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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이누민족, 다시 부흥의 주역으로 일어나라

▶아이누민족 박물관에서 매일 몇 차례씩 아이누인들의 전통무용이 공연되고 있다. 그러나 공연자들 중 아이누인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필자는 꽤 오래전 일본 ‘아이누’라는 민족의 음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단조롭지만 독특한 선율. 그리고 반복적인 리듬으로 이뤄지는 무반주 합창. 민속음악 여행 도중 이들과 조우(遭遇)한 이후, 이 이름은 희미한 기억 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주님 안에서 아이누란 이름을 다시 떠올렸다. 미전도종족의 복음화 지표인 조슈아 프로젝트를 살펴봤다. 그 자료를 통해서는 이들의 형편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주님의 때,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아이누 민족의 본고장인 일본 홋카이도(北海島)를 찾았다. <편집자>

홋카이도 지명 90% 아이누어에서 유래

아이누(アイヌ)민족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만약 존재한다면 얼마나 될까?전혀 알 길이 없던 아이누 민족의 복음화 상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주님이 허락하셨다.

동일본 대지진의 중심지인 센다이 취재 일정을 마친 우리 일행은 지난 6월 21일 센다이(仙台)항을 출발, 홋카이도(北海道)로 향하는 훼리호에 올랐다.

항공요금의 절반 이하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갈 수 있다는 정보에 따라 선택한 여정이었다.

나고야(名古屋)항에서 출발한 기타카미(きたかみ)호는 센다이항에 도착, 매일 저녁 7시에 다시 출발해 15시간을 일본 동북 해안을 항해해 홋카이도 토마코마이(苫小牧)항으로 향한다.

1000여명이 탑승할 수 있는 배였지만, 숙소는 곳곳이 텅 비어있을 정도로 한산했다. 홋카이도에 도착, 다시 차량으로 3시간여를 달렸다. 마침내 홋카이도 중북부에 위치한 루모이시(留萌市)에 도착했다.

아이누민족정보센터를 섬기는 미우라 타다오(三浦忠雄)목사를 만났다.

이 센터는 일본그리스도교단이 지난날 일본인들이 아이누족을 핍박하고 차별할 때 일본 교회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은채 무관심했던 날들을 반성하며 그들을 섬기기로 결정하고 만들어진 비영리단체라고 한다.

“홋카이도의 옛 이름은 인간(아이누)이 살고 있는 조용한 대지(모시리)라는 ‘아이누 모시리’이다. 현재 이곳의 지명 90% 이상이 아이누어에서 유래됐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지명은 아이누어로 불리던 명칭을 일본어로 의역해 사용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사진과 함께 보여주며 미우라 목사는 말문을 열었다. ‘이누’라는 단어는 다른 종족의 언어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캐나다 에스키모의 이름 ‘이뉴잇’은 사람을 뜻하는 ‘이누크(Inuk)’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일본어로 ‘이누’는 개(犬)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며, 오랫동안 아이누 족을 비하하는 언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미우라 목사는 “이곳은 정말 평화로운 땅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천황 체제의 국가로 바뀌면서 홋카이도를 침략하고, 아이누 민족의 토지나 삼림, 하천사용을 금지했다. 그뿐 아니라 문화나 언어등 이 땅의 모든 것을 말살시켰다.”

아이누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일제하 36년을 거치며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으로 창씨개명, 일본어사용 등을 강요했던 우리 선조들이 겪어야 했 던 아픈 역사가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겹쳐지기도 했다.

더욱이 현재 아베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자민당은 일왕의 격을 상징적 존재에서 원수급으로 격상시키려한다는 사실이 다시 떠오른다.

아이누의 새로운 주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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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아이누민족 박물관에서 안내자가 아이누인들의 생활풍습을 설명하고 있다.

아이누 민족은 언제부터 이곳 홋카이도에서 살아왔을까? 홋카이도의 중부에 위치한 아사히가와(旭川)시에서 아이누의 후예로 아이누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카와무라 켄이치씨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누의 역사는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아이누인의 장편서사시인 유카르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와징(和人)이라 불리는 일본인이 이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중엽이다. 이 무렵 아이누 인구는 50만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아이누 인구는 2만여명을 약간 넘어서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홋카이도에 이주를 시도하며 세력을 키우던 일본은 1868년의 메이지 정부 이후, 본격적으로 아이누민족의 일본 동화정책을 펼친다.

그 첫번째 정책이 1869년 아이누 모시리로 불리던 이 지역을 주인이 없는 땅으로 간주하고, 일본 땅으로 편입하며 홋카이도로 명명한 것이다.

이같은 메이지 정부의 정책은 1871년 아이누어 사용을 금하고 일본어를 사용토록하고, 결혼식이나 가정장례 금지 등 아이누 문화의 근간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일본인의 홋카이도 이주 이후, 이곳의 환경은 급격히 악화됐다. 결핵, 폐병, 성병 등의 질병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런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던 아이누인들은 그 상황 앞에 내어놓을 어떤 대처방안도 없었다. 이로 인해 사망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일본 정부는 또 아이누인들의 주 생계수단인 어업이나 수렵 등을 금하고, 철도, 비행장 건설현장이나 탄광 등에서에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같은 강제노동 대상에는 당시 강제징용으로 이곳으로 끌려간 한국, 중국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또 이들은 이곳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사망하면 바로 흙구덩이에 그저 주검만 매장됐다. 그 유골들은 지금도 발굴되고 있다.

40년째 이들 조선인들의 유골발굴작업을 하고 있는 후카가와(深川)시에 거주하는 토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씨는 이렇게 말한다.

