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화장할까 매장할까를 놓고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었다. 그리스도인에게 매장은 표준이었고, 따라서 “기독교식 매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스도인에게 화장은 고작해야 바이킹이 나오는 이야기에서나 만나는 먼 나라 내용이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상황이 바뀌었다. 화장이 보다 더 일반화되었고, 이상하다는 생각도 조금씩 사라졌다. 이제는 매장보다 화장이 더 일반적인 나라가 적지 않으며, 그리스도인 중에도 아예 처음부터 화장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화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은 목사로서 내가 종종 받기에 충분히 생각할 가치가 있다.
내 주장은 “기독교식 매장”이 잘못된 명칭이 아니라 적절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시신이 화장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활시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하나님에게 매우 쉬운 일이다.) 그리고 화장이 성경의 명확한 명령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적 관행이 기독교 신학과 잘 맞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나는 매장이 인간의 몸과 그 미래에 관한 성경적 선례, 성경적 이미지, 그리고 성경적 신학을 더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행위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매장은 절망적인 문화 속에서 기독교가 주는 희망을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죽음이 주는 슬픔 안에서 기쁨을 찾는 방법으로서 회복할 가치가 있는 관행이다.
바른 질문을 하라
성경에 화장에 대한 도덕적 금지 조항은 없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많은 예가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화장한 예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라헬, 요셉, 미리암, 모세, 다윗, 엘리사, 세례 요한, 스데반, 그리고 가장 유명한 매장 사례로는 그리스도의 시신이다(창 25:10; 35:19, 29; 49:31; 50:14, 민 20:1, 신 34:6, 여 24:32, 왕상 2:10, 왕하 13:20, 막 6:29, 행 8:2, 고전 1:31; 15:4).
왜 그런지 물어볼 가치가 있다. 얼마든지 다른 옵션도 있었다. 스테판 프로테로는 “이집트인, 중국인, 히브리인을 제외하면 화장은 고대인의 표준 관행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건 매장이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하나님 백성의 표준 관행이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일까?
매장 패턴은 정경이 완성되었다고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가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매장이 화장을 대체했다는 게 역사의 증명이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지배적이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문화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서구 세계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화장이 부활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인구 증가와 장례 비용 증가도 한몫했다.) 하지만 왜?
반문화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이 역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항상 지배적인 관습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몸에 대한 유대-기독교의 믿음과 유대-기독교의 매장 관습 사이에 어떤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어서가 아닐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의 몸과 미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죽고 나서조차 그 몸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종교들이 바라보는 몸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는 화장한다. 인도나 네팔과 같은 곳에서는 화장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힌두교인이 환생과 몸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다. 한 힌두교 웹사이트에 따르면, “죽은 후에 인간의 외양, 즉 육체는 아무 소용이 없다. 따라서 영혼을 해방시키고 환생 과정을 돕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몸을 태우는 것이다”라고 한다.
육체와 내세에 대한 힌두교의 믿음과 죽음을 둘러싼 힌두교의 문화적 관습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다. 이건 놀랍지 않다.
육체를 영혼의 껍데기나 감옥으로 여기는 종교도 적지 않다. 이런 시각이 반드시 매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건 분명하다. 탈출한 감옥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행 17:32). 반면에, 매장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 다 육체적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은 자연스럽게 매장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드러난다.)
종교는 문화의 일부이며 문화적 신념은 문화적 관행에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가 바라보는 몸
기독교는 이 점에서 힌두교와 매우 다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영혼 불멸뿐 아니라 육체의 부활도 믿는다. 다른 많은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인간의 육체와 창조 전반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았다”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창 1-2 참조). 이것이 기본적인 기독교의 시각이다. 물리적 창조와 인간의 몸은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결과이다.
이는 또한 인간에 대해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 교리의 일부이다. 인간으로서 당신은 몸을 가진 영혼 또는 영혼이 있는 몸으로 묘사될 수 있다. 두 요소 모두 중요하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 죽음의 정의이다(약 2:26).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몸이 단지 “진짜 나”를 만드는 영혼을 싸고 있는 껍질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몸은 인간이 인간 되도록 하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아비가일 파페일이 말했듯이,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다. 신체는 겉으로 드러난 사람 자체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전이 된 5세기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에 대해 썼고, 그는 죽은 사람을 돌보는 방법에 이를 적용했다.
