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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GTK 칼럼] 교회 기도를 잃어버리다 (3)

ⓒ Deb Dowd on unsplash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우리는 “만물의 마지막”을 가까이에 두고 있는 “말세”(the last days)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 이미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경고를 했으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얼마나 그 마지막에 근접해 있겠습니까.

말세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딤후 3:1-5).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 속에서 이기심이 극대화됩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돈이 실질적으로 가장 고귀한 가치를 갖습니다.
자랑하고 교만합니다. 비방합니다.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하지 않으며 거룩한 삶에서 멀어집니다.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으며 못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배신하고 조급하고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종교적인 생활을 하지만 절대적인 진리의 능력을 부인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더욱더 심각하게 부패해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이 “극한 방탕에 달음질”한다고 말합니다(벧전 4:4). 사람들은 지진과 기근이 빈번하게 일어나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연재해와 관계없이 사회가 악하게 썩어가는 것을 보면 “만물의 마지막”을 향해 세상이 돌진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루에도 우리의 가슴을 내려앉게 하고 머리를 멍하게 만들 만큼 추악하고 잔인한 범죄와 부정부패가 수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지난번 칼럼을 통하여 성도 개개인이 죄와 치열하게 싸우지 않고 점점 부패하여가는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갈 때, 교회는 외로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아주 중요한 명령에 앞서(벧전 4:8) 여섯 구절에 걸쳐 죄와 치열하게 싸울 것을 명한 것입니다(벧전 4:1-6).

그리스도의 마음을 갑옷으로 삼아 단단하게 무장하고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자들만이 이 말세의 특징에 따라 극한 방탕으로 달음질하는 수많은 사람 속에서 살아가는 주의 군사들에게 참된 위로와 격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위로의 메시지는 탁월합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6-7)

같은 고난과 같은 위로를 겪고 있는 전우로서 바울이 치열하게 고난을 견뎌내며 소망하는 것은 성도가 바울의 치열한 삶을 보며 위로를 받고 격려를 얻어 함께 고난과 위로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현재 전쟁을 치르는 중입니다. 부패해가는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이 제시하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유혹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고 근심하며 이 세상에만 눈을 고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하늘에 소망을 둔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죄의 욕구들과 매 순간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서 더 외롭습니다. 더 힘겨운 삶을 살아갑니다. 누구도 이렇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와 동일한 입장에서 온전히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도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의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라(롬 12:12)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기도할게요”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하십니까?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 “기도할게요”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기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단지 기도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기도” 말고 다른 방식으로 사랑과 관심과 위로의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기도는 “단지 기도”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도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헬라인 과부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식량을 배정하는 일을 다른 집사를 세워 맡기면서까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을 유지해주는 음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영적인 양식을 제공하는 말씀과 기도였기 때문입니다(행 6). 주님은 사십 일을 주리신 힘겨운 시점에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구약의 말씀을 확증하셨습니다(마 4:4).

성도의 영적 전쟁 가운데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를 주십니다(약 1:5). 모든 염려와 걱정 가운데 평강으로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빌 4:6). 성도가 영적 전쟁에서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어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후 10:4). 성도의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살후 3:5). 모든 것이 주께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를 위해 다음과 같이 간구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5-19)

여러분 이 기도문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천천히 그 의미를 생각해보며 읽어보십시오. 당신에게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매 순간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이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과 지혜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라”는 말 앞에 “정신을 차리라”와 “근신하라”는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이 문장에서 명령어로 사용된 동사는 이 두 개 뿐입니다). 이 두 가지 행위가 “기도”를 위한 필수적 요소가 됩니다.

