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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이웃 사랑, 선택이 아니다

ⓒ unsplash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보자. ‘네, 주님,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또 복음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 개가 새벽 2시만 되면 어김없이 짖지만 미안한 기색도 전혀 없는 그 이웃을 아예 없는 셈 치고 살았습니다.’ 

이웃은 내가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어떤 이웃은 기쁨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웃은 악몽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끔찍한 이웃조차도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명령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하지만 … [여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적어보자]. 고대 힐렐 학교에서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웃이 내 이웃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서류를 작성해야 할지도 모른다. 문제 해결 없이 불만만 쌓이다 보면 어느새 이웃과는 점점 더 멀어지기 마련이다.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보자. “네, 주님,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또 복음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 개가 새벽 2시만 되면 어김없이 짖지만 미안한 기색도 전혀 없는 그 이웃을 아예 없는 셈 치고 살았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웃이 얼마나 사랑할 만한지,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또 도덕적으로 얼마나 괜찮은지를 이웃 사랑의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어떤 차이든지 간에 복음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명확하다. 뒤로 물러서는 대신 한 발 더 가까이 가라고 말한다. 로사리오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는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 옵션은 벽을 더 높이 세우고, 우리 집이 우리를 지키는 성이라고 더 격렬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세상은 조만간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까 최대한 집안에 틀어박혀서 우리를 세상과 구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또한 성이 된 우리 집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는 항상 접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나름대로 이 세상과 전쟁을 일으키는 셈이다. 하지만 그 전쟁은 결코 어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복음의 빛을 비추게 하는 영적인 전쟁은 아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정당화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렇게 함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떠올리기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생기기를 바란다(시139:23–24; 약 1:22–25).

1. 배려심이 없는 이웃

때때로 무례한 이웃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그들과 관계를 단절한다. 시끄러운 음악, 엉터리 주차, 아이들이 있는 옆에서 하는 흡연, 잔디에서 변을 보는 애완견, 버릇없는 자녀 방치, 극단적인 구호를 적은 정치 포스터 또는 스티커를 붙이는 경우 등 이유는 다양하다.

취소 문화(Cancel culture)는 누군가가 당신을 괴롭히면 그냥 그들과의 관계를 버리라고 말한다. 반대로, 예수님의 길은 기꺼이 죄를 용서하고(요 8:1-11), 순결을 본받으며(벧전 2:12), 죄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요 4:1-42). 십자가에 달려서도 사형 집행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의 소심함은 사라지게 된다. 실로 엄청난 죄를 짓고도 매일 매일 용서받는 죄인인 주제에(딤전 1:15), 어떻게 감히 우리가 완고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을까(엡 4:32; 마 18:21-35)?

2. 이웃 사랑은 내 사역의 핵심이 아니라는 이유

사역 때문에 많이 바쁠 수도 있다. 그래서 집에 왔을 때 당신에게 필요한 건 또 다른 관계의 연장이 아니라 휴식일 수도 있다.

가정은 안식처가 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하나님의 주권(하나님이 행하신 사람과 장소의 현명한 배열)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지금 그곳에 당신을 두셨다(행 17:26). 그리고 당신 곁에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에게는 우연이 없기에 우리 곁에 누가 사는가는 너무도 중요한 사역의 원천이 된다.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항하는 은둔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나와는 너무도 다른 이웃

차이는 관계를 갈라놓는다. 사람들은 종교, 배경, 생활습관, 취미, 성격, 인종, 정치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끼리끼리 모이기 마련이다. 그럴 때 대화가 잘 통하고 안정되며 이해받는 느낌을 받는다.

많은 사람이 차이(differences)를 근거로 이웃 회피를 정당화하지만, 서로 간에 건널 수 없는 양립 불가(incompatibility)라는 틈(chasm)을 메우려는 시도는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는다. 진짜 문제는 우리 자신이 가진 불편함, 교만 그리고 두려움이다. 오로지 친숙한 사람들하고만 모이는 경우, 우리는 외모 또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기회 자체를 내버리게 된다. 

예수님은 종교 엘리트(눅 14:1)뿐 아니라 문제 많은 죄인들(막 2:15)과도 함께 식사하면서 당시 만연하던 ‘동질성 우선(homogeneous)’이라는 사회적 규칙을 깨셨다. 그의 제자 중에는 셀롯파(열심당, 전통적으로 로마에 대해 폭력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세리(전통적으로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당신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을 의미한다. 

4.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이웃

현대 사회에서 사생활은 불가침의 권리이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이제 상대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 방해하지 않는 것 그리고 개인의 공간에 허락 없이 들어가지 않는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웃에게 접근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 개인이나 가족에게 접근할 때에는 용기를 가지고 민감하고 신중하게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이웃에게 쿠키를 전달한 후 아무런 답이 없다거나 또는 저녁 식사 초대에 답이 없다고 해도 당황하거나 실망하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인내를 가져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작지만 소중한 접근 기회를 잡도록 하라. 그리고 계속해서 초대하라.

5. 적대적인 이웃

최근 동네 길거리에서 행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한 사람들에 대해 몇몇 이웃들이 모여서 심정을 토로했다. 행여 그들이 다시 주거 지역에 들어오면 어떻게 할지를 논의하고 감정 섞인 대응을 준비하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궁금해졌다. 이웃이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그들의 안전에 위협을 가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가장 잘 알려졌지만 가장 무시되는 명령이기도 하다. “원수”와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더는 지혜롭지 않다고 판단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결코 가볍게 말할 수 없다. 진지하고 깊은 기도에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만약에 이웃이 우리를 위협하는 경우 경찰에 신고하여 고소장을 내거나, 경보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최악의 경우 이사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하지만 적대적인 이웃을 위한 기도와 자기 보호를 위한 행동 모두를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 하나님이 이웃의 마음을 변하게 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멈추게 해달라고 해야 한다. 정의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그들이 악에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골 1:13).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의 말처럼,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이웃들이라도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웃이 누구이든 간에 내가 그들과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끄셨다. 나는 그들 위에 있지 않다. 나는 그들 곁에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 지역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함께 겪으면서 동행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심판하라고 부름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빛으로 겸손하고 참을성 있게, 또 내가 가진 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능력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삶이 영원을 향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들을 더 사랑할 것이다. 

문자 그대로 말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씨름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마 28:20),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말과 지혜를 공급하신다. [복음기도신문]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당신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을 의미한다

윌 앤더슨 Will Anderson | Talbot School of Theology에서 공부(MA)했고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에서 거주하며 교회 개척 멤버로 Southlands Church에 출석.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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