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브(Slave)’는 노예라는 뜻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노예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노예 매매제도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 때문일 수 있다. 또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일반화된 시대와 사회에서 누구도 누구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존 맥아더는 ‘슬레이브(부제: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정체성에 관한 숨겨진 진실)’에서 둘로스(doulos)라는 헬라어 어원을 통해 복음을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영어번역 성경은 둘로스(doulos-노예를 묘사하거나 노예에 상응하는 태도를 묘사하기 위해 쓴 단어)를 거의 종(servant)이라는 단어로 대치했다.
종은 고용된 직임, 노예는 소유된 존재의 신분
그러나 둘로스는 헬라어 원본에 나오는 종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다르다. 종이 고용된 직임의 관계라면 노예는 소유된 존재의 신분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노예는 ‘어떤 신분이다’라고 명명할 수도 없는 전적으로 주인의 소유물, 물건과 동일한 대상이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성경 구절의 의미는 정서상 너무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스도가 계셨던 1세기의 로마 노예법을 생각해 보자. 주의 종이라는 문구보다 주의 노예라는 문구가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복음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친구, 동료가 되라는 초청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그분의 노예가 되라는 명령이다. 노예는 그의 삶이 전적으로 주인에게 속한 사람이다. 절대 주권, 절대 통제, 절대 복종, 충성, 의존 등은 노예 스스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그에게 속한 존재로서 갖는 의무의 항목일 뿐이다.
‘슬레이브’를 통해 저자는 역사 속에서 노예들의 지위와 삶, 노예제도를 통해 노예의 정체성을 풀어나간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이 진리를 깨달았던 교회 역사속의 고백을 통해 퀴리오스(kyrios, 주님) 둘로스(노예)된 주종관계를 설명하고, 교회의 머리일 뿐 아니라 개인의 구주인 그리스도의 구속을 풀어내고 있다.
1세기 노예제도와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주인의 노예에 대한전적인 소유권, 노예의 주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오직 헌신, 전적 의존, 개인적 책무이다. 그 외에도 보통 노예가 할 일은 정확한 명령이 있으면 순종하면 되고, 직접적인 명령이 없을 때 주인을 기쁘게 하실 만한 것을 찾아서 하면 되는 것이었다. 순종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이 노예의 본분이었다. 어떻게 죄인 된 나에게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속하여 오직 복종할뿐더러, 모든 것을 의존하고 사는 그 삶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기 이전에 내가 완전한 죄의 노예상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노예는 주인에 대해 무조건 복종해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6,17,18)
이것이 십자가가 이뤄놓은 역설이자 진리였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가 의의 노예로 주인이 바뀌는 것이었다.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몸을 주고 나를 사셨고, 그의 전부로 나를 소유하셨다. 이제 나는 그에게 헌신해야하고, 오직 그 한분께만 그래야 한다. 그에게 언제나 순종하기 위해 나는 그의 의지 외에는 다른 뜻이 없어야 한다. 그는 나의 주이시고, 나는 그의 노예이다. 그리스도의 노예 된 우리에게 이 신분은 역설적이게도 완전한 자유의 선포이다!! 그리스도의 노예 됨으로 얻게 되는 이 자유는 결코 부담이나 무거운 짐이 될 수 없었다. 주님의 쉽고 가벼운 멍에와 짐을 지고 쉬는 것이다. 마치 노예에서 양자된 아들과 같이!
기꺼이 하나님의 노예인 것을 인정하고 주인이신 그 분으로만 설명되길 원하는가?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이 자유를 더욱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삶으로 드리겠는가? 아멘이다!
(존 맥아더 저 | 208쪽 | 국제제자훈련원 | 값 11,000원)
이수정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