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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칼럼] 대체신학 이슈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연구 (6)

▲ 예수 탄생 기념교회의 예배 장면. 사진: 유튜브 c채널 캡처.

  

I. 들어가는 말
II. 사울/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III. 사울/바울과 다메섹 교회
IV. 사울/바울과 아라비아 교회
V.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과 확장 신학 
    1.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2. 대체신학과 확장 신학
VI. 나가는 말

V.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과 확장 신학

세대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라고 해석하는 개혁/언약 신학을 대체 신학이라고 비판한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혈통적 후손만이 구약 예언 성취의 주인공으로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될 수가 있는데, 개혁/언약 신학자들이 그 주인공의 자리를 교회 공동체로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두 개의 글을 통해 개혁/언약 신학은 대체 신학이 아니라 실체 신학이며 성취 신학임을 입증하였다. 하나는 “대체 신학 이슈와 초림 예수의 즉위 연구”이고 또 하나는 “대체 신학 이슈와 예수의 열두 사도 연구”이다. 이제는 개혁/언약 신학은 대체 신학이 아니라 확장 신학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본문 연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이라는 개혁/언약신학의 주장의 옳음부터 입증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서두에서 “…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 있기를 원하노라”(갈 1:3)라고 기원하는 인사를 한다. 그런데 그가 서두에서 기원하는 인사의 대상은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 모두이지만 서신의 말미에서는 그 대상을 다음과 같이 제한한다.[1]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들에게‘와’(καί)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6).

이 구절의 “와”(καί)는 두 가지 방법으로 번역될 수가 있다.[2] 하나는 곧 전자와 후자가 서로 다른 그룹이 되도록 하는 해석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를 철저히 구별하는 세대주의 신학자들의 해석이다. 그들은 “이 규례를 행하는 자들”을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들 가운데 “이 규례를 행하는 이방인 성도들”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유대인 성도들” 또는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모든 유대인”이라고 해석한다.[3] 또 하나는 곧 전자와 후자를 같은 집단이 되도록 하는 해석이다. 이는 곧 언약/개혁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이 규례를 행하는 자들”이 곧 갈라디아 지역 여러 교회의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의 통합”이며, 그들이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한다.

‘규례’(카논)라는 번역은 구약 율법의 규례를 연상시켜서 적절하지 않고 규칙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4] 이 단어는 갈대(reed) 또는 측량하는 자(measuring rod)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고 있다.[5] 규칙(쉬운성경), 원리(현대인의성경, 우리말성경), 표준(새번역), 또는 규범(권연경)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규칙을 행하는 자들”에서 ‘이’는 무엇을 지칭하는가? 그것은 바로 앞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이 규칙을 행하는 자들”에서 ‘이’는 바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은 곧 ‘새 창조’(new creation, NIV 등)라고도 번역된다. 이 주제는 다음 구절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창조)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규칙을 행하는 자들”은 곧 새 창조의 규칙을 따라 사는 자들을 뜻한다. 새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시작되었다. 또한, 새 창조는 새로운 인류의 출발을 의미한다.[6] 새 창조에서는 할례 유무가 중요하지 않음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이 없고 구별이 없다. 할례는 종교적인 것을 대표하고, 무할례는 이교도적인 것을 대표한다.[7] 갈라디아서 6: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새 창조)만이 중요하니라”)과 5:1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을 통해 볼 때 새 창조의 세계는 곧 믿음의 세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자들은 모두 다 새 창조 세계에 참여한 모든 존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따라서, 세대주의 신학자들이 “이 규칙을 행하는 자들”을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에 속한 이방인 성도들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유대인 성도들 또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게 될 유대인 성도들로 각각 구별하여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갈 6:16)라는 표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 및 유대인들(자기들의 조상을 자랑으로 여기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 자기들이 율법을 갖고 있는 것 등을 자랑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대조시키고 있다. 요컨대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단순히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서 나온 자들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신실한 아브라함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이다.”[8]

