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정형남 칼럼] 대체신학인가 성취신학인가? (6.끝)

Ⓒ 안호성

이 글은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이 발간하는 [중동연구] 제5권(2021)에 실린 정형남 교수의 <대체 신학 이슈와 초림 예수의 즉위 연구> 전문으로, 연구원의 허락을 받아 연재되고 있습니다.<편집자>

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된 패와 함께 십자가 못에 박혀 달리신 가운데 죽임을 당하셨다. 일요일 새벽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예수의 무덤 문의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무덤에 묻혀 있는 그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찾아온 여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마 28:2-4; 막 16:3-5).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뵈오리라.”(마 28:5-7; 막 16:6-7). 그리하여, 여자 제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급히 빨리 무덤을 떠나 베드로를 비롯한 갈릴리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가던 중(마 28:8), 부활하신 예수께서 직접 그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평안하냐”라고 하시자, 그들이 그에게 나아가 그의 발을 붙잡고 경배를 하였다(마 28:9). 바로 그때 예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10)고 직접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가 부활하신 자신을 만날 곳을 갈릴리의 어느 산이라고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셨다(마 28:16). 그 산이 곧 예수의 2차 등극식이 거행되었던 산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 산에서 내려오시던 길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 17:8; 9:8)라고 하셨던 바로 그 산에서 그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 중에는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마 28:17),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마 28:18a).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b-20).

이 말씀(마 28:18-20)은 이른바 지상 위임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여기서 다니엘이 본 “인자 같은 이”의 즉위식을 회상해 보자.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예수께서는 지상 위임을 통해 다니엘이 본 “인자 같은 이”가 바로 자신이라고 확정하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는 갈릴리호숫가에서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을 또 만났다. 그는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였지만 잘 잡히지 않아 지쳐있던 그들에게 숯불 생선구이와 빵을 먹이셨다. 이는 곧 섬김의 왕 되시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이 섬기는 자가 되도록 주신 하나의 모범적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으로 그의 사명을 북돋으셨다(요 21:1-23).

7)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행 1:3). 사십일 째 되던 날에는 그와 제자들이 예루살렘 감람산에 함께 모였다(행 1:4). 그들은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로(행 1:11), 그들의 총수는 11사도, 예수의 어머니와 아우들로 대표되는 120명쯤 되었다(행 1:13-15a). 부활하신 예수께서 일시에 500명쯤 되는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전 15:6). 그들이 예수를 만났던 곳은 갈릴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들 중에 380명 정도는 갈릴리에 그대로 남고 120명 정도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감람산으로까지 이동했다. 예수께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사실,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 1:8)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로서 성령으로 세례를 조만간에 받게 된다고 하셨다(행 1:4-5). 바로 그때 그들이 예수께 그들의 입을 모아 드렸던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행 1:6)? 존 스토트(John Sott)는 그들의 질문은 예수를 무척 낙담시켰음이 틀림이 없다고 하였다. 존 칼빈(John Calvin)은 “그들의 질문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다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팔머 로버슨(O. Palmer Robertson)은 스토트와 칼빈과 달리 이렇게 주장한다.

