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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칼럼] 회개의 합당한 열매 맺기

ⓒ 복음기도신문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누가복음 3:7-14)

성도들은 주님이 나의 전부라는 신앙고백을 많이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삶에서 그 고백이 실제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믿음의 고백이 실제되지 못하고 쓸 믿음이 없는 것일까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그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괴로워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을 써야 할 때 믿음을 쓰지 못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삶에서는 그 고백보다 화가 더 강력한 것 같습니다. 고백이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합니다. 주님이 우리 일상에 오셔서 개입하시고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이 부족하게 되면 돈의 부족함이 믿음보다 훨씬 커집니다. 그것은 쓸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십니다. 이렇게 좋은 말씀을 우리는 귀에 좋게 듣고, 마음에 좋게 새겨 넣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납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라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실제입니다. 주님이 목자이시기에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이 실제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 실제가 없으니 하나님 대신 다른 것으로 대체시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여야 하는데 ‘재정’을 나의 목자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건강, 자녀, 돈, 사회적 지위를 나의 목자 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목자되어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 3:7)

성경에 이와 비슷한 말씀이 많습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질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사람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세례 받으러 나오는 사람은 신앙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일 수 있고, 천국에 대한 확증을 받고 싶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오는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합니다.

목사가 성도들에게 “뱀의 새끼,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한다면 성도들이 목사에게 돌을 던질지도 모릅니다.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을 듣고 돌이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소원을 갖고 교회에 나와 세례를 받으려고 한다면, 환영해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인도해 주면 될 것 같은데 세례 요한은 왜 독사의 자식 이라고 말했을까요?

독사의 자식, 즉 사탄의 자식도 세례 받기를 원합니다. 장차 올 진노도 알고 그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와 독사의 자식들이 세례 받고 싶어하는 이유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

독사는 사탄을 말합니다. 마귀의 자녀가 왜 세례를 받고 싶을까요? 죄와 죄의 열매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별되지 않으면 평생 회개하다 지쳐서 세상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죄의 열매를 회개하다 지쳐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받았던 저주는 배를 땅에 대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는 것입니다. 사탄의 욕구는 땅에서 충족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주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흙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 욕구가 세상에서만 채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기반으로 살아가기에 이 세상에서 꿈을 꾸며 이 세상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려고 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은 세상을 향한 목적을 갖고 세례를 받으러 나온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이 세상에서는 이것이 있어야 안전해’ 하는 생각이 뿌리 깊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 하리라”(요 8:21) 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찾고 찾아도 만나지 못 하고 죄 가운데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속한 곳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속해 있고 그들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 중에서도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죄 가운데 죽는다고 하십니다.

왜 주님을 찾으십니까? 그 빛깔을 선명하게 보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보다 나은 인생을 만들기 위해서 주님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에게 선명하게 나타나는 특징을 이야기합니다. 육체의 욕구를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욕구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몸이 있으니 몸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육체가 있으니 형성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세계관은 인생의 방향을 정합니다. 우리 마음에 채워진 것이 세계관입니다. 우리의 세계관은 세상 풍조를 따라가지 않으면 낙오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의 경향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에게 사로잡힌 마음입니다.

도둑질, 살인, 폭력, 음란, 마약과 같은 것만이 죄가 아닙니다. 육체의 욕구를 따라 “이것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거야” 하고 마음에 채워진 것이 죄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욕구를 따라 주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이용해 세상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경향이 죄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에게는 장차 올 진노가 있습니다.

그럼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무엇입니까? 회개는 죄의 열매를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을 훔친 뒤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원상태로 복구했으니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죄의 열매를 돌이킨 것뿐입니다. 저차원적인 회개입니다. 그렇게 죄의 열매만 회개하면 평생 회개만 하다가 지쳐 죽을 것입니다. 죄의 열매를 맺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마음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열매를 맺게 하는 근본적인 죄를 보셔야 합니다. 돈은 없는데 “이 물건은 정말 좋은 거야, 정말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해지면 도둑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에 채워진 것을 먼저 돌이키는 것입니다. 탐하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 것입니다. 회개는 배를 땅에 대고 있는 것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곧 죄의 공장, 죄의 나무, 죄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힘쓰지 않아도 세상의 욕구가 어쩌면 그렇게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가득 차지하는지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마음이 먼저 구원받아야 합니다. 다윗은 마음으로 주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시 13:5)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마음에 쉼이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과 세상에 대한 욕구로 가득한 마음, 아쉽고 부족해서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 나가 마음에 쉼을 주시는 주님을 자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으로 채워지지 않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은 돈이 있어도 더 채우려는 욕구로 부족함을 느끼고, 돈 없는 사람은 돈이 없기 때문에 부족함을 느낍니다. 마음에 구원이 일어나면 욕구가 떠나갑니다. 회개하면 땅에 대고 있던 배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늘에 마음을 둡니다. 사탄의 자식은 세상에 마음을 둡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8)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목사이기에 안심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어떤 직분을 맡고 있기에 안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을 때 안심하게 됩니다.

