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 소천 1주기를 맞아 연재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J.I. 패커의 에세이'(1) <편집자>
“ 새로운 복음이 특별하게 실패하는 분야는 깊은 경외심, 깊은 회개, 깊은 겸손, 예배의 정신, 교회에 대한 관심이다 ”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만나는 죽음의 죽음’(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은 만민 구원 교리가 얼마나 비성경적이며 복음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논쟁적인 작품이다. 이런 주제에 관심 없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교리적 정확성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또는 고작해야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분열이나 드러내는 이런 주제의 신학적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주제 자체를 논하는 것 조차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웬(John Owen)이 다루는 주제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의 책을 읽는 것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다. 열정이 지나쳐서 편견이 되거나, 신학적 당파성(shibboleths)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출간되는 그의 책(역자 주: 존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만나는 죽음의 죽음’을 의미함)이 독자들 안에서 새로운 영을 깨우길 바란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 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급증하는 양상을 목격하고 있다. 여기에 맞춰서 우리는 전통을 시험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믿음을 통해 생각하는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오웬의 글이다. 그를 통해서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긴급한 과제 중 하나인 복음을 회복하는 일에 큰 도움을 받기를 소망한다.
조금 전 마지막 문장에 다소 눈살을 찌푸리는 이가 있을 수 있지만, 오늘날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그리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복음주의가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전도의 실천, 성결의 가르침, 건실한 교회 생활, 영혼을 다루는 목회자의 방식과 권징의 실천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지금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지에 대해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그래서 불확실성이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은 여러 증거가 드러나 있는 분명한 현실이다. 이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일이며, 많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근원을 파헤쳐보면, 이러한 혼란이 초래된 궁극적인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바른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는 복음을 다른 제품(product)으로 대체해 버렸다. 그 다른 제품은 세부 사항 하나하나만 보면 복음과 유사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전혀 다른 복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그 대체 제품이 과거의 참된 복음이 그토록 능력 있게 증거하던 복음의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새로운 복음이 특별하게 실패하는 분야는 깊은 경외심, 깊은 회개, 깊은 겸손, 예배의 정신, 교회에 대한 관심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나는 새로운 복음 그 자체가 가진 특징과 내용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새 복음은, 인간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지향하게 하는 것을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이 새 복음의 핵심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 복음과 옛 복음(old gospel)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은 이것이다. 새 복음은 오로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화평과 위안, 행복,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에만 집중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이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옛 복음은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 아니, 사실상 진짜로 제대로 된 도움을 준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문제였고, 첫 번째 관심은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다. 옛 복음은 따라서 항상 그리고 본질적으로 자비와 심판에 관한 하나님이 가진 신적 주권의 선언이었고, 자연과 은혜, 즉 선한 모든 영역에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전능하신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라는 명령이었다. 옛 복음이 가리키는 곳은 언제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새 복음에서 그 중심이 사람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옛 복음이 방식이, 새 복음이 지향하지 않는 방식으로 종교적이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옛 복음의 주된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지만, 새 복음의 관심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데에 국한된 것 같다. 옛 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이고 또한 인간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이에 반해 새 복음의 주제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도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복음 전파의 전체적인 관점과 강조점이 아예 뒤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주된 관심의 변화로부터 그 내용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왜냐하면 새 복음은 사실상 “유용함”(helpfulness)이라는 새로운 관심 영역을 통해 성경 메시지를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태생적인 믿음의 무능력함이나,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이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가 아니라 그의 양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등의 주제는 설교하지 않는다. 이런 교리들은 “유용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그들 자신의 힘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교리는 도리어 죄인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을 뿐이다(그런 절망이 유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이 교리는 인간의 자존심에 너무나 큰 타격을 주기 때문에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고 간주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러한 생략의 결과는 성경적 복음의 일부가 마치 복음 전체인 양 전해진다. 그리고 완전한 진실인 것처럼 흉내를 내는, 그러다가 반쪽 진리는 결과적으로 완전한 비진리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됨으로 이제 사람들에게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진 구원의 능력도 우리가 믿어야 비로소 효과를 발휘하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사랑도 스스로 돌이켜서 믿고 의지하겠다는 사람이 있을 때에나 가치를 드러내는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주권적이며 강권적으로 죄인들을 자신에게로 부르는 분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문 앞에서” 조용히 또 무력하게 서서 기다리며 오로지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존재로 묘사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런 복음이 우리가 진짜로 믿는 복음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뒤틀린 반쪽 진리의 총합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설교할 때 성경은 우리를 꾸짖는다. 그리고 이런 설교가 오늘날 우리 사이에서 거의 표준적인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검토하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문제인지를 보여준다. 오래되고 참된 성경적 복음을 회복하고 우리의 설교와 실천을 그 복음에 다시 맞추는 것이야말로 현재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구속(redemption)에 관한 오웬의 논문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칼빈주의를 향한 편견 제거하기
“하지만 잠깐만요. 복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오웬의 작업은 분명히 제한 속죄를 옹호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까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 중 하나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복음 회복을 주장하는 당신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이 우리 모두가 다 칼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너무도 예상 가능한 이런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나름 가치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질문 속에는 많은 편견과 무지가 담겨있기도 하다. “제한 속죄의 옹호”, 마치 복음의 핵심을 설명하는 개혁파 신학자가 정말로 원했던 것이 오로지 이것 하나뿐이었던 것처럼 생각하다니? “우리 모두가 다 칼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마치 개혁파 신학자들이 자기 정당을 모집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고, 칼빈주의자가 되는 것이 신학적 타락의 마지막 단계이자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다니 말이다. 이 질문에 직접 답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칼빈주의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그 기저에 깔려 있는 편견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독자는 지금부터 설명할 일반적인 칼빈주의와 특히 칼빈주의의 “5대 강령”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사실에 주목하길 바란다.