그들의 질문 속에 틀리지 않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킬 예수는 곧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이스라엘 나라는 곧, 메시아 왕국이다. 그들이 잘못 이해한 것은 메시아 왕국의 시작점과 완성점을 구별하지 못하고 하나로 보았다.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그 왕국이 즉각적으로 완성될 줄 믿고,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고 물었다. 그때 예수께서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라고 답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의 질문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영역인 메시아 왕국 완성의 때와 기한에 관한 질문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막 13:32). 예수의 제자들은 메시아 왕국의 시작점과 완성점만을 구별하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왕국의 성격과 본질이 “성령”으로 특징 지워지는 것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나면 그 왕국의 성격과 본질을 깨닫게 될 줄 믿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a)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이 왕국의 범위 또는 영역에 대해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b)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메시아 왕국 완성의 때보다는 그 왕국의 성격과 영역과 대상에 대하여 더욱 집중하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그 왕국의 영역과 대상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땅끝까지” 확장되어 세상 모든 족속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구약의 여러 구절(시 2:8; 19:4; 67:7; 72:8; 사 48:20; 슥 9:10)이 밝히 예언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로버슨은 메시아 왕국의 지경이 땅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선언을 그의 제자들의 질문,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행 1:6)에 대한 주변적인 답변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의 질의응답은 동문서답이 아니라 일종의 우문현답이었다(행 1:6-7). 예수께서 아주 적확한 답을 하셨다. 이는 다음 두 가지로 그 사실이 입증된다. 하나는 그의 승천 사건이다(행 1:9). 이에 대해 “예수의 승천과 구름의 등장”에서 자세히 논의하고자 한다. 또 하나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이 하늘로 올리어져 가시는 예수를 바라보다가 구름이 가리어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들에게 하였던 말,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이다. 이는 곧 메시아의 이스라엘 회복이 예수의 초림으로 시작되었고, 그의 재림으로 완성된다는 뜻이다. 그 회복의 장소는 이른바 가나안 땅으로 국한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이다(행 1:8). 그 회복의 주인공 또는 대상은 야곱의 혈통적 후손들로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이다(마 28:19).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는 회복되는 이스라엘이며 그의 제자들로 대표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에 걸쳐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행 1:3),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거는 바로 그의 교회 공동체의 “섬김의 사역”을 통해 계승되었다(행 8:12; 14:22; 19:8; 20:25; 28:23, 31).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행 28:31b)과 “하나님의 나라”(행 28:31a)는 바꾸어 써도 될 만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헹 8:12).

8) 예수의 승천과 구름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구름이 등장하였다(행 1:9). 다니엘이 본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로 타고 가는 “구름”이었다(단 7:13). 이는 곧 예수의 즉위식은 그가 승천하신 후 하늘에서 완료된다는 뜻이다. 구름이 예수를 가려, 제자들은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때마침, 그들 곁에 서 있는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라고 했다. 누가복음에는 그의 승천 장면이 이렇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0-53).

앞 서론에서 예수의 승천 장소는 곧 그의 재림 장소이므로, 베다니 마을의 아랍인들이 유대인들로 속히 대체되어 그들이 재림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행 1:9-11)에 재림 장소로서의 “올라가신 이곳(감람산 또는 감람산 앞 베다니)으로”라는 문구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이 구절에서 천사들은 예수의 재림 장소로서의 감람산이나 재림 예수님의 운반체로서의 구름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재림 모습이나 방법에 대해 말하였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하늘 영역에 계시던 예수께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으로 들어오셨던 사건이 바로 그의 성육신 사건이다. 성육신하셨던 예수께서 부활과 승천으로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셨다. 그의 재림 때에는 그의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자들도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갇히지 않으신 예수와 똑같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된다(참조, 살후 4:13-18 등). 따라서, 그 재림 때에는 성자 예수의 운반체로서 구름도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가리기 위한 구름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

9) 예수의 3차 즉위식 완료

예수께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로 자신을 계시하신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모습까지는 그의 제자들은 볼 수가 없었다. 단지, 그 이유가 구름이 예수를 가리어서만이 아니었다. 다니엘의 경우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로 구름을 타고 나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았던 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환상 가운데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예수의 3차 즉위식이 완료되는 모습을 소개하는 것이 바로 사도 신경이다.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아멘”

초림 예수께서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심으로 그의 왕국이 이미 출범되었다. 예수께서 재림하는 목적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가운데 그 왕국을 완성하신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시기 위함이다. 초림 예수의 즉위론이 옳다고 입증되었다.

IV. 나가는 말

“재림 예수의 즉위론”에 기초한 세대주의 신학에 기초한 기독교인들은 “초림 예수의 즉위론”에 기초한 개혁신학을 대체 신학이라고 비판한다. 성경 예언 성취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혈통적 후손들인 이스라엘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공동체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대체 신학이 아니라 실체 신학이며 성취신학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다윗의 즉위식들은 초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세 번에 걸쳐 소리가 각각 울리는 가운데 거행된 그의 즉위식을 위한 그림자가 되고 예표가 되었음을 논의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본 “인자 같은 이”의 즉위식은 예언적 말씀으로서 예수께서 세 번에 걸쳐 즉위하심으로 성취가 되었음을 논의했다. 그리하여, “초림 예수의 즉위론”이 옳다는 것과 이 회복론에 기초한 개혁신학은 대체 신학이 아니라 실체 신학이며 성취신학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물론, 이는 구약과 신약은 서로가 유기적인 관계이며, 예표나 그림자로, 그리고 예언으로서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해 신약의 예수와 그의 교회 공동체가 그 실체와 성취의 관계라는 우리의 이해와 합의가 전제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체 제물의 실체로 밝혀졌다는 것은 그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교회 공동체도 실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실체적 존재가 된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으로 제정하시고 선포하신 성찬 예식을 거행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빵(떡)과 잔으로 각각 기념한다. 그것은 유대교의 대체 제물과 3대 축제와 그 축제와 관련된 것들의 각각이 그림자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실체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이 된다. 예수께서는 전통적인 유월절에 먹고 마시는 음식을 그의 몸과 피로 대체시키셨다. 유월절 떡과 음료는 그림자였으며,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실체로 밝혀진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성찬 예식은 기독교 공동체가 출애굽 공동체의 성취적 존재로서 누리는 축제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천국 잔치의 맛보기인 것이다.

