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만 드러나는 삶을 소망하는 김선주 장로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찬송가의 고백과 같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평생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오직 ‘은혜’라는 표현일 것이다. 그의 출생과 그의 삶의 터전과 그의 육과 영혼의 성장과 믿음의 발걸음. 그리고 주님의 구원사역에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삶. 여기까지 모두 은혜라는 말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여기 한 평생을 은혜 아래 살아온 한 증인의 삶이 있다. 지금도 해외에서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며 현역(?)으로 활동하며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김선주 장로를 만났다.
– 은퇴하신지 오래됐다는데 혹시 나이를 공개하실 수 있을까요. 너무 정정해 보이시네요.
“1936년생입니다. 그러니까 올해 일흔 일곱이 된 셈이죠. 주님이 건강을 허락하셔서 활동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셨군요.
“그렇죠. 고향은 충남 부여인데, 제가 3살때 우리 가족이 재산을 다 정리해서 북한으로 가서 살았어요. 거기서 큰 농장을 운영했죠. 그러니까 그곳에서 농장주의 자녀로 그 시대에 부족함이 없는 유년기를 보냈던거죠.”
– 언제 남쪽으로 내려오셨나요?
“해방 때 내려왔어요. 북쪽이 공산화 되면서 공산당이 우리 가족의 재산을 몰수하려했고, 아버지는 어디로 끌려가시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당시 어머니가 ‘남한으로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이 문제로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6남매, 이렇게 아홉 식구가 빈 몸으로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죠.”
‘남한으로 내려가라’ 음성 듣고 월남
– 다시 정착하기까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가족들이 정착한 곳은 대전이었어요. 지주로 살다가 빈털터리가 됐으니 절박했죠. 돌이켜보니 재산에 의지하던 우리 가족을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삶으로 인도 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아버지가 지난 2008년 97세의 나이로 소천하셨는데, “남쪽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잊지 말아라.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라.”라고 유언을 남기셨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하면 정말 은혜죠.”
–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신앙생활이 궁금한데요.
“중학교 때 개척교회를 건축하는 일을 거들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냥 재미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자매들도 있고…(웃음). 고등학교 때는 부모님이 말릴 정도로 집회를 쫓아다니며 열심을 냈던 것 같아요. 값나가는 시계를 헌금함에 넣기도 하구요.”
– 신앙이 깊어지는 어떤 계기가 있으셨을 것 같아요.
“68년도였어요. 32살이었죠. 그 시절에는 성령의 역사가 참 강하게 나타났어요.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되는 집회에 참여했는데 나흘 때 되던 날에 갑자기 압도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죠. 하늘에서 불이 쏟아지는 것 같았어요. 여러 가지 은사들도 나타났어요. 직장에서 동료들을 붙들고 복음을 전하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죠.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주님만 계시는 것처럼 정말 충만했어요.”
– 그 충만함을 계속해서 유지하실 수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한 5년 정도 지나니까 정말 한계가 왔어요. 느껴지는 것을 추구하다보니까 나중에는 지치게 되더라구요. 기도를 해도 느낌이 오지 않으면 기도한 것 같지 않게 되고, 느끼기 위해 애를 쓰다 보니 “이게 뭐야?”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리고는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죠. 그리고 해외에 수년 동안 파견 근무를 하는 등의 기간을 지나면서 일상의 안일함에 빠지게 되었어요.”
– 신앙의 안일함에서 다시 일깨워지기 위해 나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는 계기가 있으셨겠죠?
“그렇죠. 제가 97년에 61세의 나이로 직장에서 은퇴를 했어요. 그리고 퇴직금을 받았는데 제가 앞으로의 생활을 계산하다보니까 퇴직금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걱정을 하고 있는 데 갑자기 아직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한 거에요. 충격이었죠. ‘그래도 내가 장로인데, 이 수준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나?’ 생각하니 식은땀이 나더라구요. 부끄러워서 누구랑 상의를 할 수도 없고… 그때부터 ‘믿음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믿음이 있는가? 이전의 나의 믿음은 어디로 갔는가?’ 질문이 막 쏟아지기 시작했죠.”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나에게 실망
– 십자가복음의 진리 앞에 서셨던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까요?
