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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진정한 겸손을 추구하는 다섯 가지 방법

사진: Randy Jacob on unsplash

“ 복음이 빚어낸 겸손은 우리가 얼마나 악한지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

나는 최근에 그랜드 캐니언 방문이라는 비할 데 없는 기쁨을 누렸다. ‘방문’이 꼭 맞는 표현은 아니다. 알다시피 그랜드 캐니언은 단순히 방문하고 끝나는 곳이 아니니까. 그곳에 가는 사람은 예외 없이 감탄하고, 경외하고, 그 앞에서 숨을 고르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연의 장엄함에 사로잡혀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랜드 캐니언을 떠날 때 당신은 작아짐을 느끼는 동시에 커짐을 함께 느끼는 어떤 병치된 감정에 빠지게 되는데, 그런 경험은 그랜드 캐니언에 의해서 ‘캐니언되었다’(canyoned)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그랜드 캐니언과 같은 아름다움을 창조한 하나님이 내 영혼의 구주라는 사실에 매우 기뻤다.

복음이 만드는 겸손도 이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다. 복음은 우리를 더 작게 그러나 동시에 더 크게 느끼게 한다. 그러나 겸손에 대해서는 적절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겸손이라는 단어는 신중하게 정의되고 묘사되어야 하며 또한 정확하게 표시되고 구분되어야 하는데,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겸손에 관한 몇 가지 흔한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혼란을 주는 겸손

나는 몇몇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냥 벌레에 불과해.” 또는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저 빈 그릇일 뿐이니까.” 나는 이런 말이 겸손에 대한 건전한 견해를 반영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은 우리를 성도라고 부른다.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며,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아 구속되고 축복받았는지를 선포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은 결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와 일치할 수 없다.

겸손에 대해 혼동하긴 쉽다. 루이스(C.S. Lewis)가 새로운 유혹자를 훈련시키는 일을 맡은 고위직 악마 스크루테이프의 입에 어떤 지시를 담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네 환자가 겸손해졌어. 그로 하여금 그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들었어?… 마음이 정말로 가난해진 그 순간 마음 한구석에 은밀히 자리 잡는 만족스러운 느낌 말이야, “오우! 난 지금 완전히 겸손해졌어.”라고 외치는 그때를 정확하게 포착해야만 해. 그러는 순간에는 거의 즉시 교만이, 스스로의 겸손함에 감탄해 생기는 교만이 반드시 고개를 들거든. 그런데 그가 그런 위험마저 깨닫고 새로운 형태의 교만을 억누르려고 한다면, 바로 즉시 다음 단계에 돌입하는 거지. 교만을 누르려는 노력까지 하는 대단한 자신에 대한 또 다른 교만이 생기도록 말이야. 이런 과정은 여러 번 거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러나 너무 오래 하는 건 안 돼. 네가 그의 유머 감각을 깨우고, 또 더불어 어떤 반복성이 주는 공식 같은 것을 깨닫게 만들면, 그는 그냥 피식 웃으면서 잠자리에 들지 모르니까 말이야(스크루테이프 편지, 69).

겸손의 정의

메리암 웹스터(Merriam-Webster) 사전은 겸손을 “교만이나 오만으로부터의 자유”로 정의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정의는 우리에게 또 다른 정의를 필요로 하게 만든다. 교만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사전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이다.

나는 로마서 12:3에서 적용한 이런 정의를 제안하고 싶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따라서 겸손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게 되고,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모험은 평생 계속된다.

겸손의 묘사

겸손에 대한 명확한 생각은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가 쓴 짧은 고전, ‘겸손: 거룩함의 아름다움’(Humility: The Beauty of Holiness)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통찰로 글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겸손을 촉구하는 세 가지 큰 동기가 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피조물이며, 죄인이고, 성인이라는 사실이다”(10).

첫째, 우리는 내가 나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고, 내가 내 출생의 세부 사항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겸손해야 한다. 당신은 왜 1300년대에 어둡고 가난하고 질병에 휩싸인 마을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당신의 폐에 당신의 힘으로 공기를 주입할 수 있는가? 재능 중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계획에서 나온 게 있는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바울의 통찰력 있는 질문을 생각해 보라(고전 4:7).

둘째, 우리는 타락했기에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죄인, 반역자, 범법자, 거짓 신을 숭배하는 자이다. 바울이 구원 전 우리의 이력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 3:3).

셋째,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딛 3:5), 그리고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엡 2:9), 오로지 은혜로 구원받았다.

겸손의 드러남

겸손에 대한 핵심 구절은 빌립보서 2:1-11이고, 여기서 예수님은 겸손의 완전한 본보기로 소개된다. 5절이 그 중심에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를 적용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이 겸손하신 것 같이 나도 겸손해야 한다.” 그는 참으로 우리에게 최고의 모범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최고의 희생이셨기에 그 모범을 따를 수 있다. 이 장의 처음 구절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당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와 당신의 연합이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 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빌 2:1~4).

