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감 높아지고 분노조절 능력 떨어져…”평생 범죄 굴레”
전문가들 “정규 교육과정서 도박 예방 교육해야 하는 시대”
“실제로 돈을 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돈은 그냥 돌고 돌 뿐.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호구의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난다.”
노름꾼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타짜’에서 정마담(김혜수 분)은 불어난 판돈을 급히 마련하는 인물 ‘호구'(권태원 분)를 보며 이렇게 비웃는다.
최근 청소년 사이 들불처럼 번진 사이버 도박 역시 이 같은 고전적인 도박의 구조를 그대로 답습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돈을 잃을 수밖에 없게 설계된 사이버 도박의 굴레에 빠진 성장기 청소년은 성인이 되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이로 인한 사회적 폐해는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 ‘일확천금’은 신기루…정서 발달에도 악영향
2일 경찰 등에 따르면 청소년이 사이버 도박에 유입되는 경로는 ‘친구 소개’가 가장 많다.
광고성 문자메시지나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물을 보고 도박을 접한 청소년이 친구를 끌어들이는 것인데, 도박 사이트 운영자 입장에서는 고객이 고객을 끌어오는 다단계와 비슷하다.
사이트 운영진은 프로그램을 조작해 처음에는 이들이 돈을 따게끔 한다. 입소문을 타 어느 정도 고객이 확보된 뒤에는 고객이 이윤을 낼 수 없는 구조로 프로그램을 바꿔 거액을 챙긴다.
마치 자신이 뛰어난 실력이 있어 수익을 냈다고 착각하는 청소년은 금세 도박에 중독되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부모님과 주변 친구의 돈까지 끌어 쓰는 지경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신체·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청소년기에 도박을 접하면 그 중독성이 성인과 비교해 훨씬 높다고 우려한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도박에 빠진 학생들은 도박하지 않을 때 무기력증과 충동성, 허탈함을 느낀다고 한다. 우울감이 높고 분노 조절 능력은 떨어져 가정과 학교에서 대인관계 갈등도 심해진다.
이해국 한국중독정신의학회 이사장(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청소년기에 거금을 베팅하고 느끼는 스릴은 일상적인 놀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급격한 쾌감과 흥분을 준다”며 “보상회로가 과도하게 사용돼 전두엽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이사장은 “더욱이 일상의 행복에 대해 둔해지고 인내력이 떨어져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며 현재 충동을 억누르고 노력하는 기능 발휘가 안 된다”며 “평생의 성취감이나 퍼포먼스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번 중독된 청소년이 제때 치료·상담받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도박을 끊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경제력이 없는 학생들이 도박을 기화로 폭력성이 발현되거나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2차 범죄도 문제다.
한 경찰은 “도박자금 마련을 위해서 청소년이 남의 물건이나 돈을 훔치거나 다른 학생의 돈을 뺏는 학교폭력, 사기 등 사건이 많이 접수되고 있다”며 “한번 발을 잘못 디뎌 평생 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성인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 정부, 청소년 도박 근절 총력전…학교·가정 교육도 중요
문제는 사이버 도박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일종의 ‘놀이’로 여기는 분위기가 청소년 사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당국은 수년 전부터 청소년 도박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다양한 홍보·계도 활동을 벌이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3월까지 ‘청소년 대상 사이버도박 특별단속’을 벌여 청소년 1천35명을 포함해 2천925명을 검거한 데 이어 지난달부터 6개월간 추가 특별단속을 실시해 고액·상습 도박 행위자 처벌과 치유·재활에 힘쓰고 있다.
전국의 각 시도경찰청도 ‘도박은 게임이 아닌 악질 범죄’라고 강조하며 관련 기관과 연계해 범죄 예방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경찰청은 최근 급증한 청소년 도박과 대리 입금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달 20일 서울 시내 학교 1천374곳과 학부모 78만명을 대상으로 ‘긴급 스쿨벨’을 발령했다.
학교전담경찰관(SPO) 등을 통해 온라인 도박 첩보가 접수되면 집중적으로 수사하고 금융감독원,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등 유관기관과 협력해 피해자를 지원할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청소년 도박 근절을 위해 경찰의 단속·처벌 뿐만 아니라 학교와 가정에서의 교육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김영호 을지대 중독재활복지학과 교수는 “남는 비교과 시간에 외부 강사가 방문해 하는 ‘시간 때우기’ 교육으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며 “교육부와 학교가 정규 교육과정에서 도박 예방 교육을 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지적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자긍심, 안정감이 비어 있는 청소년들이 그 공간을 도박으로 메꾸는 것이기 때문에 도박보다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학교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가족 간 애착이 형성돼있지 않으면 그 틈을 비집고 도박이 들어온다”며 “부모님과 형제 사이 정기적인 화합과 소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제의 근원인 불법 도박사이트와 대출업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동진 서울경찰청 청소년보호계장은 “도박 산업을 수요와 공급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도박장을 열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공급자는 당연히 엄격하게 단속·처벌해야 한다”며 “이와 함께 신속한 예방 교육·치료로 수요를 줄이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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