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증언해야 현실 된다

ⓒ 안호성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영혼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삶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지 않는 한 실제 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작정한 뒤, 사도 바울의 인생에는 오직 예수님만 있었습니다. 그냥 입술로만 고백한 것이 아니라 실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알기로 했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을 향한 믿음입니다. 삶에서 부닥치는 어려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큰 믿음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심장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신경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할 때 ‘믿습니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크레도’입니다. 믿음을 뜻하는 ‘크레도’는 풀어서 보면 ‘심장을 드린다’는 말입니다. ‘크레’가 심장이고 ‘도’가 드린다는 뜻입니다. 즉, 존재 자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 빼앗긴 것입니다. 주님께 마음을 다 드렸는데, 마음을 다 받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마음도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2절입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며칠 전부터 아파트 입구에서 4, 50대로 보이는 한 남자분이 물티슈를 전도용품으로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자꾸 생각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하실 말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듣겠습니다.’ 결국 제가 그 분을 다시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목사님이었습니다. 차 한잔 하자고 말씀드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세상 욕구를 마음에 품고 입술로는 예수님 이야기 하는 것,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다시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해졌습니다. 그 목사님에게 힘든 것을 물어봤습니다. 월세 내기가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제 마음에 왕 되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 내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어떻게 제 삶을 가꾸어 가시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 무엇을 전할까, 어떻게 전할까?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전도용품이 따로 없습니다. 전도용품으로 그분들의 마음을 사서 무엇을 하시려고요? 그분들의 마음을 사서 예배당으로 데려오고, 많은 사람들로 예배드리게 해서 뭐하시려고요?’ 우리에게는 이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그분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생명이 실제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 2:1)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증거를 전합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증거해야 할 것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외에는 하나님의 비밀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증언할 때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신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많이 잘못 돼 있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부족함이 채워지고 어려움이 해결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건강, 재정, 자녀, 회사의 문제들이 풀린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 믿으면 잘 된다는 말은 마귀가 하는 소리입니다. 심지어 가난이 죄라고 말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성경에 쓰인 대로 봐야 합니다. 필요하면 채워지기도 하고, 또 필요한데 채워지지 않기도 합니다. 필요하면 대통령이 되기도 하지만 필요하면 톱으로 죽임당하기도 합니다. 어느 형편에 처하든 예수님이 마음에서 떠나가지 않는 것이 참신앙입니다.

예수 믿으면 잘 된다? 마귀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와 사랑입니다. 공의는 거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견딜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과 원수까지 사랑하는 십자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증언해야만 실제가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증언될 때만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 현실 됩니다. 

우리는 세 가지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하나님의 비밀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 복음에 대한 이해, 교회에 대한 이해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안 되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는 있지만, 종교적으로 성경을 통독할 수는 있지만, 해박하게 성경을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심장을 드리는 믿음 ‘크레도’는 가질 수 없습니다. 전적인 타락, 존재론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안 됩니다. 

목사는 밖에 나가면 약자입니다. 막말 할 수 없습니다. 시원하게 속을 말할 수 없습니다. 막말이 입에서 나올 정도면 속은 어떻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안 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똑같이 ‘화’가 있습니다. 존재론적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음란한 성적 욕구를 이기려고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며 참고 견디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무엇을 견뎌내는 것이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음욕을 품은 마음 자체가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노력할수록 한계에 부딪칩니다. 정말 안됩니다. 하루만이라도 주님께 온전하게 마음 드리기가 그렇게 힘듭니다. 이 ‘절망’을 제대로 경험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25년간 목회하며 만난 가장 어려운 분은 이런 분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급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몇 번씩 통독하며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삽니다. 잘 가르칩니다. 인간관계도 좋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심한 죄인이고, 끔찍한 죄인이라는 것은 인정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사에 의롭습니다. 옆에서 보기에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자신이 존재론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정말 길이 없습니다. 그런 분은 예수님을 찾아도, 필요와 욕구를 위해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도 잘 믿는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성경도 잘 가르치고, 심지어 설교도 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자신이 주님을 알기 원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간절하고 성실하고 진실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존재론적인 죄인만 찾습니다. 죄의 공장만 찾습니다. 우리는 죄의 나무라 죄의 열매를 맺습니다. 뿌리가 통째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접붙여져야 합니다. 