“결정적으로는 한 선교단체의 훈련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강사님이“모태신앙도, 장로도 지옥갈 수 있다!”고 외치는 소리에 마음이 완전 무너져 내렸죠. 눈물이 쏟아지고… 한 마디로 난리가 났어요(웃음). 그때 믿음의 본질이 주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비로소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 그분과 완전하게 연합하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믿음만이 참된 믿음임을 깨닫게 된 거죠. 참된 믿음은 반드시 내 속에 주님이 들어와 사시는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이 진리가 저를 살렸죠.”
– 이 진리를 머리로만이 아니라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는 경험이 있으셨나요?
“어느 날 밤이었어요. 주님이 밤새도록 잠을 안 재우시더라구요. 누가 나를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누르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직감했죠.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했던 시편기자의 상황이었어요. ‘주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차라리 죽이세요.’라고 기도를 했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어요. 마음이 심히 낙담 되더군요.”
– 그 이후 주님의 답을 받으셨나요?
“다음날 아침 식사 후에 화장실에 앉아서 묵상을 하는데, 주님이 제 안에 깊이 감추어 놓은 두 가지 죄악을 정확하게 말씀하시면서 확실하게 정리할 것을 말씀하셨어요. 권위자에 대한 저의 교만한 태도와 관계 안에서 신실하지 못한 저의 부정한 죄에 대한 것이었는데, 주님은 각 사람에게 찾아가서 고백하라고 하셨죠. 두려웠지만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각 사람에게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일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마음이 너무나도 편하더군요. 내가 죽고 예수가 산다는 저의 믿음이 실제가 되고, 저를 깨끗하게 하시는 경험이었죠.”
– 복음이 실제가 되신 이후에 주님이 이끌어주신 삶을 나눠주세요.
“저는 마음속으로 은퇴하면 목사님이 없는 시골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섬기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어요. 그러다가 은퇴이후에 J국의 가정교회를 섬기는 한 선교회를 알게 되면서 그곳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처음에는 특별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청소하고, 짐 나르고, 은행 업무를 하고 그랬죠. 그렇게 1년 정도 지났는데, 그곳 선교사님이 함께 J국에서 신학생을 가르치자고 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못한다고 그랬죠. 그랬더니,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 붙잡아 주십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거의 주석을 베끼는 수준으로 성경을 공부해서 부랴부랴 갔어요.”
은퇴 후 청소와 은행 심부름 등으로 선교사역 시작
– 어떻게 되었나요?
“정말 성령께서 함께 하시더군요. 현지인 신학교였는데, 아주 뜨거웠어요. 제가 성경구절을 말하면 한 사람이 곧바로 일어나 그 구절을 외는 정도였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말씀을 가르치는데 저도 제가 모르는 말들이 막 쏟아져 나오더군요(웃음). 제가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정말 주님이 하신 일이에요. 그때부터 계속해서 가정교회들과 현지 신학교 등지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고 충만했죠. 그런데 그렇게 한 동안 시간이 흐르니까 기쁨이 점점 사라지고, 사역이 어렵게 느껴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됐어요.”
–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나요?
“어느 한 날 새벽기도시간에 주님이 ‘너 장로 25년 동안 뭐했냐?’라고 문득 물으셨어요. 그래서 ‘네? 한 거 아무 것도 없는데요.’라고 대답을 했죠. 그런데 그 대답이 제 마음 속에 계속 남아 맴돌았죠. 그리고 ‘주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도구로 써서 주님이 직접 하신 거구나. 나는 한 게 아무 것도 없구나!’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거에요. 어느 순간 또 ‘내가’ 하려고 ‘내가’ 주님의 사역에 개입되는 순간 정확하게 어려움이 온 것이죠. 그러한 저의 상태를 하나님이 드러내 주신거죠. 은혜에요.”
– 최근 기도하시는 기도제목이 있으시다면
“아직 이렇게 건강하게 지내는 것을 보며, 살아서 주님을 만날 수 있겠다는 소망이 있어요. 이 땅에는 정말 아무런 미련이 없죠. 다만 소원이 있다면 내가 죽고 주님이 드러나는 삶을 마지막까지 사는 것이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내 대신 죽어 나를 살리셨는데, 그 복음이 드러나는 것이면 충분하죠. 그것이면 족해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하면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알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더 알려 달라고 기도하죠. 이게 요즘 기도제목이에요.”