대체 신학 이슈를 제기하는 분들이 이스라엘 회복 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유대교와 함께 그림자를 붙잡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슬람과의 싸움에 휘말려 유대교 편을 드는 가운데 그 싸움에 불을 지르고 있다. 그런데, 이슬람은 그림자로서의 유대교의 모방이다.

이 시대 널리 알려지는 가운데 논란의 소지가 되기도 하는 “이스라엘 회복” 또는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구호는 “재림 예수의 즉위론”에 기초한다. 그런데, 그 즉위론은 옳지 않으며, “초림 예수의 즉위론”이 옳다고 입증되었다. 이 즉위론에 기초하여, “에덴의 회복”, “하나님의 형상 회복”, 예수의 형상 본받기로서 “예수 닮기” 구호 등이 활용되기를 제안하여 본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8:29).[복음기도신문]


[1] John R. W. Sott, 『땅끝까지 이르러』, 정옥배 역 (서울:IVP, 1992), 39.

[2] 위의 책, 39.

[3] O, Palmer Rob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159.

[4] 위의 책, 159.

[5] Eckhard J. Schnabel, 『강해로 푸는 사도행전』, (서울:디모데, 2018), 80.

[6] 이필찬, 『에덴의 회볻의 관점에서 읽은 요한계시록 1-11장』, (서울:에스카톤, 2021), 89.

[7] 이필찬, 『백투예루살렘, 무엇이 문제인가』, 63.

[8] 정형남, “예수임의 재림 지점이 요르단 남부 지역이라는 주장과 그에 대한 응답” 『ACTS 중동연구』제1권 2017, 페이지 216-228에서 “예수님의 등극식과 구름”이라는 소제목하에 다음의 구절들 (① 마태복음 24:29-31, ② 마태복음 26:56-58 ③ 사도행전 1:9-11 ④ 요한계시록 1:7)이 예수의 승천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이 각각 자세히 다루어졌다.

정형남 |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교수 및 GMS 아랍권 선교사(천안장로교회 파송. since 1989). 그의 책으로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CLC, 2009)과 아랍권 및 이슬람권 선교와 관련된 여러 <논문>이 있다.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 

[정형남 칼럼] 대체신학인가 성취신학인가? (1)
[정형남 칼럼] 대체신학인가 성취신학인가? (2)
[정형남 칼럼] 대체신학인가 성취신학인가? (3)
[정형남 칼럼] 대체신학인가 성취신학인가? (4)
[정형남 칼럼] 대체신학인가 성취신학인가? (5)

Print Friendly, PDF & Email

관련기사

bible-221031-unsplash
[TGC 칼럼] 복음은 보편적이다
0502kimji
[김종일 칼럼] 근로자의 날(노동절)의 기독교적 이해
20240326-wedding
[GTK 칼럼] 성경이 말하는 결혼: 7. 아내의 역할 (2,3) 채워주는 사람, 지지하는 사람
20240502 Jesus
[고정희 칼럼] "사랑하기를 배우고 있다"

최신기사

격화하는 미국 대학 반전시위…‘외부인 개입’ 의혹도
[TGC 칼럼] 복음은 보편적이다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민주콩고 반군, 전략광물 콜탄 광산 마을 장악
[김종일 칼럼] 근로자의 날(노동절)의 기독교적 이해
美 전국 캠퍼스 반전 시위... '행동하는 시민 교육' 때문
베네수엘라, 대선 앞두고 현금으로 복음주의 유권자 접근... 영혼 매수 행위 "반발"
Sea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