에덴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아담과 이브에게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믿음의 고백보다 ‘회개’가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회개한 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기 때문에 복음이 믿겨지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복음에 대한 이해가 생깁니다.

아담과 이브에게는 믿음의 고백보다 회개가 필요 

마지박으로 교회에 대한 이해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가 안됐다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예배당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일 때만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머리 되신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따라갑니다. 더 이상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입으로 예수님을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씁니다. 유대인처럼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처럼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이 실제가 되면, 머리 되신 예수님의 생각이 우리 마음에 깃드는 것은 기쁨이요 희망이 됩니다. 주님의 마음 따라가지 못함을 애통해 하며 자아를 십자가에 내던지게 됩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나에게 올 수 있니, 내 뜻이 어떻게 너희들에게 홀러갈 수 있니, 내 사랑이 어떻게 너희들에게 전달될 수 있니?’ 인간 이해, 복음 이해, 교회 이해가 될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로고스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의 1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10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탐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탐욕은 죄에 대해서도 압니다. 우리 마음에 죄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기쁨을 놓지 못합니다. 갈등합니다. 오히려 세상이 주는 기쁨을 채우려고 논리를 내세웁니다. 바로 그것이 탐욕입니다. 가증함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이해할 때 깨어집니다. 때때로 저는 제가 가증스럽고 탐욕스럽게 보여서 힘듭니다. 목회를 통해서도 나의 생각과 나의 뜻이 비집고 들어옵니다.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빌어서라도 욕망을 채우려는 우리의 탐욕이 십자가에서 먼저 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왜 증거 해야 할까요? 탐욕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온통 세상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은 기쁨입니다. 에덴동산에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기쁜 곳입니다. 우리는 본래 에덴의 기쁨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기쁨으로부터 분리됐습니다. 그래서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는 기쁨을 되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때 사탄이 속입니다. 회개해서 에덴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사탄은 기쁨을 위해 세상에서 무엇을 찾고 채우라고 속입니다. ‘이것을 채우면 기뻐! 이렇게 돈 많으면 기뻐! 이런 위치에 오르면 기뻐!’ 세상의 기쁨을 목적 삼도록 유혹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면 잠시 기쁨은 옵니다. 그러나 다시 교만해집니다. 돈이 채워지면 기쁘지만 자연스럽게 갑질 합니다. 큰 집을 사면 잠시 기쁘지만 나중엔 교만이 쑥 자랍니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고 결국에는 교만해지고 갑질을 하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기쁨이 있으면 희생하고 헌신하고 사랑합니다. 제가 설거지하는 이유는 아내가 사랑스러워서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불쌍해서 설거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삽니다. 그때 오는 기쁨이 긍휼과 자비와 헌신이 되어 흘러갑니다. 세상의 가짜 기쁨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삽니다.

기쁨을 채워달라고 기도한다면 세상에 마음이 그만큼 달라붙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밀을 증언하며 살아야 합니다. 말과 아름다운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말이 먹힐 때 뿌듯해 하고 기뻐합니다. 인정받으니까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기계발 서적을 보고 스펙을 쌓습니다. 영향력을 넓혀가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게 되면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로고스가 홀러가는 것이 기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능력이 나타난다고 알고 있는데 오해가 있습니다. 제가 귀신이 쫓겨나가는 일곱 가지 사례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영적 세계를 공부하는 많은 선배들을 만났고, 질병이 치유되는 과정을 통해 영의 세계를 배워갔습니다. 저에게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병이 기도를 통해 나았습니다. 능력이 드러나는데 이상하게 저는 점점 피폐해져 갔습니다.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을 하는데도 피폐해져가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때 마태복음 7장 말씀이 진짜로 저에게 왔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기절할 것 같았습니다. 능력이 드러나 많은 사람들이 제 사역을 통해 주님 앞으로 돌아왔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모르신다고 하시다니,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울증까지 왔습니다. 

