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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사회정의(5): 사회정의의 부당성

실용적이고 유행에 민감한 복음주의자들이 얽매이기 쉬운 죄는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잊은 채, 믿지 않는 세상에서 유행과 논란거리를 사용해왔다는 것이다. 확실히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이 세상 지혜가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라(고전 3:19)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 같다. 사실상 세상의 문화, 즉 대중문화의 이론이나 이데올로기가 접목되어 건강한 성경적 언어를 희미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현상은 그럴듯한 문자들로 대체될 것이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20세기 중반의 복음주의자들이 긍정적인 생각, 자긍심 그리고 “크리스천 심리학”에 수십 년 간 집착하게 되었다. 그 후에는, 이러한 전략들을 내세워 홍보했다 . 이러한 현상은 21세기 초반까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명명이 되었고, 이는 이내 신흥 교회 운동(Emerging Church movement)으로 재포장 되어 공격적인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비판적 인종 이론, 남녀평등 주의, 교차성 이론, 성 소수자 옹호, 진보 이민정책, 동물의 권리 그리고 그 밖의 좌파적 정치 명분은 “사회 정의(Social Justice)”라는 이름 아래 복음주의 교회에 침투하기 위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물론, 현재 “사회 정의”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든 복음주의 지도자가 이에 대한 모든 측면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최소한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온갖 비정상적인 생활 방식과 이념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세속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 피해자 의식(victimhood)과 억압(oppression) – 미사 여구와 대의 명분을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자신이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효과적으로 “사회 정의”에 대한 감정적 호소를 이용할 수 있다.

실제로 “사회 정의”에 관한 미사여구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통용되기 시작하면서 세상에서 정치적으로 정당하다 여기는 모든 명분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지속해서 가속화되고 있다. 사회 정의 운동이 모든 복음주의 신념에 위협을 내포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사회 정의”의 의미를 좀처럼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아마 그 용어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세상의 학교에서 정확한 정의를 내린다고 했을 때, 아마 많은 지지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수많은 비평가가 “사회 정의”라는 미사여구는 순(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포함해 그람시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지적해 왔다. 수십 년간 정치에 관한 약칭인 “사회 정의”는 균등한 부의 분배, 혜택, 특권 그리고 이익을 요구하려는 방법으로 급진 좌파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

이 사회 정의에 대한 수사학적 효과는 매우 크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의 사회 정의 지지자들은 법에 의한 기회 균등과 평등한 대우가 오늘날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평등한 결과와 지위 그리고 부를 소유할 때까지는 사회 정의가 온전히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는 또한 소득의 비교, 인종적 제한, 그리고 통계가 시사하는 그 밖의 것들 – 예를 들어 남성 과두제(寡頭制)에 의한 조직적 억압과 STEM 분야(과학, 기술, 공학 그리고 수학)의 직업을 추구하는 여성들의 부족 – 에 대한 소식이 지속적으로 들려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이념에 맞는 사회를 재구성하기 위해 이들은 먼저 기존의 사회적 규범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 이유로 여러 민족 간의 적개심이나 계급 투쟁, 민족 분쟁이나 성별 간의 긴장 그리고 다른 분쟁을 조장하려 노력한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그 밖의 과격파이거나 그러한 성격을 띄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며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 모던의 “사회 정의”라는 미사 여구와의 관계는 확실한 근거가 있고 또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사회 정의라는 명목으로 현재 유행하고 있는 이러한 운동을 성경의 조명 아래 세심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 만이 참된 정의다

성경은 정의(justice)에 대해 많이 이야기 한다. ESV버전은 이 단어를 130회 사용한다. 그리고, 에스겔서 18:8이 말하는 “진실(true justice)” 외에는 형용사 뒤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소유격 대명사와 가끔 병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내 공의”에 대해 성경에서 두 번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하는 기도(시편) 중 두 번 “주의 의” 라는 표현을 하신다.

요점은 다른 “정의”가 없다는 것이다. 참된 정의는 하나님 그분 자신에 의해 명시되고 항상 그분의 성품과 일치하는 정의로서 오직 하나이다.

성경이 자비로운 정의의 측면을 많이 다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모든 이를 향한 온정, 다시 말해 불우한 이를 향한 긍휼함, 고아와 과부를 도와줌, 나그네를 사랑함, 궁핍한 자를 보살핌, 특히 빈곤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함(신명기 10:18, 시편 140:2, 에스겔 22:29) 말이다.

그러나 성경적 정의는 특권층과 공평을 유지하기 위해 가난하거나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에 대한, 즉 한쪽으로만 치우친 편애를 가르치지 않는다. 결국, 실제로 성경은 그러한 사고방식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다 (출23:3; 레19:15).

성경에서의 정의는 공평과 공의라는 단어와 자주 병행된다. 공평이란 모든 사람을 법 앞에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의미다. 공의란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바와 일치한다는 뜻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징계(렘 5:26-29), 통치 권한에 대한 순종(롬 13:1-7), 범죄에 적합한 처벌과 편향(偏向)됨이 없는 적용(신 24:17-22)을 가리킨다. 그리고 또한, 일에 대한 철저한 윤리 의식, 일하기를 거부하는 신체 건강한 사람은 공공 자선의 혜택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강화된 원칙말이다 (데전 4:11, 데후 3:10).

