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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TGC 칼럼] 천국의 웃음

ⓒ unsplash

G. K. 체스터턴은 언젠가 하나님에 관해서 가장 숨겨진 것이 그의 웃음이라는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정통’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경외감을 가지고 말한다. 그의 극도로 고달픈 삶 속에는 수줍음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오를 때 그가 모든 사람에게 숨긴 것이 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나 충동적인 고립을 통해서 끊임없이 감춘 것이 있다. 이 땅을 걷는 하나님에게는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기에 지나치게 위대한 무언가가 있다. 나는 종종 그게 하나님의 기쁨이 아닐까 상상한다.

체스터턴은 이 책의 또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우리에게 허락된 비극은 어쩌면 일종의 자비로운 희극의 한 종류가 아닐까? 하나님에게 진짜 속한 것들이 품은 광란의 에너지를 만날 때 우리는 술 취한 광대처럼 쓰러질 지도 모른다. 천사들의 엄청난 가벼움보다 우리는 차라리 눈물을 감당하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늘에서 천국의 웃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내내 우리에게는 대신 별이 빛나는 침묵의 밤이 내려오는 게 아닐까?

다음은 거룩한 웃음에 대한 나의 조심스런 추측이다.

순전한 행복

성경에는 왜 웃음과 가벼움(levity)이 거의 나오지 않는지 나는 궁금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웃음은 순수한 빛과 달콤함이다. 순수한 행복이다. 악한 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주님의 비웃음이 묘사된 시편 2:4과 59:8을 제외하고, 성경에서 의로운 웃음에 대한 언급은 찾기 힘들다. 성경에도 조롱은 자주 등장하지만, 진짜 기쁜 웃음을 발견하는 건 힘들다. 세상 창조에 대해 기뻐 외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묘사된 욥기 38:7에 어느 정도 진짜 웃음이 포함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새 창조의 현실은 과연 웃음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세상일까? 부조리, 예상치 못한 일, 그리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은 종종 웃음을 유발한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큰 자비보다 이 묘사에 더 잘 어울리는 게 또 있을까? 그러니까 여기에 대한 가장 적절한 반응은 거룩한 웃음이어야 하지 않나? 

기쁨과 감사

아주사 퍼시픽 대학교에서 만난 두 친구가 떠오른다. 롭과 에런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이였다. 그들은 사소한 일 또는 황당한 일을 만날 때면 가장 먼저 웃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건 다 기쁨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롱보드를 타다가 넘어져도 웃었고, 무슨 말을 하다가 단어를 까먹어도 웃었다. 눈을 감고 얼굴을 위로 향한 채 찬양을 하는 중에도 그들은 웃고 있었다.

나는 거룩한 회중이 주님과 함께 잔치를 벌일 때 아마도 다들 롭과 에런처럼 이렇게 끝없이 웃지 않을까 상상한다. 음란물이나 욕설 및 다른 어리석은 일은 다 지나가고 단지 우리가 새 땅에서 맞는 잔치에 속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감사에 넘쳐서 웃지 않을까? 이 세상 모든 게 다 사라질지 모르지만, 웃음마저 사라진 세상은 차마 상상할 수 없다. 바울은 어리석은 말과 상스러운 농담에 반대한다(엡 5:4). 이유가 뭘까?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옳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이것들이 잘못된 웃음을 유발하기 때문이 아닐까?

모호성

그리고 우리는 구주에게서도 이 점을 볼 수 있는지 모른다. 에세이 “웃음과 그 사이”에서 던컨 브루스 레이번(Duncan Bruce Reyburn)은 이렇게 썼다.

유머는 … C. S. 루이스가 말하듯 ‘타자에 대한 취향’을 필요로 한다. 주인공의 변화, 즉 하나의 목소리가 허용하지 않는 자아의 탈중심화를 필요로 한다. 절대 희석되지 않은 한 목소리에 반대하여 체스터턴은 종종 여러 관점을 장난감 다루듯 한다.1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목소리는 한 번에 두 가지 관점을 보는 모호성과 대조적으로 오로지 한 가지만을 말하거나 보는 방식이라는 게 레이번의 설명이다. 그것은 일종의 언어유희이다. “나는 배트(bat)에 맞았어” 할 때, 그게 긴 나무 조각인지 아니면 가죽 날개를 가진 동물, 즉 박쥐를 의미하는 건지는 오로지 맥락에 의해서만 드러날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 청중이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 단어를 쓰는 경우에 우리는 모호성의 한 형태를 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호성은 속임수나 실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관점을 가지고 활용하는 방식이다. 잘만 하면 모호성은 관대함의 표현이 될 수도 있고 또한 희망을 줄 수도 있다. 나는 경외감을 가지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성육신이야말로, 나는 창조물 전체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모호성의 사례일 수 있다고 말이다.2

궁극의 해피엔드

지금까지 이 세상에 살았던 그 어떤 인간보다도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게 더 슬프고 또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그는 모든 것을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 볼 수 있었다. 그는 천사들의 가벼움과 땅에 묶인 자들의 무거움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궁극적인 해피엔딩을 성취하기 위해 그는 비극처럼 보이는 삶을 살았다. 나는 가능한 한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그를 직접 만나고 그와 같이 될 것이다(요일 3:2). 하나님의 본성에 내가 참여하는(벧후 1:4) 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그건 아마도 하나님의 농담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웃음을 알게 되는 게 아닐까? [복음기도신문]

  1. Reyburn, Duncan. “Laughter and the Between: G. K. Chesterton and the Reconciliation of Theology and Hilarity.” (2015). ↩︎
  2. 성육신이 가능했던 것은 신학자들이 존재의 유비(analogy of being)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다. 하지만 그가 완전히 다른 존재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고 또 그에 대해서 알 수도 없을 것이다. ↩︎

출처: Thoughts on Laughter in Heaven

노아 네빌스 Noah Nevils | 사우스 플로리다 토박이이다. 톨킨과 루이스의 작품을 좋아한다. 현재 미래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탐정 소설을 쓰는 데 몰두하고 있다. New Saint Andrews College에서 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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