주님의 영이 충만하면 주인이 바뀝니다. 머리 되신 예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구원의 실제 역사가 드러납니다. 우리의 뜻이 무너지고, 생활방식이 바뀝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물세례’는 헬라어로 ‘밥티조’, 즉 물에 잠겨 죽는다는 뜻입니다. 물에서 다시 올라을 때 살아납니다. ‘성령 세례’는 주의 영으로 우리가 죽고 주님이 사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은사적 개념으로 생각해 능력이 따라 오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기름부음입니다. 성령께서 오신 이유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생활방식이 바뀝니다 

앤서니 퀸 주연의 〈노틀담의 꼽추〉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배경이 되었던 노트르담 대성당에 불이 났을 때 구찌를 소유한 피노 가문에서 1억 유로를 냈습니다. 루이비통을 소유한 가문에서도 1억 유로를 냈습니다. 아르노, 베탕쿠르 가문도 2억 유로씩 냈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복구를 위해 하루에 1조 이상의 돈이 걷혔습니다. 저는 주님의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노트르담 대성당 바로 옆에는 피에르 신부 재단이 운영하는 공공의료시설이 있습니다. 폐업 위기에 있습니다. 그 재단에서는 ‘여러분이 기부하는 돈에서 1%만 기부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인 성당 지붕을 보수하기 위해 하루 만에 1조원의 돈이 모였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마음에는 감동하지 못할까, 왜 하나님의 마음은 읽어내지 못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성령의 나타남으로 우리에게 쌓여야 합니다. 그래야 오직 예수만 증거됩니다. 사도 바울이 오직 예수만 증거했을 때, 유럽의 문화가 바뀌고 세계 종교사가 바뀌었습니다. 예수가 내 안에서 생명 되었을 때! 다른 것에 가 있는 마음이 죽고, 오직 예수님만 이야기할 때 문제도 풀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기도를 받으려고 뒤에서 슬라이딩해서 앞으로 나옵니다. 치유의 기도를 하면서 그런 이기심을 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고쳐지는 능력이 드러나면 목사인 제가 주목받습니다. 그러나 신뢰할 수 없습니다. 치유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이 드러나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치유가 많이 일어나도 가짜입니다. 설교를 통해 목사가 주목되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메모지 하나로 두세 시간 동안 설교하시는 어떤 목사님을 보면 제 반지를 빼서 주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설교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강의하고 설교할 때 목사가 주목되면 신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교회에서만 그렇게 하기로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서도 작정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회사 오너가 들어있다면 가짜입니다. 자녀들의 명문대 입학, 스펙 쌓기가 마음에 가득하다면 가짜 입니다.

예수 믿는 것처럼 보여도 영적으로는 늑대가 양의 탈을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양의 탈을 쓴 늑대를 구별하라고 합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는 양의 소리를 내며 속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늑대는 결코 풀을 먹지 못합니다. 한두 번 풀을 먹는 것처럼 속일 수는 있겠지만 분명히 표시 납니다. 무슨 마음을 먹고, 마음을 어디에 쓰는지 보면 압니다. 오늘 하루라도 좋으니, 온전하게 주님께 마음 드리는 인생 되고 싶다고 기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죄성을 주 앞에서 회개하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임하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아이들은 피부색이 달라도 놀기만 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안됩니다. 놀 수만 있다면 성별의 문제도 장애가 안 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보고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논리입니다. 몸이 있기에 무엇무엇이 필요하다는 세상의 가치들을 습득합니다. 그래서 놀면 안 되는 사람을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 있으면 안전하고 행복하고, 내가 우위에 있을 수 있어!’ 그런 세상의 논리를 배웁니다.

존재론적 죄성을 깨닫지 못하면 이 세상의 논리를 깰 수 없습니다. 존재론적 죄성을 깨닫지 못하고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죄를 더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져다가 세상의 어떤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죄를 더하는 격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기 전까지는 절대 세상의 가치가 깨어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복음을 전하라고 말합니다. 그것만 알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품, 예수님의 손,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능력이 이 땅을 사는 여러분에게 실제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만이 길입니다. 주님만이 진리입니다. 주님만이 생명입니다. [복음기도신문]

lee ac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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