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기 목사는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의 순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동안 그같은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 칼럼은 그의 저서 발췌와 집필을 통해 선교적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개척의 장벽들
몇 년 전, 에드 스테처(Ed Stetzer) 목사는 한 신학교에서 미국 교회에 개척을 싫어하는 사고의 장벽이 있다고 강의했다. 그것은 각각 대형교회 신드롬(Large church mentality), 전문가 교회 신드롬(Professional Church Syndrome), 행정교구 사고방식(Parish Church Mindset), 응급처치 접근(Rescue Approach), “이미 알고 있다”라는 사고방식(Already Reached Myth)의 5가지였다(Missional church Planting Conferenc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May 11, 2009, http://news.sbts.edu/?p=702).
이 항목의 제목들을 토대로 우리가 제자화를 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대형교회 신드롬
대형교회는 옳지도 그르지도 않다. 교회의 여러 형태들 중 하나일 뿐이고, 덩치만큼이나 문제도 더 많다. 그러나 대형교회 현상, 즉 교회는 무조건 성도가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는 것이 사역의 목적이라는 생각은 문제가 크다.
한번은 목사님들과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교회론 강의를 진행하다가 클럽 사진 하나를 보여주며 내가 물었다.
“이 사진을 보니 어떤 생각이 드나요?”
청중이 대답했다.
“너무 멋져요!” “부러워요!” “부흥했네요!”
내가 다시 말했다.
“이 사진이 어떤 장소에서 찍은 것인지 알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네? 교회 예배를 찍은 사진 아닙니까?”
“이 사진은 자정이 넘은 시간, 술 마시고 춤추며 하룻밤의 상대를 찾는 남녀들의 세속적인 클럽 모임을 찍은 것입니다.”
대형교회 신드롬은 제자화에 방해가 된다. 그것은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에 목적이 있는 데 반해 제자화 사고방식은 한 영혼으로부터 작게 시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토대로 한 신앙 공동체가 유기체적이고 자연 발생적으로 제자화를 통해 배가되는 것과 이상현상을 토대로 한 어떤 지도자가 신앙 공동체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모아 교인이 많아지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지금 대형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대형교회 신드롬’이라는 그 병적 사고방식이 제자화 사역에 방해가 된다.
전문가 교회 신드롬
최근에 한 교회에서 제자화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지 회의를 했다. 그 결론은 제자화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이었다.
얼마 뒤, 그들은 수소문 끝에 관련 학위를 가진 유학파 목사님을 모셔왔다. 그리고 1년 뒤에 그 교회는 본인들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 사역의 현장에서 제자화에 관해 기대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가 교회는 병적이다. 은혜 받고 사역하고 싶어 불타오르는 성도들을 제쳐두고 전문가를 외부에서 찾는 달뜬 열정도, 전문가 한 사람만 있으면 전체가 바뀔 거라는 게으른 기대감도, 작고 어리숙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고방식도 병이다.
설교방송에 대해 자문해보라. 언제부터 교회에 방송 시스템이 필수였는가? 눈앞에 서 있는 설교자의 아랫입술에 붙은 밥풀도 생생하게 보이는데 왜 강대상 뒤에 목사님 얼굴을 대형모니터로 또 상영하는가?
음향 시스템에 대해 자문해보라. 속삭여도 설교 소리가 잘 들리는데 왜 여러 대의 마이크와 수백만 원짜리 스피커들을 꽂아두었나? 그런 것들은 전문가 신드롬이 만든 어색한 장면들 중 하나다.
제자화 사역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만 교회 사역을 할 수 있고, 제자화 사역을 할 수 있다는 병적 사고방식이 제자화 사역을 막아선다. 물론 이론이 없는 실천, 지식이 없는 실행은 신뢰가 가지 않아 불안하다. 하지만 동시에 실천이 없는 이론은 회의적이고, 실행이 없는 지식도 허무할 뿐이다.
신학교 교수들이 종종 이런 자학개그를 한다.
“설교학 교수는 설교를 못해서 연구하다 보니 교수가 된 것 같고, 전도학 교수는 전도를 못해서 연구하다 보니 교수가 된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의를 못해서 교수가 된 것만큼은 가장 확실하다.”