神様だけを現す人生を希望する金ソンジュ長老
‘私の一生歩む道進めて。。’讃美歌の告白のように一人のクリスチャンの一生を説明できる単語があるならば、ただ‘恵み’という表現であろう。彼の出生と彼の人生の場と、彼の肉と魂の成長と信仰の歩み。そして神様の救いの働きに呼ばれて、神様の共役者としての人生。ここまですべてが恵みだという言葉以外に説明できるものはない。
ここに一生を恵みの下で生きてきた一人の証人の人生がいた。いまも海外で現地人たちに福音を教えて、現役(?)で活動して、福音を称える金ソンジュ長老に会った。
-退職して長くなりましたが、お年を公開できますか。とても元気そうですね。
“1936年生です。だから今年で77歳になりますね。神様が健康を許してくださって活動するのにまだ大丈夫です。”
-日本の植民地の時に生れましたね。
“そうです。故郷はチュンナンのブヨですが、私が3歳の時、私たち家族が財産を全部整理して北朝鮮へ行ってすみました。そこで大きな農場を運営しました。それでそこで農場主の子として、その時代に足りない物がない幼年期をすごしましたね”
-いつ南へと来ましたか?
“日本から独立した時来ました。北の方が共産化になって共産党が私たち家族の財産を没収しようとしていたし、お父さんはどこかへ連れられたりもしていたと記憶しています。当時お母さんが‘南へ行きなさい’という神様の声を聞いたと言っていました。お父さんとこの問題で葛藤がありましたが、結局すべての所有をあきらめて、おばあさん、親そして6兄弟、このように9人の家族がからっぽで南へと行くようになりました。”
‘南へ行きなさい’の声を聞いて南へ
-もう一回定着するまでたやすいことではなかったでしょう。
“家族が定着したのはデジョンでした。地の持ち主だったのが、空っぽになって切実でした。顧みると財産に依頼していた私たち家族が、神様を依頼する人生へと導いてくださったと思います。実際にお父さんが2008年97歳で昇天しましたが、‘南へ導いてくださった神様のみ手を忘れないで。神様の恵みだった。これを忘れず覚えろ。’と遺言を残しました。神様の導きを思うと本当に恵みでした。”
-青少年期と青年期の信仰生活が聞きたいです。
“中学校の時、開拓教会を建築する仕事を手伝いながら熱心に信仰生活をしました。ただ面白くてそうしました。姉妹たちもいて。。((笑)。高校の時は親が止めるぐらい集会に通いながら熱心でした。値段がつく時計を献金箱に入れたりもしました。”
-信仰が深くなるきっかけがあったと思いますが。
“68年のころでした。32歳でした。その時代には聖霊の働きがとても強かったです。正月一日から始まる集会に参加しましたが、三日目に急に圧倒的な体験をしました。天から火が降るようでした。いろんな奇跡も現れました。職場で仲間たちを掴んで福音を伝えると聖霊の働きはありました。世と私はどこにもなくて、ただ神様だけがいらっしゃるように本当に充満でした。”
-その充満さを続けて維持できたのか聞きたいです。
“5年くらい過ぎると本当に限界が来ました。感じる物を追及するから、後には疲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祈っても感じが来ないと祈ってないようになって、感じるようになるために努めると、‘これはなんだ?’という疑問が浮かびました。それで瞬間で冷えました。そして海外で数年間派遣勤務をするなどの期間を経て、日常の安逸に陥りました。”
-信仰の安逸さでもう一回起きるために自分自身の姿に直面するきっかけがありましたか。
“そうです。私が97年に61歳の年で職場で退職をしました。そして退職金をもらいましたが、私がこれからの生活を計算したら退職金が足りないと思われました。それで心配をしているときに、急にまだ‘何を食べるか何を着るか’を心配するその水準を超えない私の姿を発見したのです。衝撃でした。‘それでも私が長老であるのに、この水準で救われたと言えるのか’と思うと冷汗が出ました。恥ずかしくて誰とも相談出来ず。。。その時から‘信仰とは何か。私に信仰はあるのか。以前の私の信仰はどこに行ったのか’という質問が溢れてきました。”
‘何を食べるか’と心配する自分に失望
-十字架の福音の真理の前に立たせた話をもっと聞かせてくださいませんか。