구분되는 겸손

겸손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복음이 드러내는 구체적인 내용을 떠난, 막연한 생각과는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겸손은 자신을 나쁘게 여기는 게 아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도 아니다. 겸손은 단순히 자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얼마든지 역겨울 정도로 나를 칭송하는 갖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

복음이 빚어낸 겸손은 우리가 얼마나 악한지,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그 둘 사이의 간격이 커질수록 우리는 더 단련을 받는다. 그런 거리는 놀랍게도 우리를 통회와 확신의 자리로 이끈다. 그런 간격을 느끼는 자리야말로 진정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적절하고 완전한 이해를 갖게 하는 장소가 된다. 나라는 존재에게는 은혜 대신 진노가, 칭의 대신 심판이, 그의 영이 내주하시는 대신 하나님과의 분리가 합당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오늘도 겸손한 담대함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

겸손의 추구

빌립보서 2:1-11 바로 다음에 나오는 내용에 유의하라. 12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여 계속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다. 겸손을 추구하는 일에서 우리에게는 해야 할 역할이 있다. 몇 가지 실용적인 제안을 소개한다.

육신의 기도

우리 몸의 위치는 우리의 기도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다. 무릎을 꿇고 중보기도하고, 팔을 들어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손바닥을 펴는 기도로 우리는 더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스스로 힘을 내는 것은 어렵기 마련이다.

엄격한 고백

C. S. 루이스의 입을 빌어서 말하겠다. 그는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에서 이렇게 썼다.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청한다고 생각할 때, 종종 나는 내가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을 원하고 있음을 알게 되곤 한다. 물론, 이건 내가 나 자신을 매우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는 한 알기 어렵다. 내가 간구하는 것은 나를 용서해 달라는 게 아니라, 나를 봐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용서와 봐주는 것(excusing)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용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넌 이런 짓을 했지. 나는 네 사과를 받아들인다. 앞으로 나는 이 문제를 다시는 네게 거론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둘 사이의 모든 것은 이전과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봐주는 것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보기에 넌 어쩔 수가 없었어. 그게 아니면 그런 짓을 한 게 네 진심은 아니었던 거지. 그러니까, 그게 진짜 네 잘못은 아니야.” 정말로 탓하지 않는다면 용서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와 봐주는 것은 사실상 완전 반대이다(178–79).

겸손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봐주는 게 아니라 용서해 달라고 정기적으로 구하는 습관을 만든다.

정기적인 금식

간단히 말해서, 단식은 우리를 육체적으로 약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공급하심만을 의지하기에 좋은 상태가 된다. 금식의 종류는 다양하다. 모든 금식의 형태가 다 겸손을 향한 성장에 도움이 된다.

외부를 향한 중보기도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일용할 양식”(물리적 생계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과 “나라가 임하시오며”(교회 성장의 가장 광범위한 범위)를 포함하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국가에서 복음이 더 전파되도록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오퍼레이션 월드(Operation World)는 각종 책과 앱을 통해서 우리의 중보기도가 더 큰 범위에서 일하며 동시에 겸손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타인 중심의 대화

말이 대화이지 많은 경우에 대화는 양쪽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독백으로 끝날 때가 많다. 복음으로 겸손하게 된 사람은 상대가 더 말하도록 대화를 이끌어 간다. 다른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끌어내기 위해 질문하는 것은 매우 실용적인 방법으로, 빌립보서 2장이 말하는 겸손을 드러내는 길이기도 하다.

고개 숙여 절하고 우뚝 서다

어떤 사람들은 그랜드 캐니언 앞에 서 있으면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거의 2,000제곱마일[길이 446km, 폭 6.4-29km]에 이르는, 1마일 깊이의 캐니언 골짜기가 고작해야 키 173센티미터인 내 몸을 왜소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온 우주의 창조주와 내 몸의 창조주를 알지 못했다면, 나는 분명히 나 자신을 미세먼지처럼 하찮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랜드 캐이언보다 훨씬 더 위대한 놀라움 앞에 나는 서 있다. 바로 십자가이다. “그리스도 안에 …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빌 2:1). 이런 십자가의 진리는 내 속에서 낮아지게 하는 동시에 우뚝 서도록 만드는 겸손함을 키운다. [복음기도신문]

“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은 결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와 일치할 수 없다 ”

랜디 뉴먼(Randy Newman)| 랜디 뉴먼은 Connection Points에서 예수님의 방식으로 사람을 키워내는 교사이자 저자이며, 또한 The C. S. Lewis Institute에서 교사로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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