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스러운 목사는 사람들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 이용한다. 그리고 그런 탐욕 중에서 성적 학대는 특히나 끔찍한 것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을, 특히 목사를 믿을 수 있을까요?”
최근 디모데후서 2장을 함께 공부하다가 마음이 여린 한 자매가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가 거짓 교사들의 위험과 부겔로와 허모게네[딤후 1:15], 데마[딤후 4:10] 같은 지도자의 배교를 토론하던 참이었다. 자매의 표정이 몹시 난감해 보였다.
최근에 남침례교단(SBC) 내부의 학대·부패·은폐 진상 보고서가 공개된 터라, 자매의 질문에 다른 사람들도 다들 공감했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양 떼를 보살펴야 할 목사들이 오히려 양 떼를 해치는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끔찍하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설사 그러한 위선자들에게 직접이든 간접이든 상처를 입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는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교회에 거는 우리의 신뢰도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아홉 가지 경고 신호
우리는 지도자 전부를 의심하는 태도를 갖는 대신에 분별력을 기르고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정신을 빠짝 차려야 한다(벧전 5:8; 요일 4:1).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이는 목회자라고 모두 학대를 일삼는 늑대는 아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부(副)목자들(undershepherds)도 역시 자신의 잘못과 약점 때문에 고뇌하고 씨름하는 양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이 목회자의 됨됨이를 형성하는 정도라면, 그때는 심각한 우려와 엄정한 조치가 따라야 한다.
1. 고립되어 있다
목자를 양 떼가 알 수 있어야 한다. 강단에 서는 것은 목사의 책임 중 작은 일부일 뿐이다. 교인들이 목사의 삶이 어떠한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면, 교인들은 목사의 삶을 파악할 수 없고, 또 목사의 믿음도 본받을 수 없다(히 13:7).
위험한 목사는 지켜보는 눈을 피하려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죄는 그런 고립 속에서 몸집을 키운다. 목사의 삶은 지켜보는 눈에 열려 있어야 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목사도 하나님과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교인이 목사와 친밀하고 개인적인 우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목사가 경건하고 성숙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야 함은 분명하며, 목사는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누구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목사는 매우 의심스럽다.
2. 무책임하다
믿을 수 있는 목사는 책임을 강조한다. 경건한 복음사역의 파트너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목사는 모든 종류의 악에 취약하다.
혼자서 이끄는 목회자는 강압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한다. 따라서 가능하면 자질을 갖춘 복수의 장로들로 이루어진 회를 조직해야 한다. 함께하는 동료가 적어도 괜찮을 때나 상황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요점은 반드시 다수여야 한다는 것보다는 어떤 자세가 요구되느냐에 관한 것이다. 함께하는 동역자 없이 혼자서라도 목자는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를 죄로부터 보호하시려는 이유를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이와 같은 책임 구조를 내장하도록 교회를 설계하셨다. 그래서 함께 책임을 지는 구조에 있는 동료 목사들이나 친구들은 “예스 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비판을 꺼려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들은 담임 목사를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게 만드는(딤전 3:1-7) 용감한 사랑을 그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목사인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를 지지하고 격려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지만, 그들의 무언의 행동이 성경적 사랑에서 편향된 충성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3. 방어적이다
위의 논의를 이어가자면, 경건한 목사들은 교인들이 피드백을 하고, 함께 걱정하고, 목사가 충실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도록 장려할 것이다.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방어하려 드는 목사를 경계하라. 비판이 대역죄 취급하는 교회는 목사에게도, 목사의 보살핌을 받는 교인들에게도 영적으로 안전한 환경이 못 된다.
예를 들어, 이건 내가 확신하는 것인데, 목사의 강단 사역을 점검하는 어떤 공식 장치가 있는 교회라면, 그 목사는 이를 통해 겸손한 자세를 견고히 유지할 수 있고 또한 방어적인 자세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직원 모임이나 장로 모임, 아니면 별도로 정한 “예배 리뷰” 시간을 통해서도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 환경이 어떠하든 핑계대지 말고, 반드시 목사는 바로잡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날마다 성장하도록 힘써야 하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4. 권리를 주장한다
예수님을 섬기는 일을 크나큰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하는 목사가 있다. 이런 목사는 특별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나는 교인들이 그들의 목사가 그들을 위해 아주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목사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던 한 교회를 알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 목사는 그동안 자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양을 이용하고 욕망을 채우는 은밀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교인들의 삶에 선한 영향력도, 그리고 악한 영향력도 크게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는 권리를 주장할 게 아니라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원해야 한다. 목사는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선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고 있는 바로 그 교인들에게 자신이 잘못되거나 잘못했을 때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권한을 주고 또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
내가 주님께 불충하는 데도 나를 쫓아내지 않을 그런 교회라면 나는 절대로 목회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우리 교회 앞에서 종종 이야기한다. 그리고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에게 감명 받지 않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필요하다고. 이것은 목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5. 욕심이 많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목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넉넉히 베푼다. 감사하지 못하는 목사의 특징은 욕심이다. 이 욕심은 돈, 힘, 관심, 또는 인정을 획득하려는 욕구로 나타날 수 있다.
탐욕스러운 목사는 사람들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 이용한다. 그리고 그런 탐욕 중에서 성적 학대는 특히나 끔찍한 것이다. 학대하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자기만족에 신경을 쓴다. 그들은 자신의 필요가 충족된다면 누가 다치든 상관하지 않는 거머리 같은 족속이다(잠 30:15). 최근에 공개된 SBC 목회자 학대 보고서는 섹스와 권력에 굶주려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면서 그 겉모습을 내보이려는(딤후 3:5) 남자들의 썩은 열매로 가득 차 있다. 바로 이런 것이 탐욕의 죄다.
