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말씀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혁명과 같은 말씀으로 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천국을 티 내고 산다는 것은 맞는 말씀이지만 오류도 있습니다.
예수를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예수를 소유한 티를 낸다는 말로 바꿔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느라, 실상 말씀하시는 ‘주님’을 놓칩니다. 말씀하신 것을 지키는 나는 의로워지고 말씀하신 주님은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예수를 소유할 수 있는 열쇠는 8장에 있습니다. 이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나병환자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충격은 엄청납니다. 제사장이 나병이라고 판명하면 삶은 곤두박질칩니다. 우리도 코로나 초기 때 코로나 판정받으면 그냥 격리됐습니다. 혹시라도 가족이 코로나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면 시신도 보지 못하고 화장 처리 됐습니다. 당시 나병에 걸렸다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단절됩니다. 가족과 끊어지고 사회활동도 끊어집니다.
나병환자가 가는 골짜기가 따로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모든 쓰레기를 그곳에 버렸다고 합니다. 나병환자는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는 뜻도 있고 그 쓰레기라도 먹고 살라는 목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비유할 때, 주님과 관계없는 사람을 나병환자라고 말합니다.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는 골짜기에서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곳에서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병환자는 사람이 나타나면 100미터 전쯤에서 “타뫼 타뫼,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하고 소리 높여 외쳐야 합니다. 외치지 않으면, 누구든지 그 나병환자를 돌로 쳐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 나병환자가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손을 내밀어 닿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나병환자가 숨어서 몰래 온 것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에워싼 예수님께 가까이 오려면, 그 무리들 사이를 뚫고 왔다는 것인데, 그것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려면, 이 정도 열심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만나지만, 피조물의 입장에서, 이 정도 열심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은 그 정도 열심을 부려도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는 그 열심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나병환자는 죽음을 불사하고 갔습니다. 그 믿음이 자발적으로 생길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 나병환자의 죽음을 불사하는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병환자의 환경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병환자는 모든 것이 단절되었습니다. 모든 관계에는 책임감이 따릅니다. 부모, 사회에 대한 책임감도 나병환자에게는 끊어졌습니다. 그 책임감이 끊어지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꼭 그렇게 살아야 해요?” 그것이 책임감입니다. 바로 그것이 죽어야 합니다. 그럼, “자녀를 보고 무관심해라? 돈을 벌지 마라?” 그런 이야기입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책임감을 느끼면 그 책임의 대상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돈 벌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해” 그럼 그 가족이, 그 책임감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마음에 들어온 그것이 죽지 않는 한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부르고 귀신을 내어쫓았고 선지자 노릇 했는데 주님께서 아니라고 하신 이유는, 나의 시선이 그것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씀을 나눠야 살아’ 하는 그 책임감! ‘내가 선지자 노릇 해야 살아’ 하는 그 책임감이 죽어야 합니다. 나병 환자처럼 완전한 단절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돌 맞아 죽습니다. 설교 한 편을 이야기합니다. 영적으로 설교를 잘해서 돌 맞은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이 보여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고, 영광의 하나님이 보여서 자기 아들 이삭에게 칼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자식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말할 때 그 내용들이 있습니다. 자식을 어떻게 죽일 수 있냐는 내용이 마음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였다는 말씀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는 내용이 마음에 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마음에 담겼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만 보인 것입니다. 그게 나병 환자의 형국입니다. 주님을 찾는 그런 열심, 믿음의 싸움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이 등장합니다. 청년은 율법을 잘 지켰음에도 나중에 버림받습니다.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이런 조건을 지켜야 한다면 누가 천국 갈 수 있겠습니까? 천국 가기 쉽지 않다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몇 명 안됐습니다. 구원 받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구원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와야 합니다. 어떻게 자녀에 대한 책임감을 놓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됩니다.
부자 청년이 모든 재산을 다 버린다는 것은 내가 주인되어 한다는 개념이었습니다. 다 버렸을 때 오는 불안감, 낙오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부자청년은 주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할 수 없음을 할 수 있음으로 바꾸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고,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고, 천국과 예수를 소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삶에서 얼마든지 알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감옥에 있든 왕이 되든 대통령이 되든 법관이 되든, 그곳에서 하나님이 되라 하시면 얼마든지 주님의 뜻을 나타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주님이 내 마음에 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절망이 아니라 놀라운 은혜입니다. ‘마음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는 것이 나병환자의 상황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이 실제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단절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내가 너희 속에 있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중간 간부입니다. 당시 노예, 하인은 소유물과 같은 하찮은 존재입니다. 저는 이 백부장을 많이 흉내 냈는데 잘 안 됐습니다. 닮으려고 애쓰는 것이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아파하는 마음으로 목회를 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정말 촉촉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려고 흉내내고 노력했는데 그럴수록 안됐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오히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니까 들어왔습니다.
백부장은 그런 마음으로 중풍 걸린 하인을 예수님과 연결한 것입니다. 뇌졸중은 경색이 있고 출혈이 있습니다. 뇌세포가 죽으면 언어, 운동, 생각 등이 마비됩니다. 출혈이 있으면 피가 고이게 되고 그곳 뇌세포가 죽습니다.
이건 그냥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이 열리기 시작하면 믿음 생활에 돛이 달리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어마어마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자랑할 만한 믿음이었습니다. 보통 로마 초급간부라면 그들의 주인은 로마 황제입니다. 황제는 실제 신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신의 아들이 황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의 지배력이 미치는 그곳에서 로마 초급장교가 주님께 나와서 주님이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죽을 수도 있었지만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백부장은 유대 땅에서 아마도 신실한 유대 여인을 만나 믿음이 생기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백부장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엄청난 믿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믿음입니다. 주님과 관계성,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관계성이 깊어져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사람’이라는 것이 실제가 되면 열리는 것이 있습니다. 1대 1의 관계가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논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해야 아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어마어마한 자유를 줍니다. 엄청나게 큰 책임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사람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 보이고 다른 사람은 잘 안 보입니다. 우리의 수준이고 여러분들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이라고 부르는 관계는 된 것 같습니다.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그런 이기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1대 1 관계는 충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통치가 있는 그때 하나님께서 실제로 지배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지배력을 알았습니다. 자신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고 지배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역사하시는 주님이 하인에게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똑같이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저에게도 있으면 제 속이 그렇게 타지 않습니다. 속 탄 것은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배력, 하나님의 주권은 ‘나뿐만 아니라 너에게도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통치, 지배력이 임합니다! 아예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통치, 지배력이 있습니다. 그 믿음을 백부장이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놀라신 것입니다.
누가 천국에 갑니까? 예수를 소유한 사람들, 책임감이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들,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의 지배력을 믿는 사람들이 천국에 갑니다. 나에게 오신 하나님이 너에게, 또 누구에게나 그 지배력이 미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 삶에 믿겨졌을 때 기다릴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바른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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