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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칼럼] 창조와 언약

사진: pixabay.com

1장 창조와 언약: ‘빠라’(ברה)와 ‘뻬리트’(ברית)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다 보면 그분이 이 세상을 어떠한 원리로 창조하셨는지를 조금씩 알게 되며 손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되고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하여 창조되고 주님에 의하여 운영되며 주님께로 돌아가게 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히브리어 ‘빠라’(ברה)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창조하다; 라는 뜻을 갖는다. 그러데 이 뜻은 ’자르다‘ 라는 뜻도 있다. 이것이 어디에 적용되는가? 하면 창조의 과정에 나타난다. 첫째 날의 창조에서는 빛이 있으므로 낮과 밤이 나뉘었다. 둘째 날은 궁창이 나뉘어 하늘과 바다가 되었다 셋째 날은 바다에서 땅이 나와 나뉘었다. 넷째 날은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심으로 지구와 우주가 나뉘었다. 다섯째 날은 하늘의 조류와 바다의 어류로 구분된다. 여섯째 날은 동물과 인간으로 분류된다. 창조하신 공간을 채우시면서도 나뉘는 모습이 있다.

그런데 이 ‘빠라’(ברה)라는 동사에서 언약 혹은 계약을 뜻하는 ‘뻬리트’(ברית) 라는 명사가 파생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느끼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진적으로 느낀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들어있는 이 창조와 잘라서 나눔의 성격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릴 때에 제물을 쪼개어 놓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이것을 아브라함 시대에 와서 감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조하실 때부터 이 나누어놓으심을 그의 창조의 특성 안에 두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을 어겼을 때에 나타난 결과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창세기 6장 5절에서 7절의 말씀에 잘 기록되어 있다.

(창 6:5, 개역)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6, 개역)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7, 개역)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 6:5, NKJV) Then the LORD saw that the wickedness of man was great in the earth, and that every intent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continually.(창 6:6, NKJV) And the LORD was sorry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He was grieved in His heart.(창 6:7, NKJV) So the LORD said, “I will destroy man whom I have created from the face of the earth, both man and beast, creeping thing and birds of the air, for I am sorry that I have made them.”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징벌하셨을 때에 세상은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 때의 상황은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둘째 날과 유사한 상황이 되었다. 땅은 없고 하늘과 바다만 있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질서를 어지럽히고 죄로 인한 혼돈의 상태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창조와 둘로 쪼갬의 특성을 따라 창조의 둘째 날과 같은 상태로 환원하신 것이다. 이것은 다시 질서를 잡는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따라 세상이 운영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세겜에 모은 후에 하나님을 따를 것인지 아닌 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은 양의 무리와 염소의 무리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서도 생명책에 기록되어 영생을 얻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뉜다. 이것은 창조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쪼갬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의해 운행된다. 영원의 정하심을 시간과 공간에 있는 인간이 모두 알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의 진행을 따라 순차적으로 주님이 알려주시는 것만큼 알며 주님의 뜻과 정하심을 따라 세상을 산다. 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따라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2장 언약과 유언: ‘쉰데케’(συνθηκη)와 ‘디아데케’(διαθηκη)

더욱 흥미로운 것은 히브리어의 언약을 뜻하는 ‘뻬리트’(ברית)를 헬라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후에 유대 땅으로 돌아오지 않고 외국에 머물러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았고 또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유대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알렉산더에 의하여 형성된 헬레니즘 문화와 세계에서 코이네 헬라어는 현재의 영어처럼 보편적인 언어가 되었다. 그러므로 지중해 세계가 코이네 헬라어로 하나의 언어 공동체가 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의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에 히브리어 ‘뻬리트’(ברית)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는 ‘쉰데케’(συνθηκη)이다. 그런데 번역을 이 단어로 하지 않고 유언을 뜻하는 ‘디아데케’(διαθηκη)로 했다.

이 단어는 당시의 문화 상황에서 두 가지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시대에는 이 단어가 유언을 한 당사자가 죽지 않아도 그가 일단 유언을 작성했으면 그 작성한 것을 따라 집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지중해 동쪽 지역의 문화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후에 로마가 알렉산더의 영토를 다 정복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는 로마인의 사고방식이 적용되었다. 로마인의 경우에는 반드시 유언을 작성한 자가 죽은 후에 유언이 집행된다는 것이다.

‘디아데케’(διαθηκη)를 헬레니즘 당시의 문화를 따르게 되면 히브리인이 사용하는 ‘뻬리트’(ברית)의 개념을 잘 살릴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부패와 배신에 대해서도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처벌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뻬리트’(ברית)란 단어에는 하나님의 이름, 명예가 다 걸렸다.