“근처에 있는 댐이나 광산 현장에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을 와서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 묻혀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람의 얘기를 듣고, 1976년부터 유골발굴작업을 벌여왔다.”

그는 올해 8월에도 한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모이는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로 유해발굴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다.

토노히라씨는 또 아이누인들과 함께 홋카이도대(北海島大) 등이 보관하고 있는 수백여점의 아이누 유골반환 및 위자료청구소송을 벌이고 있다.

아이누의 아버지, 배철러 선교사

아이누인들이 이렇게 고통을 겪고 있던 홋카이도 땅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874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메리엄 콜버트 해리스가 들어오면서부터이다. 그는 그러나 선교대상을 일본인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또 1878년 영국 성공회선교협회(CMS) 소속의 존 배철러 선교사가 홋카이도에 들어오면서 아이누 선교에 큰 진전이 나타났다.

훗날 그는 ‘아이누의 아버지’로 불리며 아이누 선교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되기도 했다.

배철러 선교사는 23세부터 86세가 되던 1940년까지 무려 63년간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이들과 함께 살았다.

당초 홍콩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요양차 홋카이도에 오게된 배철러 선교사는 아이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갖게 됐다.

당시의 심경을 자서전이나 편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이 아이누인 가족이나 한 마을 전체를 추방하고 그들이 소유하던 토지를 빼앗는 것을 봤다. 또 일본인이 아이누인에 대해 경멸하며 저속한 언어로 말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아이누인에 대한 연민과 주님의 열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노년에 자서전을 통해 청년의 때에 품었던 마음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들 아이누인에게도 전하고 싶다. 일본인들이 이들을 억압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다. 이들에게 옳은 길을 가르쳐 위로하고 하나님의 빛을 알게 하고 싶다.”

한때 1000명 넘어선 아이누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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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누의 아버지로 불린 존 배철러 선교사

그 이후 배철러는 아이누어를 열심히 공부해 ‘아이누어문법’(1887년), ‘아이누어신약성서’(1897년)을 발간하고 교회에서 아이누어로 설교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아이누인과 만남의 장을 넓혀가던 그에게 교육영역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한 만남이 허락됐다.

우수한 교사였지만 일본의 차별대우로 낙망에 빠져있던 아이누 청년 간나리 타로(金成太郎)를 만난 것이다.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동역하던 타로는 머잖아 아이누인 최초의 세례자가 됐다.

배철러 선교사는 타로와 동역하며, 홋카이도 곳곳에 아이누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개설,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이 학교를 통해 나중에 뛰어난 교육자와 사역자가 많이 배출됐다. 20세기 들어 홋카이도에서 아이누 그리스도인은 놀라운 속도로 늘어났다.

한때 아이누인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1000여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미우라 목사에 따르면, 1903년(1157명)을 정점으로 아이누 그리스도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1910년 650명 수준까지 숫자가 줄어들었다. 무슨 이유일까?

그 이유에 대해 배철러 선교사는 문헌을 통해 ▶CMS의 재정지원 축소 ▶사역의 분주함 ▶일본인들의 핍박에 따른 신도들의 사망 ▶일본의 동화정책 및 아이누어를 사용하지 않는 일본인 사역자와 충돌 ▶선교후계자 부족(세례 받은 성도에 대한 섬김부족) ▶일본인에 대한 사역의 확장 등을 들었다.

그러나 미우라 목사는 또 다른 관점을 제기한다. 아이누 선교의 통로였던 배철러 선교사가 말년에 접어들면서 초심을 놓친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배철러 선교사가 초기에는 분명히 아이누인의 입장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말년에 그는 일본 천황과 악수하며 감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따른 동화정책과 연결된 아이누 연구자의 모습을 보여, 결과적으로는 아이누 문화 파괴, 토지 수탈 등 폭력적 상황을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결국 이같은 배철러의 모습이 아이누 성도들의 기독교에 대한 회의와 이탈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실제 성공회 소속의 배철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목회자 가운데 이 교단을 탈퇴한 사람도 있었다. 에가 도라조(江賀寅三) 목사는 배철러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공회 소속의 목회자로 사역을 시작했으나, 후일 성공회를 탈퇴하고, 홀리니스교단 전도자로, 또 홀리니스교단 파송으로 사할린 선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삶은 몇년전 일본 NHK에서 ‘어떤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방송되고, 그의 삶은 ‘어떤 아이누 전도자의 생애’란 이름의 책자가 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배철러 선교사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전부일 수는 없다. 일본 최초의 퀘이커 교도이자 일본의 ‘무사도’를 세계에 알린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에 대한 평가가 서구문화와 일본문화의 통로이자 식민주의 이론 전도자로 엇갈리듯, 배철러에 대한 재평가 역시 엇갈리는 모양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연약함이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하신 역사 가운데 믿음은 주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누 그리스도인, 십자가를 자랑하라!

한때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복음의 열매가 맺혀졌던 아이누 민족의 복음화 그러나 현재 이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찾아보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더욱이 오랜 세월동안 억압을 받아온 아이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 더욱 찾아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아이누인들에 대한 관심은 그동안 이들이 받아온 상처에 대한 위로로 모아지고 있다.

또 교회가 아이누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압제와 수탈을 받을 때 외면해왔던 세월에 대한 반성과 이들을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먼저 존경하라는 것이다.(롬 12:10)

더 나아가 비록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아이누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주님의 마음으로 홋카이도의 복음전래 초기에 나타났던 복음의 열정과 주님의 마음이 부어져 부흥의 불길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GN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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