한편, 성경이 말하는 제자화 전문가란 전문가 신드롬이 말하는 전문가와 다르다. 그들은 “학문 없는 범인”(행 4:13), “미련한 자와 약한 자”(고전 1:27), “천한 자, 멸시받는 자, 없는 자”(고전 1:28)였다. 그들은 여자, 아이, 어부, 세리, 그리고 죄인이었다.
예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비전문가들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천국 열쇠와 제자화를 맡기셨다. 성경은 말한다. 전문가에 대한 비밀은 학위에 있지 않고 예수님의 위임에 있다고.
전문가 신드롬에 빠진 교회에서는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새신자가 제자화 사역을 하는 것을 막아선다. 새신자를 비전문가로 보기 때문이다. 전문가 신드롬에 빠진 교회에서는 어린이나 노인이나 뭔가 약한 구석이 있는 성도들이 제자화 사역을 하는 것을 막아선다. 그들을 비전문가로 보기 때문이다.
전문가 신드롬에 빠진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제자화 전문가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제자화 학위가 있으면 제자화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제자화 학위가 없으면 제자화를 할 수 없는 사람입니까?”
막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불신자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제자화한다. 무식하면 용기가 있어서 그렇다. 난생 처음 창세기 1장 1절을 펼쳐본 사람은 성경 한 번 읽어보지 않은 친구들에게 그 구절 하나를 소개한다. 아는 것이 적어서 전달이 빠르다.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처음 경험한 사람은 아직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희생과 사랑을 전하고 가르친다. 신세계를 처음 경험해 마음이 뜨거워서 그렇다.
제자화는 학위가 있든 없든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다. 흥미롭게도 역사를 살펴보면 전문가 신드롬은 오래된 사고방식이다. 그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교회에서 쫓겨났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천국 열쇠”(마 16:19)를 교황만 받았다고 주장했다. 비성경적이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개혁을 주장한 이들은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심지어 처형되기도 했다. 오늘날 전문가 신드롬에 빠진 교회들은 그 천국 열쇠를 전문가들만 받았다고 생각한다. 비성경적이다. 물론 역사는 반복된다.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성경대로 하자고 하면 쫓겨날지도 모른다.
행정교구 사고방식
한 지역 또는 한 구획당 하나의 교회만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이다. 중세적인 사고방식이다. 중세 가톨릭 국가에서 교회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제도였고, 국가가 운영하는 관료중심, 건물 중심의 기관이었다.
당시 국가 리더십이 원하는 형태의 단일 교회가 존재했고, 그 과정에 지역별 관리 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국가는 행정교구 시스템을 창안했다. 제도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에게는 열두 지파가 있었고, 신약교회에도 열두 사도와 일곱 집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행정교구 제도는 아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가까운 예를 들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행정교구 사고방식은 공장화에도 반영되었다. 공장 라인을 모두 거치고 나면 단 한 종류의 제품만이 존재한다. 그 제품은 매뉴얼화 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 통용될 수 있는 똑같은 부품들을 아웃소싱을 통해 찍어낸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다르면 안 되므로 각 과정마다 중앙집권적인 관리가 배정된다. 생산뿐만이 아니라 판매에서도 지역별 유통구조와 연결망을 갖게 되었다. 대량생산은 그 과정과 판매 모두 지역별 관리 사고방식을 따르게 되었다.
행정교구적 틀은 공장혁명을 거치면서 똑같은 생산품을 찍어내어 같은 가격에 판매하기 위해 최적화된 시스템을 세상에 퍼뜨렸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와 맞지 않는다. 시대적으로 맞지 않고 성경적으로도 틀리다.
지금은 3차 산업혁명의 시대이다. 곧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하나의 매뉴얼이 시장을 지배할 수 없는 소위 개성의 시대이다.
“개성만큼의 직업이 존재하는 시대이며 모두가 모두와 연결되는”(클레이 셔키, Clay Shirky) 시대이다. “무수한 분량의 개별 소비자 코드를 일일이 읽어내지 못하면 생산자가 망하는”(데이브 그레이, Dave Gray) 시대이다. 규격화된 이력서를 통해 사람을 뽑으면 인사 실패가 보장된 시대이다.
오늘날은 더 이상 행정교구 사고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중세로부터 한참 멀어진 시대이고, 이것은 교회와 그 사역에 있어서 비성경적이다. 은사도(고전 12:4), 직분도(고전 12:5), 사역도 하나일 수 없다(고전 12:6). “하나”여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뿐이고 나머지는 다 다르다(고전 12:12).