“決定的にある宣教団体の訓練過程に参加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が、そこで講師が‘キリスト教の家庭で生まれた信仰も、長老も地獄にいける!’と叫ぶ声に心が完全に崩れました。涙があふれ出て。。。。一言で大変な時でした(笑)。その時信仰の本質は、神様とは関係であることを体験する時間でした。神様と共に十字架で死んで、神様の復活と共に再び生きて、神様と完全に連合する結論へと達する信仰こそが本当の信仰であると気付きました。本当の信仰はかならず私の中に神様が入って生きる結果に達するしかない、この真理が私を生かしました。”
-この真理を頭だけではなく、人生を通して具体的に気付く体験がありましたか。
“.ある日の夜でした。神様が夜中ずっと寝かしてくれませんでした。だれか私を押すような感じでした。そして押すのは神様だと直感しました。‘主の手が夜昼に私を押すので、私の液は抜けて夏の旱魃の渇きのようになります’と書いてある詩編記事の状況でした。‘神様、私が何を間違えましたか。むしろ殺してください’と祈りましたが、何の応答もありませんでした。心がとても落胆になりました。”
-その後、神様の答えをもらいましたか。
“次の日、朝の食事後、トイレに座って黙想していると、神様が私の中に深く隠れていた二つの罪悪を正確に言ってくださって、確実に片付けるようおっしゃいました。権威者に対しての私の高慢な態度と関係の中で、真実でない私の不正な罪に対してのことでしたが、 神様は各人に訪問して告白しろと言いました。怖かったですが、従順するしかなかったです。それで各人に訪問して膝をまずいて許しを得たことがありました。そうすると心がとても楽になりました。私が死んでイェスが生きる私の信仰が実在になり、私を清くしてくださる経験でした。”
-福音が実在になった以後、神様が導いてくださった人生を聞きたいです。
“私は心の中で定年すると牧師がいない田舎の教会に通いながら仕えたいと茫然と考えていました。その退職以後、J国の家庭教会に仕えているある宣教会を知るようになって、そこで活動を始めるようになりました。”
-具体的にどんな仕事をなさいましたか。
“始めは特別に私ができる事がなくて、掃除して荷物を運び、銀行の業務をしました。そのように一年程度過ぎた時、そこの宣教師が共にJ国で神学生を教えようと言って、私が出来ることではないと、出来ないと言いました。そうすると、‘神様が共にします。聖霊様が導いてくださいます。’と言いました。それで注釈をコーピする水準で聖書を勉強して急いで行きました。”
退職後、掃除と銀行の手伝いなどで宣教の働きを始める
-どのようになりましたか
“ 本当に聖霊様が共にしてくださいました。現地人の神学校でしたが、とても暑かったです。私が聖書の箇所を言うと一人の人がまっすぐ起き上ってその節を覚えるほどでした。そんな雰囲気でみ言葉を教えると、私も私が知らない言葉があふれ出ました(笑)。私が出来ることでないと気付きました。本当に神様がなさいました。その時から続けて家庭教会らと現地神学校などで教える仕事を始めました。涙が出るぐらいうれしくて充満でした。しかしそのようにひと時の時間がすぎると、喜びがだんだん無くなり、働きが難しく感じられる危機に会うようになりました。”
-なぜそんなことが起きるようになりましたか。
“ ある日の昇天祈祷会で神様が‘貴方、長老25年間何をしたか’と聞きました。それで‘はい?何もしていません。’と答えました。しかしその答えが私の心にずっと残っていました。そして‘神様が私を通して働いたのは、私が行ったのではなくて、神様が私を道具として使って神様が直接なしたのだ。私は何もやってない!’この事実を気付くようになりました。ある瞬間、また‘私が’行おうとすると、‘私が‘神様の働きに介入する瞬間、正確に大変になりましたね。そんな私の状態を神様が表わ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恵みでした。”
-最近祈る祈祷課題がありましたら。。
“まだこのように健康で過ごせるのをみると、生きて神様に会えるという希望があります。この地には本当に何の未練もないです。ただ望みがあるならば、私が死んで神様が表わされる人生を最後まで生きることです。宇宙万物を創造したあの方が、この地に来てくださって、私の代わりに死んで私を生かしてくださったので、その福音が表わされたら十分です。それで満足です。その大きな神様の愛をどのようにすれば、もっと深く気付けるか、我慢できないほど知りたいです。それでもっと教えてくださるようにと、祈っています。これがこの頃の祈りの課題です。”
J.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