첫째, 소위 말하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은 17세기 초 특정 ‘벨기에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내놓은 5대 선언문(항변)에 대한 칼빈주의적 답변에 불과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5대 선언문 안에 포함된 신학(역사 속에서 알미니안주의로 알려짐)은 두 가지 철학적 원칙에서 유래되었다. 첫 번째는, 신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는 고로, 따라서 인간의 책임과도 양립할 수 없다. 두 번째는, 능력은 의무의 범위를 제한한다(따라서 반펠라기우스주의의 공격은 완전히 정당화된다). 이러한 원칙을 근거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두 가지 추론을 이끌어냈다. 첫 번째로, 성경은 믿음을 자유롭고 책임 있는 인간의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에 믿음은 결코 하나님에 의해 야기될 수 없을 뿐 더러, 믿음은 하나님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상태에서 행사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경은 믿음을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하는 의무로 여기므로 믿음을 갖는 인간의 능력은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인간은 복음이 그의 앞에 놓였을 때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까지 죄로 인해 완전히 부패하지 않았다.
2. 인간은 복음을 도무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존재가 아니다.
3.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개념은 스스로의 힘으로 믿게 될 인간까지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서 촉발되었다.
4.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누구의 구원도 보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도 믿음의 선물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애초에 그런 선물은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다 믿으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5. 믿음을 유지함으로써 은혜의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신자들에게 달렸다. 실패하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다.
따라서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게 함으로, 구원하는 믿음을 전체적으로 사람 자신의 행위로 간주한다. 그러니까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이루는 것이지 인간 안에 계신 하나님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입장이다.
5대 선언문에 관한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 1618년에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t)가 소집되었으며,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5대 강령은 전혀 다른 원리, 즉 “구원은 오로지 주께로만 말미암는 것”이라는 성경적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타락한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복음을 믿을 능력이 없다. 이것은 마치 인간에게 확장될 수 있는 모든 외적 유인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믿을 모든 능력이 없는 것과 같다.
2.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고 믿음을 받고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해 죄인들을 향한 자유롭고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인 선택이다.
3.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택하신 자들의 구원을 최종 목적으로 삼고 있다.
4.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역사는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지 않는다.
5. 신자들은 영광에 이르기까지 사라질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과 은혜 안에 거한다.
이 5대 강령은 흔히 각 강령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튤립(TULIP)으로 편리하게 표현된다.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이다.
자, 이제 우리 앞에는 성경적 복음에 관해 서로 명백하게 반대되는 두 가지 일관된 해석이 있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강조의 차이가 아니라 내용 자체의 차이이다. 하나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스스로를 구원하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한 견해는 잃어버린 인류의 회복을 위한 성삼위일체의 세 가지 위대한 행위, 즉 아버지에 의한 선택, 아들에 의한 구속, 성령에 의한 부르심과 같은 각각의 위격을 향한 것과 더불어 구원을 확증하는 건 삼위일체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다른 견해는 각각의 행위에 대해 다르게 언급(reference)하고 있는데(구속의 대상은 온 인류, 부르심의 대상은 복음을 듣는 자들, 그리고 선택의 대상은 복음에 응답하는 자들), 그 누구의 구원도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따라서 두 신학은 구원의 계획을 전혀 다른 용어로 이해한다. 하나는 구원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존하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능력에 의존한다. 하나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 중 일부로 간주하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인간의 공로로 간주한다. 하나는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모든 영광을 오로지 하나님께 돌리고, 다른 하나는 구원의 기계를 만드신 하나님과 믿음으로 그 기계를 작동하는 사람으로 영광을 나눈다. 분명히, 이러한 차이점은 아주 중요하며, 무엇보다 칼빈주의를 요약한 ‘5대 강령’이 가지는 영구적인 가치는 다름 아니라 이 두 개념이 불일치하는 지점과 그 정도를 분명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단지 ‘5대 강령’으로만 단순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부터 살펴볼 다섯 가지 사실이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복음기도신문]
“ 옛 복음의 주된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지만, 새 복음의 관심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데에 국한된 것 같다 ”
제임스 패커 J. I. Packer |리젠트 대학(Regent College)의 신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스테디셀러 ‘하나님을 아는 지식’ 등 수많은 책을 저술. 2020년 7월 17일 소천.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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