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집트 교회가 무슬림의 집단공격을 받으면서 콥틱 교회로 불리는 이들의 삶이 새롭게 전세계 기독교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슬람이 주류종교인 이집트에서 이들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모든 공직 또는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처럼 이등 시민 취급을 받아온 이집트의 콥틱 교회의 역사는 놀랍게도 1400여 년이 훨씬 넘는다. 콥틱 교회의 어제와 오늘, 미래를 살펴본다. <편집자>
콥틱 성도, 중동 기독교인의 절반
이집트의 콥틱 교회는 동방정통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에 속하는 한 기독교 분파이다. 엄밀하게 표현하면 정통이집트 기독교(Orthodox Egyptian Christianity)를 가리킨다. 공식 명칭은 콥틱정교회(Coptic Orthodox Church).
중동 전체에 약 2000만 명의 기독교인 중 절반 정도가 콥틱 기독교인들이다. 이처럼 중동지역에서 콥틱 교회가 차지하는 위치와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특히 이집트 콥틱 교회 성도들은 또 중동의 여러 나라에서 사업가나 노동자로 진출해 살고 있다.
● 역사 콥트(Copt)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의 이집트인을 가리키는 ‘아이집티오스’(이집트인)에서 유래한다. 아랍인들이 640년 이집트를 점령할 때 기독교를 이집트의 공식 종교로 보았고, 이집트인들을 ‘킵트(Qibti)라고 불렀다.
콥틱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마가복음의 저자 ‘요한 마가’가 AD 41~42년 사이 알렉산드리아를 처음 방문한 뒤, 68년 5월 8일 이곳에서 순교의 피를 뿌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알렉산드리아의 마가 대성당은 이 집터에 지어졌다.
그래서 콥틱 교회는 요한 마가를 제1대 교황으로 여기고 있다. 2대 교황은 마가에 의해 전도를 받은 유대인 구두 수선공 출신의 ‘안니아누스’이다. 그는 자신의 집터에서 이집트 최초의 가정교회를 개척했다.
요한 마가의 순교 이후 부흥
콥틱 교회는 이후 로마 제국의 디오클레시안(284~311) 황제가 지배할 당시 303년경에 큰 박해를 받아 수많은 콥틱 교인들이 순교를 당했다. 이를 기념해 황제의 제위가 시작된 해, 즉 박해가 시작된 284년을 콥틱 교회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 교리 논쟁 주후 300년간 속사도 시대와 교부시대를 거친 기독교는 로마 황제 시대에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다 마침내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306~337)에 의해 로마의 국교로 공인됐다. 이후 국가 권력과 함께 기득권을 누리던 기독교는 교리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명목상은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삼위일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성육신 문제 등에 대해 공의회를 통해 신조(Creed)를 의결하게 된다.
그중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451년 칼케돈 신조는 교회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칼케돈 공의회를 기점으로 칼케돈 파와 반 칼케돈 파로 갈라져 교회는 완전한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이 분열은 사실 신학적인 문제와 함께 지역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콥틱 교회가 소속된 동방정통교회는 이때 반 칼케돈 파로 이후 1500년간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한 본성만 존재한다는 ‘단성론’의 반 칼케돈 파에 속한 교회는 콥틱 교회 외에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정교회 등이 있다.
1000년 이상 유지, 하나님의 은혜
● 콥틱 교회의 현재 8세기 들어 전혀 예상치 않게 이집트의 기독교와 이슬람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게 된다. 마침내 709년에는 애굽의 공용어가 아랍어로 바뀌고 모든 공문서가 아랍어로 쓰이게 되었다. 콥틱 교도들은 이슬람 통치 아래 엄청난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들은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 그리고 도망을 가거나 노예처럼 사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으로 이집트의 콥틱 교회가 1400년 이상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살던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국가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경이로운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일이다. [GNPNEWS]
자료제공 : KMQ 2013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