아버지가 입던 옷, 아버지의 반지, 그리고 그의 모든 물건이 아버지가 베푼 사랑을 고려할 때 자식에게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가지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육신은 얼마나 더 잘 보살펴야 하겠는가? 평생 입었던 육신을 어떻게 옷과 비교할 수 있을까? 몸은 단지 외적 장식이나 보조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혼이 죽음으로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몸을 부활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신 이유이다.
예수님이 매장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자를 썩음을 당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제 삼일에 살리실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행 2:27, 고전 15:4).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 그리스도인 대부분도 부활하기 전에 부패를 겪겠지만, 우리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힌두교 신학이 그들의 문화적 관습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초기 기독교 신학도 교회의 문화적 관습에 영향을 미쳤다고 신학자 티모시 조지는 지적한다. “로마의 카타콤이 증명하듯이 초기 그리스도인은 매장을 고집했다. 그리스도인의 묘지는 코에메테리아(coemeteria)라고 불렸는데, 문자적으로는 ‘잠자는 곳’을 의미한다. 곧, 미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인체의 본질적인 선함과 미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의 근본이다. 따라서 그것이 사후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문화적 관행을 형성했다는 건 조금도 놀랄 일이 아이다.
바른 신호를 보내라
그리스도인이 최근까지 거의 보편적으로 매장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문화 추세를 단순히 따르기 전에 잠시 멈춰서 생각해야 한다. 죽음의 의식은 문화적, 신학적 공백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화장하는 요즘의 추세가 과연 바람직할까?
더 중요한 것은 (성경과 그 이후 모두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적 관행을 고려할 때,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매장 사이의 자연적 적합성이 매장이라는 보편적 관행을 제대로 설명하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러셀 무어가 말했듯이, “문제는 단지 화장이 죄인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다, … 진짜 문제는 장례가 과연 기독교적 행위로 이뤄지는지의 여부이며, 따라서 장례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이다.”
무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생각한다. 장례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이며, 약함으로 뿌려진 것이 언젠가는 능력 있게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전달한다(고전 15:42-43). 부활에 관한 모든 구절 중 가장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땅에 심어진 씨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시신을 묻는 것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둘 다 땅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땅에서 나오는 것이 둘 다 생물학적으로 연속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차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상태로 다시 나온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서 동일한 비유를 사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말씀은 죽은 자를 매장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으로서의 부활과 기독교 관습으로서의 매장 사이의 자연적 적합성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이 담긴 지침이라는 측면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농업이든 장례식이든 매장은 최종 행위가 아니라 시작 행위이다. 단순한 끝이 아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교 문화 속에서 우리가 활용해야 할 기회이다. 그리스도인의 매장은 단순히 주검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는다. 추수를 바라며 씨를 뿌리듯, 우리는 부활을 바라며 장사를 치른다.
기독교식 매장을 다시 주장하며
나는 무어의 이 말에 동의한다. “기독교 목사로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성도 중 일부가 화장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거기에 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변의 다른 문화처럼 우리는 죽음과 매장조차도 단지 개인 취향에 따른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바다에 홀로 뜬 섬이 아니며,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장례식은 항상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장례식을 준비하는 책임이 개인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실용주의적이고, 비역사적인, 그리고 문화적 조류에 휩쓸리는 미국의 개인주의자로서 치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경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장례라는 엄숙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
화장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돈 문제라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묻어주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을 향해서 나는 깊은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단지 입에 발린 동정은 가치가 없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이것이다.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가 여전히 장례를 기독교적 행위로 믿는다면, 우리는 중요한 곳에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한다. 경제적 이유로 매장을 하지 못하는 교인에게 교회가 나서서 재정적 지원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앞에서 나는 몸에 대한 기독교 신앙과 역사적인 기독교 매장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가 화장을 선택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서 화장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나의 소망은 미래 지향적이다. 사랑하는 사람,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장례를 논의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어서이다.
매장은 성경의 사례, 성경의 비유, 그리고 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더 잘 표현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가 점점 더 이교화 될수록, 우리도 점점 더 반문화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매장 문화를 되찾자. 그리고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크게 외치자,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Cremation or Burial: Does Our Choice Matter?
저스틴 딜리헤 Justin Dillehay | 저스틴 딜리헤이는 The Gospel Coalition의 협력 편집자로 미국 테네시주에 있는 Grace Baptist Church의 목사로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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