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이아침 칼럼] 천국이 보여야

▲ 사진: unsplash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마가복음 4:10~20)

천국을 보면 이 땅에서 거뜬하게 살 수 있습니다. 거뜬하다는 것은 쉽고 가볍고 상쾌하다는 뜻입니다. 천국이 실제 되지 못했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거뜬하게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구원할 자’로 오셨다는 말씀과 상충돼 보이기도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하지만 주님의 마음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는 대상은 ‘외인’입니다. 이 외인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외인’의 범주를 알아야 합니다. 이 외인은 믿음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 예배당 안에 있는 사람 가운데 외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네 가지 마음 밭을 설명한 성경 말씀에 근거하면 3/4이 외인일 수 있습니다. 네 가지 마음 밭 가운데 구원받을 옥토는 1/4뿐이기 때문입니다. 옥토는 깨닫고 돌이키는데, 외인은 그렇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설교를 하실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됩니다. 돈이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럼 왜 외인에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실까요?

지금 시대는 다양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도 다양하고 삶도 다양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복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삶, 그것이 아니라면 불의한 삶입니다. 사회 구성원이 각각 처해 있는 상황에서 열심을 내고 힘을 써서 사회에 기여하고 좋은 평가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시선에는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말로는 예수 안과 예수 밖이고, 방주 안과 방주 밖이고, 믿음 안과 믿음 밖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흑백논리 같은 이원론이 위험한 까닭은 우리가 정죄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 그르다’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를 판단하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열려 예수님의 시선으로 보게 되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분별되는 것만큼 큰 은혜가 없습니다. 선명해지고 명쾌해지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의가 나타나는 자리인지 아닌지 주님의 시선으로 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외인은 불의에 해당됩니다. 곧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은 세상 밖에 있습니다. 세상의 시선에서 보면 천국에 속한 사람이 외인입니다.

천국은 세상 밖, 세상 시선으로 천국 속한 사람은 외인

우리의 육체는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속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마음이 세상에 가 있는 사람은 외인입니다. 이 외인에게는 죄 사함이 없고 회개가 없습니다. 믿음의 영역인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 하더라도 회개가 없으니 하나님 나라에 갈 수도 없습니다.

외인들이 천국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천국을 갈망하지 않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엔가 팔려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른 것에 다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외인은 천국이 아니라 다른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갈망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최근 밤하늘에 초승달 위에 금성이 떠서 아주 예뻤습니다. 초승달은 미인의 눈썹과도 같아서 아미(蛾眉)라고 말합니다. 초승달이 아미 같다고 말하면, 초승달이 예쁘게 떴다는 말로 초승달을 강조하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마음이 다른 곳에 팔려 있으면 아미라는 단어만 크게 들리기도 하고, 미인이라는 이미지만 마음에 가득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막 4:15)

외인의 첫 번째 모습은 길가 밭입니다. 길가는 딱딱해서 말씀인 씨앗이 뿌려져도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됩니다. 사탄이 말씀을 즉시 가져갑니다. 말씀을 들었는데 금방 잊어버린다고 하시는 분들은 나이 때문이 아니라 사탄이 가져간 것일 수 있습니다. 총기가 있는 아이들과 청년들은 기억력이 좋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잊는 것은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탄이 빼앗아 간 것입니다. 말씀을 자꾸 잊어버린다면, 내가 사탄에게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때 실존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힘을 쓰고 사는지, 어디에 정신이 팔려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 없이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탄은 말씀을 잊어버리게 하고, 말씀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말씀을 세상의 가치와 비교하게 만들어서, 결국 세상 가치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말씀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막 4:16~17)

외인의 두 번째 모습은 돌밭입니다.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 석회석 암반 위에 있습니다. 거기에 씨앗이 뿌려지고 햇빛이 비치면 돌이 달궈집니다. 보통 흙보다 더 쉽게 달궈져서 일찍 싹이 틉니다. 그러나 일찍 죽습니다. 석회석 암반 때문에 뿌리가 깊이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밭은 그래서 말씀이 선포되면 즉시 기뻐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일찍 죽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런 암반과 같은 존재는 무엇일까요?

말씀으로 인해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집니다. 말씀이 힘이 되어 오히려 세워져야 하는데, 말씀으로 오히려 절망하고 낙망하게 됩니다. 돌밭의 마음은 말씀 때문에 처음에 뜨거워졌는데 나중에는 결국 말씀 때문에 넘어집니다.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시는 분들 가운데 ‘드디어 길을 보았다, 진리를 보았다!’ 하시면서 좋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말씀으로 인하여 반드시 핍박과 환란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이 임했습니다.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집을 떠나 왔는데 또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살이 된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하는데, 이것보다 큰 핍박이 어디 있겠습니까? 딱딱한 돌처럼 내 마음에 살이 된 것이 떠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마음에 살 된 것이 떠나가야 산다는 인식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돈이 돌이었고 성공이 돌이었고 자녀가 돌이었습니다. 돈과 성공과 자녀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이 돌이었다는 깨달음이 없으면 말씀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막 4:18~19)