이 다양성을 한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 다양하게 실천하는 것이 교회이며 교회 사역이다(고전 12:6-12).
행정교구 사고방식은 권한위임을 막는다
제자화 사역은 권한위임을 요구한다. 제자는 또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례와 주일예배 설교를 생각해보라. 마태복음 28장 19, 20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명령은 담임목사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다. 그러나 행정교구 사고방식은 교회 안에서 리더 목사 한 사람만이 세례를 줘야 한다는 행정 결과를 낳았다. 이는 제자화에 방해가 된다.
전도한 사람이 직접 세례를 주고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 제자화에서 더 진정성이 있다. 하지만 행정교구 사고방식에 갇혀있는 한 그런 위임이 일어나지 못한다.
또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고 명령하신다(마 28:19,20). 이 명령 역시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행정교구 사고방식은 교회 안에서 목사만 설교해야 한다는 행정 결과를 낳았다. 제자화에 방해된다.
성경을 모든 교회 구성원이 동일 수준에서 나눠 가져야 한다. 직접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는 위임이 일어날 때 자발적 성경학습과 교수(敎授)가 진행될 것이다. 반면에 행정교구 사고방식은 성경 강의에 대한 위임을 가로막는다.
행정교구 사고방식은 제자화를 상품처럼 규격화한다
사람은 규격화될 수 없다. 사람 수만큼의 개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각종 성격 심리검사도 행정교구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지역적 구획화와 광범위한 신도들에 대한 집약적 관리체제는 은사적 다양성이나 특성들을 통제하려는 일처리 방식을 만들었다. 이 중세적 사고방식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시기에 공장형 시스템과 맞물려 교육과 인재 등용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근대사회는 전쟁 시스템에 최적화된 사회구조가 필요한 시기였다. 국가들마다 사람들의 성격마저 구획화했다. 학문도 그것을 도왔다.
사람은 그렇게 규격화될 수 없다. 제자도 규격화될 수 없다. 각자의 은사, 관계의 연결망, 사용하는 문화 코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정교구적 사고는 단 한 종류의 제자만 찍어낼 것을 요구한다. 교실 기반의 각종 제자화 수업, 커리큘럼 중심의 각종 제자화 훈련들에서 그렇다.
제자화는 개별적인 관심과 사랑을 무수한 시간에 담아 삶으로 동행하며 보여주고 섬겨야 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라고 말했다. 그는 디모데에게 모든 제자화 권한을 위임한다. 여기에 행정교구적 사고는 없다.
중세 가톨릭은 행정교구를 나누어 통제했다. 제도가 교회를 통제했다. 그래서 우리의 선배들이 일어나서 개혁했다. 교회는 예수님의 것이지 국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국가의 통제 대신 성령님에 의해 통제되는 제자들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틀리다면 제자화 권한을 계속 리더 몇 사람이 틀어쥐고 있는 현 상태와 제자들을 상품처럼 찍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침묵하라. 그러나 행정교구 사고방식이 틀렸다면 다른 언행을 보이라.
예수님을 대신해서 교회를 좌지우지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행정교구 사고방식은 달콤하다.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 양측 모두에게 그렇다.
응급처치 접근
이것은 교회 외부로 떠나지 말자는 생각이다. 새로운 제자를 삼는 것보다 교회 안에 있는 죽은 성도 혹은 죽어가는 성도들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제자화 사역자들의 에너지를 교회 내부로 돌려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새롭게 제자화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제자화 대신 교회 내부의 사역들을 하도록 독려한다. 그런데 이것도 맞는 말 아닌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든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든 누구라도 제자화하면 좋은 일 아닌가? 응급처치 접근은 왜 잘못인가?
맞다. 교회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정말로 제자화를 한다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응급처치 접근 사고방식은 제자화에 사용되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사용하도록 교묘히 이끈다. 그곳은 ‘현상 유지’라는 허울뿐인 비성경적 사역이다.
웨이처치의 제임스 목사가 CGN TV에서 ‘갭 이론’(Gap Theory)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조지 바나 그룹의 통계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이론을 펼쳤다.