맥아더성경주석은 “정신을 차리고”에 대해 “감정이나 격정에 휩쓸리지 말고, 삶에 대해 합당하고 영원한 조망을 유지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근신하다”는 “꾸준함, 자기절제, 명석함, 도덕적 단호함”이라고 말합니다. 의미를 알고나니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근신하는 것이 기도에 필수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먼저 어떤 상황 속에서 감정과 격정에 휩쓸린다면 염려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구할 것을 구하라는 명령이 주어졌을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이 먼저 제시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빌 4:6). 걱정과 근심은 기도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합당한 반응과 영원한 조망을 갖지 않는다면 기도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눈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들이 이 땅의 것으로만 채워져 있다면 우리는 기도할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물질적 부요함과 세상적 축복을 위해 찾는 여느 우상들과 다를바 없는 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사람처럼 하나님께 구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정말 잘못된 방향으로 크게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는 근신(절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꾸준한 요청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굳은 신뢰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 안에서 도덕적으로 나를 절제하고 단호하게 삶을 정결하게 만들어 나가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기도도 차별하지 않고 들으십니다. 하지만 죄는 기도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됩니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목록에 “저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가 들어가는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마 6:12).

극심한 전투 가운데 점점 그 힘을 잃어가는 가운데 아무런 지원요청을 하지 않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영적 전투 가운데 우리의 유일한 힘과 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아무런 간구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기도는 귀찮은 숙제처럼 여겨질까요?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팀 켈러는 “기도”라는 책을 쓰면서 “의무를 지나 기쁨에 이르는 길 찾기”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그는 기도를 의무적으로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열에 아홉은 하나님께 무얼 얻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하고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에 가장 깊은 소망과 기쁨을 두기 일쑤다. 그러니 직장생활이 곤고하거나,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거나, 관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회적 지위에 위기가 닥치고 나서야 비로소 기도에 열을 올릴 수 밖에 없다.

인생만사가 순조롭고 심중에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안전하다 싶으면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기도가 무미건조해지기 십상이다. 이것저것 해 달라고 간청하는 데 큰 몫의 시간을 할애하고 가물에 콩 나듯(뭔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들 때) 죄를 고백한다. 오랜 시간 차분히 앉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경우는 드물거나 전혀 없다. 한마디로, 내면으로부터 기도하고 싶어하는 긍정적이고 전향적인 욕구를 찾아볼 수 없다. 형편에 쫓겨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릴 따름이다.

어째서 그런가?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 계신다는 걸 알지만 무언가를 얻어 내거나 행복해지는 수단쯤으로 여기는 탓이다. 대부분은 그분을 행복 그 자체로 삼지 않는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얻고 구하려고 기도하는 것이다(118-119p).

결국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식어버린 마음을 가진 자에게 “기도하라”는 명령은 무거운 짐일뿐입니다. 마치 향기로운 제사를 귀찮아했던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적 문제가 하나님에 대해 식어버린 마음에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외로움에 빠진 교회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는 서로를 사랑하고 돌아볼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그 외로움의 시작은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가족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자란 사람이 사회에 나가 든든하게 서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맛보며 사는 사람이 성도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채워진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넘쳐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요한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기도”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측정하는 온도계와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볼 때 기도를 많이한다고, 오래한다고 그 사랑이 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기도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성자 하나님이 얼마나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셨는지 주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외로울수록 더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더 굳게 신뢰하고 그분만 의뢰합시다. 팀 켈러는 “기도의 능력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 또는 기교가 아니라 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달렸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78p). 그러니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나아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일에 힘씁시다. 주님에게 뭔가 구하기 위해서만 나아가지 말고 주님 그분 자체를 얻기 위해 나아갑시다.

사도바울이 성도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기도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어떤 면에서 사실이지만, 기도 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굳건한 터가 됩니다. 성도의 눈이 떠져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성도가 영적 가치를 깨닫고 근신하여 하나님을 바랄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신뢰하고 의지하여 치열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를 잃어버린 교회는 절대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누군가의 이러한 기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관련기사]
[GTK 칼럼] 교회 외로움에 빠지다 (1)
[GTK 칼럼] 교회 죄에 빠지다 (2)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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