내가 신학생 때에 ‘언약신학’을 배웠는데 그때에 하나님의 언약은 계약자 쌍방이 맺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맺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뻬리트’(ברית)는 전치사 ‘~ 사이에’ 라는 뜻의 ‘베인’(בין)과 결합하지 않고 한쪽 방향을 향한 ‘~을 위하여’ 라는 뜻의 ‘르’(ל)와 연결된다. (수96; 사55:3,61:8; 헴32:40) 지금은 이 신학의 뜻을 나름대로 잘 이해하는데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계약을 맺어야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는다는 말인가? 일방적 계약이란 것은 계약이란 말이 갖고 있는 쌍방의 동의에 의해서만 맺는다는 기본적인 뜻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어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하나님께 어떤 조건을 걸고 계약을 맺는 것이라면 나는 그 계약조건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지금은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나를 구원하시겠다고 언약을 하는 것이 없었다면 나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젊었을 때는 내가 도덕적이고 아주 계명을 잘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보니 나는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도 아니고 계명을 잘 지킨 사람도 아니었다. 내가 나 자신의 양심으로 볼 때에 나는 구원에 이를만한 조건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디아데케’(διαθηκη)를 보다 깊이 설명하자. 칠십인경에서 ‘뻬리트’(ברית)를 ‘디아데케’(διαθηκη)로 번역한 것은 바로 ‘뻬리트’(ברית)의 일방적 언약을 잘 설명해주기 때문에 원래 언약을 뜻하는 ‘쉰데케’(συνθηκη)보다도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즉 유언을 남긴 사람이 일단 유언장을 작성하면 작성자가 살아있다고 할지라도 유언의 내용대로 실행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실천하시는 일방적 언약의 모습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디아데케’(διαθηκη)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다가 로마가 지중해 동쪽 지역을 점령했을 때에 기독교인들은 로마인의 유언문화를 받아들여 사용했다. 로마문화에서는 유언자가 죽어야만 유언장의 내용이 집행되었다. 기독교인들이 볼 때에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신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짐을 잘 설명해주었다. 성경은 창조를 뜻하는 히브리어 ‘빠라’(ברה)에서 시작하여 창조 안에 특성을 보이는 ‘둘로 쪼갬’이란 뜻이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을 뜻하는 ‘뻬리트’(ברית)로 드러나고 그것이 신약에서는 ‘유언’이란 단어 ‘디아데케’(διαθηκη)로 번역되면서 지중해 동쪽 지역과 로마의 유언 문화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스도의 죽음에 이르는 희생을 보여주었다. 이 은혜를 받는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3장 언약과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의 관계

사실 여기까지 쓰고 글을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은 내게 생각을 하나 더 불어넣으셨다. 그것은 구약에서 ‘뻬리트’(ברית)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약일 때에 사실 부당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자라고 전능하시다고 해서 그냥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구원한다는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사실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함 그리고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하여 그렇게 일방적 계약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하나님께 시비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인간이란 것이 참 묘하다.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항상 마음의 어딘가에는 갖고 있다. 나만 그런지 모르지만 사실 나라는 사람의 특성 중의 하나가 그러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수십 년이라도 마음에 갖고 있으면서 생각하고 그 해답을 찾는 성격이 내게 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뻬리트’(ברית)가 왜 쌍방 계약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 계약인가? 하는 것에 대해 사실은 상당히 불만을 갖고 성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쌍방계약이 아닌 것이 내게 유익한 것을 알게 되어 오히려 감사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한 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성에 혹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만 의지하여 ‘뻬리트’(ברית)의 일방계약을 이해하는 것은 어딘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특히 히브리어의 ‘뻬리트’(ברית)를 헬라어의 유언을 뜻하는 ‘디아데케’(διαθηκη)로 번역하면서 그리고 그것이 로마의 문화를 따라 유언을 남긴 사람이 죽어야 그 유언이 실행된다는 말씀을 듣고 가슴 저리게 은혜를 받는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인간의 구원이 최종적으로 확정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단지 그의 주권과 전능하심만으로 그리고 그의 기뻐하시는 뜻으로만 일방적으로 택한 자와 계약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후에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다 따져보고 난 다음에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 은혜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글을 쓰면서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희생을 알게 되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를 스스로 구원할 만큼 참되지도 못하고 나 스스로 죄인임을 안다. 그것을 평생에 걸쳐 깊이 깨닫는 바이고 오직 주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나의 구원을 위해 그의 영원에서부터 계획하시고 그것을 이루셨다.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행하시면서 그의 일방적 계약, ‘뻬리트’(ברית)를 성취하셨다.

나는 미련하여 1984년에 총신대학교에서 배운 언약신학의 의미를 202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온전히 깨닫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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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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