참된 정의의 이러한 측면들은 최근 “사회 정의” 를 극찬하는 복음주의자들의 대화에서는 두드러지게 결여되어 있다. 대신에 우리가 듣는 것은 세속적 사회 정의의 용사들이 외쳐대는 것과 같은 좋지 않은 발언과 정치적 구호의 메아리다. 이 잘못된 사회 정의에 관한 사실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깨달아 분별해야 한다.

복음의 확대

더욱 걱정되는 것은 어떠한 “성명서”이다. 이 성명서가 말하는 것은 사회 정의를 옹호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불완전한 복음을 설교하고 있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사회 정의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말한다. 킹스 칼리지의 종교와 신학 연구 부문 학장인 안토니 브래들리는 최근 이러한 메시지를 게시했다.

“이것이 문제다(가혹하게 들리겠지만). 흑인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을 전혀 모른다. 교리와 인종이라는 책을 읽어보라. 그렇다면 이것이 실제 질문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언제 처음으로 이 제대로 된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견해를 월터 라우센부쉬와 사회 복음에 비교하면 어김없이 화를 낸다. 그러나 그들의 논쟁법과 수사법은 라우센부쉬와 대부분 동일하다. 라우센부쉬는 20세기 초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며 “사회 복음의 신학”이라는 책의 저자다. 그는 크리스천들이 개인의 죄들 뿐 아니라 “사회 집단의 죄들”에 대하여 회개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쳤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적 사회정의의 옹호자들과 동일하게 라우센부쉬는 그 어떠한 중요한 복음의 진리도 저버릴 계획이 전혀 없음을 주장했다. (처음에는) 그는 단지 개인의 죄에 대한 문제와 구원을 포함한 사회적 악을 다루기 위해 복음의 초점을 넓히고 싶어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라우센부쉬는 이러한 말을 한다.

“공적 악폐는 인류의 사회 생활에 너무도 만연해 있어서 그 누구도 이러한 집단의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는 일반적인 삶을 공유할 수 없다. 예수님은 사실 B.C. 56년,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한 어떤 고대 영국인의 죄나 A.D. 1917, 술 취한 테네시의 어떤 등산객의 죄를 감당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실상 조직사회의 공공의 죄의 짐을 감당하셨으며 그것들은 모든 개인의 죄와 일치하는 인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미국에서 주류를 이루는 몇몇의 가장 큰 개신교 교파는 라우센부쉬의 이러한 사상을 열심히 흡수했다. 모든 것은 그들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모든 헌신을 버리는 동시에 빠른 속도로 자유주의로 흘러갔다. 그때는 이미 그들은 복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문화나 정치적 이념, 여론 또는 그 밖에 성경 외부의 출처에 기인한 “정의”를 명명하는 자들은 곧 그들의 생각과 성경이 정반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왜곡된 개념의 정의를 유지하기로 확정했다면 그들은 성경에 맞서 반대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복음의 범위를 넓히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너무도 멀리 복음의 초점에서 벗어나 실제 메시지를 잃게 될 것이다.

사회 정의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로부터 시선을 돌린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위에 있는 것들로부터 이 땅에 있는 것들로 바꾼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의 악행에 의한 불행한 피해자라고 말함으로써 절망적인 죄인들을 위한 용서의 약속, 즉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 대신에 육체의 일을 권장하는 것이다.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 하지 말지니라.

크리스천들은 절대 성내거나 원망하거나 탐내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란 다른 쪽 뺨을 대어 주고,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그리스도의 발자취가 그 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 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원수 맺는 것, 투기, 다툼, 시기, 분냄, 분쟁, 분열, 이단, 적개심, 불화, 반감, 교만, 원한, 복수 그리고 분노와 비슷한 모든 태도는 스스로를 몰락시키는 육체의 일이다. 성령님이 맺으시는 유익의 열매는 이와 정반대의 태도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충성, 온유, 절제” NIV성경은 고린도전서 13:5을 이렇게 번역한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솔직히 수사적(修辞的) 기교로 사회 정의를 옹호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부족한 점들이다.

자비를 베풀며 정의를 행하는 것(세상적 대체물이 아닌 성경적 정의(正義)를 말함)과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은 모두 매우 중요한 덕목 사항이다. 그것들은 모든 성도의 가장 주된 실제적 의무다(미 6:8). 우리가 불의(不義)의 피해자라는 끊임없는 불평을 하며 다른 사람들의 죄를 판단하는 가운데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영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한 태도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팔복에서 이름 지어진 크리스천의 품성들, 베드로후서 1:5-7에서 설명된 덕목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열거된 사랑의 특성들인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자. 그러한 정의로운 품성들을 생략하거나 최소화하는 모든 도덕적 공평성의 개념(세상에서 정의하는)은 “정의”라고 불릴 권리가 전혀 없다. [복음기도신문]

출처: https://www.gty.org/library/blog/B180907

존 맥아더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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