통계적으로 교회 주일예배에 100명이 참석한다면 그중 50명이 소그룹에 참여하고, 그 중 10명만이 제자화된다. 하지만 제자화 중심의 교회는 역으로 진행된다.
이 통계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주일예배 참석자 수 성장 곡선과 이후 제자화된 인원수의 성장 곡선 사이의 갭이다. 즉, 교회에 오는 이들의 수에 비해 제자화되는 사람의 숫자가 너무 적다는 것이 갭 이론의 핵심이다.
갭 이론에서 그 10명은 다시 제자화되지 못한 90명의 비헌신자들을 위한 사역에 투입된다. 이때 그 10명의 열정과 에너지는 제자화 사역이 아닌 다른 곳에 분산된다. 제자화 되기를 거부하는 90명의 미온적인 종교소비자들을 주일예배라는 헌금 근원지에 계속 담아내기 위해서 쓰인다.
그러면 결국 이 소수의 헌신자들은 회의를 느끼고 교회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된다. 그러면 교회는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오히려 한 영혼을 돌봐야 하지 않겠냐며 성경을 가지고(예를 들면, 마 18:13) 설득하려 든다. 그러면 재헌신을 하게 되고 처음부터 사이클이 다시 반복된다(기억하라. 마태복음 18장 13절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양 우리를 떠나 바깥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이 10명은 하나둘 교회를 떠나게 되고, 교회는 더욱 더 예수께 열정적인 ‘제자들’이 아닌 예수께 미적지근한 ‘종교소비자들’로 넘쳐나게 된다.
주일성수의 오용
교회가 제자들 대신 종교소비자들을 원하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 아니다. 아마도 그들이 돈과 명예를 주기 때문인 듯하다. 한자리에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면 메가처치 현상을 추종하는 사회에서는 그 리더십에게 종교적 명예를 안긴다. 또한 많은 사람이 모이면 헌금의 합이 더욱 커진다.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거룩한 전통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자화보다 더 강조하는 것은 전통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마 12:8). 주일성수는 응급처치를 위한 수단일 수 없다. 더 많은 사람이 주일예배에 모여야 더 많은 헌금이 모인다. 그래야 더 많은 미적지근한 행사들을 진행할 수 있다(실제로 관계를 통한 제자화에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필요하지 않다). 그래야 더 많은 미적지근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갭 이론에서 말하는 헌신적인 10명은 고작 그 미지근한 생산품을 생산, 유지하기 위해 쓰고 버려지는 일종의 교회공장 소모품들로 전락한다.
뜨거운 소수의 개별 제자화 사역에 자유를 달라
응급처치 접근은 갭 이론에서 보여주는 어색한 모습 속에서 소수의 뜨거운 사역자들을 미온적인 사역에 낭비하게 만든다. 실제로 이 강의를 들은 한 목사님이 내게 반문했다.
“제가 리더로서 응급처치 접근을 버린다면 아마 당장 교인의 절반 이상이 주일성수를 안 하게 되지 않을까요?”
나는 대답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미지근한 분들이 떠나시면 전체 양은 줄어도 온도는 더 올라가지 않을까요?”
진짜가 남아 진짜를 위한 진짜 사역을 하도록 조직 문화를 바꿔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응급처치가 필요한 사람은 당연히 돌봐야 한다. 하지만 응급실이 병원 전체보다 더 커지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응급처치를 위한 새소리
최근 벌어진 실화 하나를 각색해서 소개하며 응급처치 이야기를 마치려고 한다. 최근 한 대형교회에서 4주 시리즈 설교를 했다. 설교 주제는 “한국의 희귀한 새들”이었다. 강대상에 4주간 선 설교자는 유명한 조류학자였다.
그는 매우 신기한 새소리를 매주 새롭게 들려주었다. 그 과정에서 제자화를 원했던 소수의 사람들은 교회 리더십에게서 미적지근한 사람들을 독려하여 새소리를 듣고 헌금을 내게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새소리 시리즈 설교 후, 그들 대부분이 번아웃 상태에 빠졌다.
사역이 힘들어서라기보다 의미가 없어서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대했지만 새소리만 들어야 했고, 그 일에 자신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써야 했던 10퍼센트의 평신도 사역자들은 회의감에 빠졌다. 그러나 종교서비스를 바라는 90퍼센트의 성도들은 예배 중에 새소리를 들어서 좋았다.