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10-14)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지 세 가지 예를 들어 말씀했습니다. 첫째, 옷 두 벌 있는 자는 한 벌을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알았으니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선한 일을 해야지, 하는 뜻으로 옷 한 벌을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행실로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옷 두 벌이란 내 삶의 안전장치입니다. 이 정도는 있어야 든든하다고 여기는 속마음입니다. 두 벌 중 한 벌을 주라는 말씀은 우리의 안전장치를 깨뜨리라는 뜻입니다. 재정이 넉넉하고 자녀가 잘 되어야 가정이 안전하다고 여기는 그 속마음의 안전장치가 깨질 때 하나님의 손길이 임합니다. 옷 한 벌 나눠주라는 말씀은 우리가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안전하다고 여기는 그것을 깨뜨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되어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둘째, 먹을 것에 대한 말씀도 같습니다. 당시 세리는 매국노였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습니다. 세리들은 부과된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뒀습니다. 착복하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안전장치이기도 했고, 착복하는 것이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낙으로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것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군인들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갑질을 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의 논리라는 안전장치를 풀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내향적이라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쉽지 않은데 드라마 설교(말씀을 뮤지컬로 전하는 것)에 출연해 짧은 대사를 소화해야 했습니다. 리허설할 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님(극단 광야 배우)들이 의식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백했습니다. 제 안에 주인된 무엇이 있다고, 저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돌이켜 회개했습니다. 저의 주인됨을 회개한 것입니다. 작은 일상에서도 속의 주인됨을 돌이키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목사님,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 겸손한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준비된 뒤에 무언가를 하면 하나님보다 더 잘할까요? 부족한 것이 채워지고 준비가 되면 더 잘하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성도 여러분을 신뢰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예수님 잘 믿는 사람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에 가면 세상 일도 잘 못합니다. 그 사이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적어놓은 말씀이 로마서 8장입니다.

의욕이 넘쳐서 설교를 준비하고 강의를 준비하고 세미나를 준비합니다. 부부학교, 셀리더십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알아갈수록 의미가 없습니다. 잘 되지도 않습니다. 그때 세상으로 가면 잘 될까요? 세상으로 가도 잘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잘 못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거기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없다고 힘들어 할 이유도 없고, 부족하다고 아등바등할 이유도 없고, 진자리든 마른자리든 의미 없고, 가졌든 못 가졌든 의미 없습니다. 주님 등에 업혀서, 주님과 함께 가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에필로그

‘내 생명을 드리리’ 하는 찬양 가사가 있는데 잘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드릴 내 생명이 없습니다. 내 생명의 진짜 주인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내가 그토록 취하려고 애썼던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부부 사이가 힘들 때, ‘여보, 미안해’ 하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하지 못합니다. 자존심이 믿음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은 혼내주고 싶습니다. 또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하지 못하며 삽니다. 사랑은 표현하기 어렵다는 그 생각의 무게가 믿음의 무게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돈에 대한 욕구도 믿음보다 훨씬 큽니다. 돈이 많아도 문제고 적어도 문제입니다. 욕구가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말 주님께서 주시는 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힘들고 망하는 길인지 실제로 해보십시오. 십자가로 나아가 주님과 연합해 죽고,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말해보십시오.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 말도 못하면서 삽니까? ‘나는 능력이 부족해’ 하고 말한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채워져서 사역을 하게 된다면 교회 망가집니다. 우리가 준비를 마친 뒤에 무언가 사역을 한다면 망칩니다. 돌들도 들어 쓰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기도신문]

lee ac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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