 죽었다.
우리가 마침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우리는 그의 보혈로 구원받았다

이렇게 찬양할 때 칼빈주의자는 진심이다. 이 찬양을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아들의 죽음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단지 실질적인 효력이 없는 희망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그의 구원 계획이 오로지 믿겠다는 인간의 결심 여부에 달려있기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까지 몰고도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칼빈주의자는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무력함이 아닌,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가상의 신자들을 위해 가상의 구원의 길을 연 게 아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믿을 지도 모르는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위해 확실한 구원의 길을 열었다. 그분의 보혈은 실제로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 예수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침으로 이뤄낸 결과는 애초에 예정한 계획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바로 구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 위에 추가로 믿음이 더해지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다.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믿음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신 모든 사람의 완전한 구원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복음기도신문]

 하나님은 구원하신다. 구원하시려고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은 분명히 구원하시며, 공로가 아닌 은혜로만 구원하시기에 그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자이며, 그 구원은 오로지 십자가에서부터 흘러나온다 

제임스 패커 J. I. Packer |리젠트 대학(Regent College)의 신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스테디셀러 ‘하나님을 아는 지식’ 등 수많은 책을 저술. 2020년 7월 17일 소천.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J.I. 패커 에세이(1) -구원교리와 칼빈주의를 향한 편견 제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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