개혁자 존 칼빈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갈 6:16)라는 표현을 “이것은 육신을 좇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자 함을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의 헛된 자만을 간접적으로 조롱하는 말이다”라고 주장한다.[9]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육신의 이스라엘”과의 대조되는 개념으로 설정하고 두 이스라엘을 다음과 같이 대조한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지닌 자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안목에서 보이는 가면적 이스라엘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이스라엘이다. 할례라는 것은 세상 사람 앞에 보이는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지만, 중생은 하나님 앞에 하나의 진리이다. 요컨대, 그는 앞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이름한 저들을 이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다(갈 3:29). 그렇기에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한 교회에 연합된 모든 신자는 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속에 포함된다. 반면에 육신의 이스라엘은 종족과 혈통을 자랑하는 데 불과하다.[10]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도 두 종류의 이스라엘에 대해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9:6)라고 언급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는 그 자신이 유대교에 있을 때 ‘육신의 이스라엘’에 속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회심과 소명을 체험하고(갈 1:11~16)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속하게 되었다고 증언한 셈이다. 또한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에 침투하여 이방인 교우들에게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도록 강요하며(갈 5:10) 할례를 행하도록 선동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육신의 이스라엘”이라고 선포한 셈이다. 바울은 그렇게 선동자들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외친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고 있느니라”(갈 6:17).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하는 자들이 곧 갈라디아 지역 여러 교회에 침투하여 이방인 성도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여 온 선동자들이다. 그들은 이방인 성도들의 몸에 아브라함의 인종적 가족에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표지를 남기도록 하여 그들이 “육신의 이스라엘”에 속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속한 자로서 자기 몸에 있는 흔적 중에 중요한 것은 예수께 충성한 결과로 받은 고난의 상처뿐이라고 말한다. 그 상처는 곧 자신이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부여받게 된 자신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할례 시행자가 낸 칼의 표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갖게 된 십자가의 표지다. 십자가의 표지는 핍박의 흔적이요 ‘예수의 상처’다.[11] 톰 라이트는 십자가 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십자가는 다소의 바울이 스스로 향유하고 있다고 믿었던 특권적인 구분을 폐지해버렸고, 사도로서 그가 가지게 된 새로운 삶은 그의 옛 존재로 정의되는 삶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살아난 메시아에 의해 정의되는 삶이다. 사실상 갈라디아서 전체에 걸쳐 십자가는 역사 안에서 구속의 전환점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이 나에게 못 박혔고, 나는 세상에 못 박혔으며’, 그 결과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새로운 창조다’(6:14~16). 이것은 언약적 언어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은 최종적인 새로운 창조를 함께 기다리는 것처럼 그들의 인종적인 차이와 관계없이 같은 식탁에 속해 있다는 교리가 갈라디아서에 말하는 칭의이다.[12]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b)라는 말은 바울 자신과 세상이 서로 못을 박는 것처럼 피차 관계가 끝났음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13] 마침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교회에 보내는 서신 갈라디아서를 마지막 기원 인사로 그의 서신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이번에는 그의 인사의 기원 대상을 “이 규례를 행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제한하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하여 할례를 행하도록 선동하는 자들은 그 “형제들”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고 바울이 은혜를 기원하는 인사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1] 권연경,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250.

[2] “와”로 번역된 헬라어 καί는 “그리고, 그리하여, 또한, 마찬가지로, 심지어, 그렇지만, 하지만, 그러나”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때로는 그것을 번역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때도 있다: W. Hendriksen, 『갈라디아서』, 김경신 역, (서울: 아카페 출판사, 1986), 337.   

[3] Robert Saucy,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 김기찬 역, (생명의 말씀사, 1994), 95-98.

[4] 이필찬, 『이스라엘과 교회,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78.

[5] W. Hendriksen, 『갈라디아서』, 김경신 역, 336.

[6] 이필찬, 『이스라엘과 교회,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79

[7] 김정우, 『갈라디아서를 처방합니다』, (서울: 두란노, 2021), 286.

[8] Martin Ruther, 『마르틴 루터, 갈라디아서』, 김귀탁 역, (서울: 복있는 사람, 2019), 525.

[9] John Calvin,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657.

[10] John Calvin,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657-658

[11] Tom Wright,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이철민 역, (서울: IVP, 2012), 124.

[12] Tom Wright,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최현만 역, (서울: 에클레시아 북스, 2014), 203-204.

[13] 김정우, 『갈라디아서를 처방합니다』,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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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교수 및 GMS 아랍권 선교사(천안장로교회 파송. since 1989). 그의 책으로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CLC, 2009)과 아랍권 및 이슬람권 선교와 관련된 여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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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정형남 칼럼] 대체신학 이슈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연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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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남 칼럼] 대체신학 이슈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연구 (4)
[정형남 칼럼] 대체신학 이슈와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연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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