6. 통제한다
한번은 어떤 목사가 “내가 책임자니까 내 방식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놀랍게도 그 교인들은 “아멘!”이라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지배력을 행사하는 목사는 성경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켜 자기 뜻에 복종하게 한다.
통제하려 드는 사람이 모두 사악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감언이설로 취약한 사람들을 조종하고 통제한다. 이런 포식자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체하지만, 그가 늘어놓는 미사여구에는 속셈이 따로 있다. 이것은 자기가 보살피고 있는 사람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사람이 흔히 사용하는 전술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어려운 시기에 필요한 용기 있는 리더십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목사가 이러한 리더십을 발휘할 때마다 경고 신호를 울린다면, 그것은 합당한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리더십이 부드러움과 겸손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7. 냉담하다
목사가 죄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부도덕한 일을 농담거리쯤으로 얘기하고 있는가? 어떤 죄에 집착하고, 다른 죄들은 가볍게 여기는가? 전 세계의 아젠다가 되어 있는 학대 사건들을 부정하는가?
여성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여성들은 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식으로, 남성우월주의 시각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 안에 있는 자매들, 특히 강한 자매들을 얕보는가?
과부, 고아, 소수자, 외국인 같은 취약계층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또 어떤 식으로 관심을 보이는가?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또 그런 사람들에 관하여 말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온유하고 온화하게 대하는가(딤후 2:24-26), 아니면 얕잡아 보고 거칠게 대하는가?
공감능력과 친절의 결여는 눈에 띄는 경고 신호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항목들 중 어느 것을 올바로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즉시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인가?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이 아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에서 실족한다. 그러나 성령이 빚어주시는 확신이나 경건한 책망에 대한 감수성의 결여는 명백히 문제가 있다는 신호다.
8. 패거리 짓는다
SBC 학대 보고서에서 가장 기괴한 면의 하나는 힘 있는 사람들이―희생자들을 비난하고―자기네끼리 서로 보호했다는 사실이다. 시종일관 그들은 복음의 사역을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기네 부족(tribe)을 진리의 유일한 수호자로 여기는 목사들은 그들의 담장 너머에서 제기되는 반드시 필요한 교정 요구를 묵살한다.
그들의 부족을 진리의 수호자로 보는 목사들은 그들의 성벽 밖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교정조치에 저항할 것이다. 통계와 재무 보고서를 성공의 증거로 들이대는 사람들은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거나 외부 기관에 학대 사실을 보고하는 걸 선교에 위협이 된다며 거부한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선교를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자기가 속한 부족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에서 유쾌한 친교를 나누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자기가 속한 부족을 맹목적으로 변호한다면, 이는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9. 균형 잡히지 않은 복음
성화를 요구하지 않는 칭의 메시지는 불완전하다(갈 1:4; 히 12:14). 목회자가 전도나 칭의에만 치중하고 경건의 추구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면,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를 미워하라고(롬 12:9), 죄에서 벗어나라고(딤후 2:22), 그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라고(마 5:8) 명하신다. 교인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고 촉구하지 않는 걸 피하는 목사―또는 단순히 외적인 ‘거룩함’(예를 들어, 술 마시면 안 된다, 춤추면 안 된다, 요가바지 입으면 안 된다)에 안주하는 목사―는 편파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실상은, 숨겨 놓은 죄에 그의 양심이 가책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명백한 명령을 회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목사를 포기하지 말라
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목사는 위험하다. 그런 목사는 심각한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나 경건한 목사는 도움과 치유와 희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도구 중 하나이다.
다시 말하건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품을 불완전하게 발하는 충성된 부목자들을 통하여서도 그의 양 떼를 돌보신다(고전 11:1). 충성된 목자들이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처럼 그들은 폭력이 아니라 온유함을 뿜어낸다(벧전 5:3). 예수님처럼 그들은 분노가 아니라 인내심을 보여준다(딛 1:7). 예수님처럼 그들은 교만이 아니라 겸손의 본이 된다(벧전 5:5-6). 예수님처럼 그들은 탐욕이 아니라 넉넉한 마음을 온몸으로 실천한다(딤전 3:3).
충성된 목사 찾기는 꼭 해야 할 일이다. 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신뢰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과 맹목적 믿음은 전혀 다르다. 신뢰는 획득하는 것이다. 교회에 속하기 전에 먼저 목사를 알아보라.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기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확실한 목사를 따르라(고전 11:1; 살전 2:10).
물론, 예수님을 신뢰하고 분별력을 발휘하고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한다고 해도 여전히 목사에게 상처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당신의 이야기라면, 당신을 학대하는 목사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명심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이 충성된 목사의 돌봄을 받으며 신뢰를 회복하도록 도우실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결코 거짓말 하지 않으시는, 결코 착취하지 않으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언제나 성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그리고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시는―하나님께서는 남은 무리와, 곧 자신의 욕망에도, 세상의 우상에도 무릎 꿇지 않은 많은 사람들과 항상 함께하심을(왕상 19:18)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그분께 맡김으로써 그분을 신뢰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남은 자들을 신뢰함으로써 그분께 맡기는 우리의 신뢰를 여실히 보여준다.
집으로 가는 양떼의 여정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걸음을 주께서 돌보신다. [복음기도신문]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품을 불완전하게 발하는 충성된 부목자들을 통하여서도 그의 양 떼를 돌보신다
가렛 켈 (Garrett Kell) | Dallas Theological Seminary(ThM)를 졸업하고,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Del Ray Baptist Church의 선임목사와 TGC의 이사로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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