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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칼럼] 무슬림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모든 무슬림 형제자매에게 보내는 복음 편지(9):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일러스트: A.I. 제작. DALL-E. 김종일 제공

밖에서 보는 이슬람(119)

앗쌀람 알라이쿰!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무슬림 형제자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오늘 편지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으시는 여러분은, 그분을 어떤 분으로 기대하고 있나요? 이번에는 좀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우리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한 인간들로부터 어떻게 보이기를 원하실까요? 그리고,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대로 그분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인격 관계 맺기

하나님과 인격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성경 속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회개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식사 모임을 자주 가지셨습니다. 이는 비유적 행위로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하나님 나라의 ‘실존’과 ‘현재성’을 드러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무가치한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자기들 생각과 기대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달리 예수님께서는 죄가 많은 사람과 어울렸고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의 이런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은 몇 개의 비유를 사용해서 회개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의 진정한 의미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누가복음 15장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중심 주제인데,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면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답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이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인간의 죄로부터의 용서와 구원을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간들 사이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이 계획을 현실로 드러내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기독교 이외에 다른 어떤 종교도 신과 인격 관계를 맺는다는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12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14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15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 그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19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누가복음 15:1~24, 새번역).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만 성경 속 예수님의 사역과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누가복음 15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구절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따르면, 큰아들의 아버지를 향한 태도와 아버지가 큰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비교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을 설명하면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종교인들의 잘못된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사랑의 가족관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엄한 권위주의적인 입법자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회개한 죄인들뿐만 아니라, 회개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비난하는 종교인들에게까지도 사랑의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일한 하나님 중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체가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내미신 사랑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통해서 두 아들 모두 아버지를 향한 인식이 얼마나 빈약하고, 왜곡되었는지를 발견합니다. 특히, 본문을 통해서 자기 분깃을 요구하면서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이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의(Self-righteousness)’만을 추구하는 큰아들 모두 똑같이 진정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랑에 겸손한 마음으로 반응하고, 하나님과 함께 삶을 나누려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두 아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발견합니다. 우리 인간은 늘 자기중심적이어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낼 것에만 관심이 있고,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 아들 중 어느 쪽으로부터 우리 모습을 발견합니까? 또한,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사람들 대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거나,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을 하나의 철학이나 세상의 여느 종교와 다름없는 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기대하거나 믿고 싶은 대로 우리의 틀 안에 하나님을 넣으려는 고집으로 일관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자기 본위의 신앙은 자연종교나 샤머니즘 같은 곳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조종할 수 있는 ‘신’에게 드리는 종교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렇게 허술하게 조종할 ‘신’이 존재한다면, 그 자체가 ‘신’에 대한 모욕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을 만들어 놓고, 자기의 생각에 맞추려는 다분히 인간적인 노력으로 살아갑니다. 자기들의 사상과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낸 ‘신’을 숭배하고, 그 ‘신’을 제멋대로 조종합니다. 더군다나, 그 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에 ‘자살폭탄테러’를 순교라고 말하기도 하고, 여성들을 성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등 저지르지 못할 죄악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이 정말 ‘신’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왜곡된 하나님을 향한 생각은 잘못된 결과와 죄의 결과를 남겼습니다. 이슬람 안에서 ‘ISIS’ 같은 테러단체나 성지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와 결탁한 중세의 기독교가 일으켰던 십자군 운동이 그 비슷한 사례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이 여전히 이런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풍성한 삶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는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생각을 드러나게 해 주고,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깨닫게 해 주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죽은 허울뿐인 종교에서 벗어나 우리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의 위대함을 알려주며, 우리가 그 사랑에 반응하도록 도와줍니다. 인생의 쓴 경험들 때문에 비관적인 자아상으로 스스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창조주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시는 분이심을 묵상하면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누가복음 15장은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고 그분이 가진 구원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15장의 말씀은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진정한 회개를 하는가에 대한 모범적인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로부터 재산분배를 받아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고 나서는 다시 아버지한테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의 행위를 ‘회개’의 모델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 다시 회복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너무 배가 고파서 굶어 죽기 직전에 품꾼들에게 풍성한 양식을 나누어 주는 자비로운 주인에게 돌아온 것뿐이었습니다(누가복음 15:17). 오늘 기록의 초점은 탕자(잃어버린 자)가 ‘어떻게 아버지께로 돌아오는가?’가 아니라, 돌아오는 탕자를 향해서 아버지가 ‘어떻게 행동하셨는가?’를 발견하는 것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거지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발견한 것도 아버지였습니다(15:20). 오늘 말씀을 보면, 거지가 된 아들이 아버지를 알아보고 먼저 달려가서, ‘아버지’하고 껴안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버지가 거지가 되어 단지 굶어 죽지 않게 밥만 얻어먹기를 원했던 아들을 적극적으로 다시 둘째 아들로 회복시켜 주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아온 그에게 미리 준비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며, 발에 신발을 신기는 아버지의 행동은 거지가 되어버린 집 나간 ‘탕자’를 다시 아들로 회복시키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이었습니다(15:22). 이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어줌으로 집 나간 탕자가 변함없이 자기 아들이라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알려주기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고,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축하 잔치를 벌였습니다(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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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는 예수님께서 받아들이고 있는 당시의 죄인, 세리, 창녀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무한히 자비로운 아버지는 예수님의 죄 용서와 영접, 그리고 이들과의 식탁 교제를 통해 나타나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편, 큰아들의 처지에서는, 보통 화가 나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는 거의 종처럼 지금까지 아버지께 순종하며 섬겨왔으며, 단 한 번도 아버지 명령을 거역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에게는 단 한 번도 잔치를 베풀어준 적이 없는 아버지는 그에게 인색한 아버지로만 생각될 뿐입니다. 그런데, 자기 모든 재산을 창녀들과 다 날려버리고 죄만 짓고 돌아온 자기 동생을 위해 저렇게 기뻐하면서 잔치를 베풀어주는 모습은 정말 큰아들을 화나게 만드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큰아들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생각한 구원은 자기들이 행한 순종과 선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그들만 구원받을 자격이 있고, 당시 죄인, 세리, 창녀와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받을 자격이 없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는 구원은 인간의 자격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하심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누가복음 15장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대의 기쁜 소식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구원은 우리가 행한 옳은 행위나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무조건) 죄인을 용서하고 아들로 받아들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하심과 사랑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고, 구원에 대한 진정한 감사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까지 어떠한 죄를 저질렀든지 무조건 우리 모두를 자녀로 받아 주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그런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초청하심에 믿음을 가지고 기쁨과 감사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구원받는 길을 택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메시아)로 믿겠다는 믿음의 결정 하나만으로 구원받고 천국 가시겠습니까?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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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 전)국립 앙카라대 교수, 현)아신대(ACTS) 중동연구교수, 한국외대, 장신대 신대원, 국립 이스탄불대 역사학 석사 및 박사 |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1)무슬림 이해하기’, (2022, 라비사북스). ‘벌거벗은 세계사(경제편)’, 공저, (2023, 교보문고), ‘하나님의 운동(Motus Dei)’, 공역(2024, 라비사북스), ‘밖에서 본 이슬람, (2)이슬람 이해하기’, (2024, 라비사북스, 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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