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선교열전 (2) – 전라북도 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한국의 기독교 선교역사는 132주년을 맞고 있다. 구한말부터 본격화된 개신교 선교 역사는 문화, 교육, 의료 분야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며 한반도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됐다. 우리나라 곳곳의 선교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편집자>
이수정이 우리나라 개신교 역사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독보적이다. 그는 성경을 번역했을 뿐 아니라, 어두운 조선 땅에 선교사를 불러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조선의 마게도냐인’이었다.
학식과 소양이 풍부했던 호남 출신 학자 이수정에게 복음을 전해준 농학자 츠다는 미국과 유럽에까지 유학을 다녀온 저명한 학자이자 신앙이 뜨거운 감리교인이었다. 그는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조선에서 찾아오는 양반들에게 농학을 가르쳤다.
이수정 역시 농학자이자 친구였던 안종수의 소개로 츠다를 찾아갔다. 그는 이수정에게 한문 성경을 전해주며 “공자의 빛은 호롱불과 같아서 방안만 비추는 빛이라면, 예수의 말씀은 온 세상을 밝힐 수 있는 태양과 같다.”고 말했다. 츠다의 집에 걸려있는 한문으로 된 산상수훈 족자에는 유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황금률이 보석처럼 박혀있었다.
나라의 가난을 해결하러 간 이수정에게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라는 말씀은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미 츠다를 만났던 안종수 역시 성경을 받았지만, 국법을 어기면 처형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복음을 뿌리쳤다. 그러나 이수정은 달랐다. 그는 선물로 받은 성경을 단숨에 읽고, 깊은 신앙의 감동으로 기독교에 입문했다.
뿌리 깊은 유학 사상을 뒤흔든 산상수훈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녹스(G.W. Knox)와 야스가와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비슷한 시기 만주에서 로스(J. Ross)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은 백홍준, 이응찬 등과 함께 초기 개신교 신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당시 일본은 1873년 천황의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기독교가 정착돼가고 있었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은 1883년에는 일본에 대성령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1월, 요코하마는 기도주간을 설정하고 목사, 전도사,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었다.
4월과 5월에는 오사카와 도쿄에서 대집회가 열렸다. 이수정은 5월 8일부터 시작된 도쿄의 ‘제3회 전국기독교인대친목회’ 넷째 날이었던 5월 11일 공중기도를 맡았다. 일본 교회 초대목사였던 오쿠노의 제안이었다. 그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말로 기도했다. 당시 기도회에 참여했던 일본 교계 지도자 우치무라 간조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자기 나라 말로 기도했는데 우리들은 그 마지막에 ‘아멘’ 하는 소리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한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 그가 여기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장소와 광경을 한층 더 오순절과 같이 만들어 주었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 무언가 기적적이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온 회중이 느꼈다.”
일본 대집회에서 우리말로 공중기도
집회의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이수정은 의관을 정제하고 조선의 대표로서 품격을 유지하며 일본 교계 지도자들과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었다. 세례를 받은 지 일주일 만이었다. 이수정의 신앙은 깊고 담대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한시로 지어 서경공회(현 도시샤교회) 니지마 조 목사에게 남겼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는 것은 나무에 뿌리가 있는 것과 같고, 사랑함과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그 나무뿌리가 마름과 같도다. 사랑하는 마음은 물과 같아서 뿌리를 윤택하게 하나니, 가을과 겨울에 나뭇잎이 떨어져도 그 뿌리가 마르지 아니하리라…하나님을 공경하고 말씀을 믿으면 꽃이 피고 얽히고설킨 가지마다 열매가 가득하니, 그 깊음이 있고 심히 크고 달도다. 그 몸통은 소나무와 잣나무 같아서 눈과 서리가 와도 가히 시들게 하지 못하느니라.
– 사랑하는 서경공회 형제자매에게. 조선 이수정.”<계속> [GNPNEWS]
참고문헌: <전라북도 기독교 근대문화유산의 현황과 의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