그들에게 새소리라는 응급처치를 했던 리더들도 그들이 만족스러워하니 기분이 좋았다. 의미 없는 사역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은 고작 10퍼센트였고, 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복음 대신 편안한 새소리를 들은 것을 좋아했다. 헌금도 더 많아졌고, 새소리도 더 많아졌다. 좋았다.
이미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제자화를 막아선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미 제자화에 대해 알고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진짜 그럴까? 진짜 다 알고 있을까?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기독교 인구는 860만 명이 조금 넘는다. 편의를 위해 전체 인구를 5천만 명, 기독교 인구를 1천만 명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우리나라 인구 4천만 명이 예수님을 모른다.
게다가 갭 이론대로 100명 중 10명 미만 정도만 제자화된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800만 명에 육박하는 숫자가 아직 제자화 되지 않은 채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 된다.
세상에 나가면 5명 중 4명이 예수님을 모르고, 교회에 들어오면 10명 중 9명이 제자화를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까?
전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교회가 전도하지 않고, 기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교회가 기도하지 않고, 말씀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교회가 말씀연구를 하지 않는 것처럼, 제자화를 강조하는 교회가 제자화를 하지 않는다. 안다고 생각하니 더 문제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제자화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이 왜 문제인가
모르면 배우려고나 할 텐데, 안다고 생각하니 배울 수도 없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을 듣는다. 제자화하기 싫은 사람은 제자화를 하지 않는 상태에 대한 변명을 만들고 합리화한다.
그중 최고의 변명은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어’라는 생각이 “나는 이미 하고 있어”라는 말로 들린다. 합리화다. 제자화에 대해 읽은 책 몇 권과 제자화에 대한 설교 몇편으로 합리화한다. 그러면 제자화하지 않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모든 삐걱거리는 교회 문제들에 무감각해진다.
‘나는 제자화를 이미 알고 있으니 제자화가 문제일 리는 없어!’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죄성까지 만나서 제자화를 제쳐놓고 사역의 문제들을 해결해보려고 한다.
제자화하지 않으면 어떤 교회 모임이든 썩는다. 그런데 그 썩어가는 얽힌 상태를 제자화는 배제한 채 풀어보려고 한다. 안다는 생각 때문에. 제자화를 하려면 소수의 사람을 향해, 사랑을, 시간에 버무려, 죽기까지 쏟아부어야 한다. 그러다 겨우 제자가 탄생하면 다 위임하고 떠나야 한다.
예수님이, 사도들이,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그랬다. 예수님의 제자화 사역은 성경에 나온다. 성경을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제자화가 예수님의 것과 비교된다. 기준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기준이다.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그분을 따라 제자화하는 것이 기준이다. 인간 목자들 간의 상대평가는 없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절대평가뿐이다.
아는 것은 실행을 통해 증명된다. 실행은 아는 것을 반증한다. 진짜 알면 한다. 하지 않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반대가 있어도 지속하라
나는 장로교 목사라 성결교 선배들을 잘 몰랐다. 하지만 최근 한 분을 알게 되었다. 남해의 증도에 가족여행을 다녀오면서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의 묘비 앞에 서서 한없이 울었다.
한 번에 한 명의 제자를 얻고 키우기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 증도의 수많은 섬과 마을을 조각배를 타고 자비량으로 찾아다녔던 분. 제자들을 키워 각 섬의 제자화를 위임하고 떠났던 선배.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인근 섬들 대부분의 주민들을 복음화한 자랑스러운 신앙의 유산.
백문일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임을 내 뼈에 깊이 새겨주셨던 김준곤 목사님도 문 전도사님에게서 복음을 들었다고 하셨다.
제자의 제자가 또 제자를 낳고, 그 제자가 또 교회가 되는 제자화는 사람을 통해 사람에게, 사랑을 통해 사회에게,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진행되었다.
나도 너도 누군가의 제자화의 결과물이다. 멈추면 안 된다. 피가 서리고 땀이 서린 천국 일이다. 포기하면 안 된다. 생명을 버리며 우릴 낳아주신 선배들이 구름같이 허다하다.
힘이 드는가? 세속에서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제자화를 반대해서 힘이 드는가? 힘들다고 안 할 것인가? 힘들다고 세속화될 것인가?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끝까지 가라(도서출판 규장)>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송준기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목사.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을 통해 순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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