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벗어나려는 美 협력자 등 탈출 행렬…목숨 걸고 10여개국, 2만5천㎞ 이동
미국 도착해도 ‘추방 대상’…NYT “아프간 철군·국경문제 등 美 정책 위기 상징”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과 카타르를 거쳐 바다 건너 남미 브라질로…다시 페루, 콜롬비아, 파나마, 니카라과, 멕시코-미국 국경까지.
2021년 미국의 갑작스러운 철군으로 탈레반 세상이 된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현지 조력자 등 아프간인들이 미국을 향해 중동과 대서양, 남미 정글을 거치는 장장 2만5천㎞ 이상의 ‘목숨 건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아프간인 여성 탈리바는 민주주의 아프가니스탄을 꿈꾸며 살아왔다. 법학을 공부한 그는 여성권을 다루는 정부 고위 관료로서 아프간 여성을 폭력으로부터 지키는 일을 해 왔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탈리바가 발로 뛰며 증거를 확보해 감옥에 보낸 성폭행·학대 가해자들은 혼란 속에 풀려났다. 여러 여성의 생명을 구한 탈리바는 한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그는 남편 알리, 두 살배기 아들과 함께 6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대부분 그간 그가 협력해 온 국가였고, 미국의 난민 프로그램은 자격까지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답신은 오지 않았다.
결국 탈리바 가족은 직접 미국에 ‘걸어가는’ 아프간인 행렬에 합류했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장악한 것은 2021년 8월의 일이다. 미국은 20년을 끈 전쟁을 끝내고 철수하면서 아프간인 12만4천명을 대피시키는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인도적인 최대 규모 작전’을 펼쳤다고 자부했지만, 미국을 도운 아프간인 가운데 남겨진 사람도 적지 않았다.
미군 철수 후 화물차나 배를 얻어 타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향한 아프간인은 수천명에 달한다. 유엔은 카불 함락 후 피난처를 찾다 숨진 아프간인이 1천250명 이상이라고 밝힌 바 있다.
NYT는 작년 초부터 현재까지 탈리바처럼 미국 국경으로 가기 위해 목숨 건 여정 끝에 파나마에 당도한 아프간인이 최소 3천600명이라는 파나마 통계를 인용하며 이들 중 상당수가 서방에 협력한 변호사나 인권운동가, 아프간 정부·군 관계자라고 설명했다.
탈리바와 함께 이동한 54명 가운데는 의사도, K-팝과 방탄소년단(BTS)을 좋아하는 20세 여성도 있었다.
10여개국을 거치는 여정은 위험천만하다. 곳곳에서 강도와 약탈, 납치, 수감 상황이 발생하고, 브로커를 통해 이미 국경을 통과했는데 다른 브로커의 개입으로 도로 쫓겨나는 경우도 있다. 부모와 자녀가 헤어지거나 도중에 아기가 태어나는 일 역시 다반사다.
미국행을 택한 상당수 아프간인은 우선 파키스탄과 카타르를 거쳐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 건너 브라질로 간다. 브라질에선 아프간인을 위한 인도주의 비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브로커 비용은 여기에서부터 눈덩이처럼 불어나 1인당 1만달러(약 1천300만원)를 웃돌게 된다.
가장 힘든 구간은 불개미와 뱀, 강도가 득실대는 ‘다리엔 갭’ 정글 지대다. 남미 콜롬비아와 중미의 파나마를 잇는 이 지역은 예전부터 남미에서 미국 국경을 향해 북상하는 이주민들이 자주 거치고 목숨을 많이 잃은 곳으로 꼽힌다.
이렇게 위험한 곳이지만 코로나19 대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최근 다리엔 갭을 찾는 미국 밀입국자는 계속 느는 추세다.
2010∼2020년 다리엔 갭을 건넌 사람은 연평균 1만1천명 미만이었는데 올해는 40만명가량이 이 경로를 따라 미국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고 현지 관계자는 밝혔다.
사람들의 국적도 원래는 베네수엘라·아이티·에콰도르 중심이었으나 최근엔 중국·인도·나이지리아·소말리아 등 세계 각국으로 다양해졌고, 틱톡·페이스북 등에 밀입국 광고를 하는 브로커도 늘었다.
탈리바가 속한 54명의 행렬은 파나마를 지나며 뿔뿔이 흩어졌다. 탈리바는 가족과 함께 버스를 타고 코스타리카를 통과한 뒤 몇 시간을 걸어 니카라과로 가는 차를 찾았다. 온두라스에서는 경찰에게 뇌물을 줘야 했고 과테말라 숲을 지나서는 브로커에게 다시 돈을 내고 버스에서 배로, 트럭으로 옮겨 다니며 멕시코에 간신히 도착했다. 그 사이 아기의 체중은 15% 줄었다.
브로커를 따라 멕시코-미국 국경에서 추운 하룻밤을 지새운 탈리바는 곧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에 붙잡혔다.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미국의 ‘환영 인사’가 구류였던 것이다.
탈리바 일행은 곧장 망명 신청을 원했지만, 미국 정부는 이들이 추방 대상인 ‘미국 체류 외국인’이라는 문서를 나눠줬다.
추방 여부를 결정할 법원 심리는 2025년 6월 말 보스턴에서 열릴 예정이다. 망명을 신청하려면 직접 절차를 밟거나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데, 망명이 될 때까지 정식 직업을 가질 수 없어 탈리바의 앞날은 미국에서도 험난할 수밖에 없다. 다른 가족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21년 이후 미국에 도착한 아프간인 협력자 등 가운데 특별 비자를 받거나 난민 지위가 인정된 사람은 2만5천명에 못 미친다. 인도주의적 임시 입국 허가를 신청한 아프간인은 5만2천명가량이지만 지금까지 760명만 미국의 승인이 떨어졌다.
NYT는 “이들의 여정은 아프간 철수와 미국 국경을 넘는 기록적인 숫자의 이민자라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두 가지 최대 정책적 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며 “많은 미국인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머나먼 전쟁의 후유증이 대통령 집무실 문 앞에 당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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