외인의 세 번째 모습은 가시떨기 밭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그리고 욕심이 말씀과 같이 자라기에 결국 말씀을 가로막게 됩니다. 결핍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부족함 때문에 염려하고, 재물이든 건강이든 애정이든, 이것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속마음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완전했습니다. 에덴의 뜻은 ‘기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환경이 아무리 좋고, 상상할 수 없는 재물이 있더라도 결핍을 느끼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채워야 삽니다. 그러나 외인들은 하나님을 채우지 않습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것을 채우려고 그토록 세상에서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회개가 없고 죄 사함이 없습니다. 외인은 마음이 세상에 모두 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나 죽어.” 하는 인식이 없습니다. 마음을 결정하시고, 돌이키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내 마음에 이런 게 들어와요! 이런 게 들어오면 큰일 나는데, 주님이 내 마음에 계셔야 하는데! 이 결핍의 문제가 나를 괴롭혀요! 돌처럼 굳은 이 문제가 나를 괴롭혀요!”

방언을 하고 귀신을 내어쫓고 선지자 노릇 하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도를 열심히 해도 실제 믿음의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목사인 제가 설교해도 믿음의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염려가 준비하고, 염려가 계획하게 만든다면 그렇습니다. 마음에서 돌이 되어버린 자녀에게 문제가 생겨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 믿음은 그냥 떠나갑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해서 내가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 되셔서 예수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무언가 해결하기 위해 종교적 행위를 하며 실제 주님은 모르고 살아가는 실존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셔서 외인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십니다. 외인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직접 보여주면 깨닫고 돌이킵니다. 평생 돈을 좋아하던 사람, 평생 성공을 따라다닌 사람에게 갑자기 천국이 보이면 어떻게 됩니까?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것을 제자들이 봤습니다.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합니다. 성공 욕구가 가득한 사람도, 천국을 보면 천국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그런 방법으로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보이는 것을 허용치 않으십니다.

우리는 평생 돈을 좋아할 수밖에 없고 성공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회개합니다. 회개가 잘 되지 않지만 그래도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역사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잘 안 됩니다! 주님!” 그런 사람에게 천국이 보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안 보입니다. 회개는 근본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때 천국이 보이고 말씀이 마음에 내려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찬양 ‘송축해 내 영혼’의 가사를 보면 만 가지 이유로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아침 해가 떠서 찬양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또 주님을 찬양합니다. 평생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결핍을 채우려고 하고, 결핍이 채워지면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결핍은 조건이 채워져서 만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져야 만족됩니다.

제가 미사 음악보다 클래식 음악을 더 좋아합니다.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은 21번부터 24번까지 좋은데, 특히 23번 2악장 아다지오 쾨헬넘버 488번을 들으면 정말 좋습니다. 관현악과 피아노랑 밀고 당깁니다. 미사 음악도 클래식 음악처럼 아름다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깨달았습니다. 음악에 어떤 것을 더해 무엇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음악은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문화는 하나님입니다.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제 마음을 보고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라! 새 아침이 밝았네’ 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으로 유명하고 리스트는 피아노 독주가 유명합니다. 리스트의 위로라는 곡이 1번부터 6번까지 있는데 3번이 특히 좋습니다. 리스트는 카롤린 비트겐슈타인이라는 후작부인과 눈이 맞아 도피행각을 벌이는데 후작부인이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거절당한 뒤, 그 실망감과 아픔을 위로해주기 위해 리스트가 작곡했다고 합니다. 현상과 상황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리스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도 아닙니다. 불의한 사람이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가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속지 않으셔야 합니다. 옥토만 의롭습니다. 마음에 있는 것은 드러납니다. 숨길 수 있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본디 우리의 실존은 철저하게 망한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 관심 있어요!” 하시며 실제를 드리는 인생이 되어 이 땅에서 거뜬하게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조금 틀린 것으로 화내지 마십시오. 조금만 옳으면 부들부들하며 못 봐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실수해도 부들부들하는 분들 있는데, 무서워서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옥토가 되어 천국이 보이는 사람들, 돌이켜 주님만이 희망이라는 사람들이 우리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필로그

여러분의 완벽함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나의 깨끗함, 나의 온전함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주님과 연합함을 추구하셔야 합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추구하셔야 합니다. 주님과 연합했을 때 경험하게 되는 주님의 하심을 기대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안 되는 사람들,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죽어도 주님께 엎어집니다. 그때 부들부들 떱니다. 남들이 잘못할 때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옥토가 아닙니다.” 주님께 엎어질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때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기뻐하게 됩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주님만 믿고 그렇게 살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의가 나타나는 곳에 제가 있겠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의가 나타나는 복음 아래 있겠습니다. 주님, 제 실존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함을 구하며 주님께 나아가겠습니다.” 그때 친히 오셔서 하시는, 이루시는, 역사하시는, 완성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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