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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때로는 분리가 맞다

ⓒ 복음기도신문

순서를 기억하자. 바른 교리에서 떠나간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분리를 초래했다. 따라서 바로 믿는 사람들의 반응은 단지 잘못 믿는 사람들이 일으킨 분리를 좀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분리(separation)는 오랫동안 교회를 괴롭힌 까다로운 주제다. 사실 성경은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정작 누군가와 분리해야 한다는 개념과는 완전히 상충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각 세기가 끝날 때면 그 시기는 어김없이 인종 갈등과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거부하면서 발생하기 마련인 무수한 피의 증언으로 채워졌고, 또 한편으로 분리주의 개념에 대항하는 강력한 문화적 힘이 발생하기도 했다. 독자들이 행여 단지 설명이라는 목적 때문에 내가 이것을 언급한다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 두 가지는 분리에 대해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분리가 결코 가볍게 다뤄져야 하는 주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분리라는 개념은 교회 역사에서 오래되었고 또 논쟁의 중심에 있어 왔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끊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 그와 반면에 내가 가진 믿음의 내용과 형태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과는 적극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날 교회 환경에서 분리라는 주제는 보다 더 중요해지고 있다. 백 년 전, 자유주의자와 근본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 문제가 된 이슈는 단순했다. 그것은 초월적 기독교(supernatural Christianity)를 주장하는 사람과 기독교의 초월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초월주의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불일치는 모든 논의의 전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인은 어떻게 이 뜨겁고 또 복잡한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분리라는 주제에 접근해야 할까? 이 짧은 글로 모든 경우에 다 적용할 수 있는 만능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성경이 말하는, 분리와 관련해서 꼭 언급해야 하는 기본적인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려고 한다. 

가장 먼저, 현대에 들어서서 발생한 분리와 관련한 대부분의 토론은 다 교리 때문이었지만, 우리는 또한 성경이 특정한 부도덕성도 분리의 문제로 분명하게 다루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5장은 이 점을 아주 잘 보여준다. 성적 부도덕에 빠진 사람은 기독교인 교제에 참여할 수 없고 쫓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분리라는 생각이 공격적이고 또는 바리새인처럼 들릴지 몰라도 우리는 교리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이야말로 분리를 일으킨 진짜 주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로마서 16장 7절에서 바울은 진실된 교리를 떠나 분파를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그런 사람을 멀리하라고 경고한다. 순서를 기억하자. 바른 교리에서 떠나간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분리를 초래했다. 따라서 바로 믿는 사람들의 반응은 단지 잘못 믿는 사람들이 일으킨 분리를 좀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우리는 교제와 분리의 정도가 가진 차이를 제대로 구분해야 한다. 나는 장로교회 신자로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침례교회에서 장로나 목사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침례교도는 내가 있는 교회에서 사역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많은 침례교 친구들과 다양한 환경에서 교제를 나눈다. 어떤 경우는 공식적이고 또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나는 침례교 발표자와 함께 컨퍼런스를 하기도 한다. 침례교 목사가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침례교 친구와 온전하게 사역에 수반된 교제를 즐길 수 있는 한, 전혀 다른 믿음 체계를 가진 사람들인양 우리가 서로 분리되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어떤 경우에 분리가 일어나는지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게 한다. 분리는 바로 믿음과 불신앙의 차이로 일어난다. 이 차이는 분리라는 방정식이 가진 도덕적 측면과 신학적 측면을 모두 포괄하며 또한 기독교인 개인과 교회 전체까지도 포괄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말씀은 고린도후서 6장에 나온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14절).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 또는 데이트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물론 이런 해석도 이 구절을 적절하게 바라보는 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결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이 구절은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일반적인 원칙을 드러내고 있다. 바울이 쓴 다른 글을 보면, 그는 기독교인도 이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함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분리주의자 또는 컬트 신봉자처럼 교회 밖 다른 모든 사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결코 바울이 말하는 방식이 아님은 확실하다. 따라서 바울은 지금 여기서 신앙이 없는 사람이 장사하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믿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사업을 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교회가 믿지 않는 건축업자를 통해서 교회 건물을 짓거나 하수도 공사를 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지금 말하는 요지는 이것이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교회와 세상이 협력해서, 또는 복음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협력해서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내 침례교도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기에 나는 침례교도인 내 친구 목사가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하는 데 조금도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믿음의 근본 요소를 부정하는 누군가가, 비록 그가 장로교회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 바울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복음을 믿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 간에는 결코 동등한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적지 않은 윤리적인 원칙이 보다 광범위한 사회 환경 속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지금 상황을 고려할 때, 분리의 문제는 종종 보다 더 종합적인 맥락과 시급성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낙태 문제는 어떤가? 또는 동성 결혼은? 이런 윤리적인 문제는 많은 전통적인 종교를 하나로 만들었다. 개신교,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회, 유대인 그리고 무슬림. 그러면 분리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이런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개신교도인 내가 다른 종교인도 함께 하는 낙태 반대 집회에 참석해도 되는 걸까? 다른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과 내가 공동전선을 형성해서 이런 윤리적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의 기독교인과 사회 속 기독교인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다니는 나는 어떤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고수한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는 바울의 가르침을 적용한다. 나는 무슬림을 교회 강단에 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복음을 듣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 안에서 복음 외에 다른 메시지를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속 기독교인으로 나는 주일 교회를 나서는 순간 더 이상 내 믿음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대신 비록 영적 문제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사회라는 맥락에서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낙태 반대 집회에 참여할 수 있다. 그 집회가 종교적인 목적을 가져서가 아니라 같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확신 아래에서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 얼마든지 뭉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집회에 참석하는 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게 아니라 단지 사회 정책에 있어서 특정 윤리 문제에 관해서 내 확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같은 논리가 결혼과 성적 윤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모임이 어떤 특정 종교가 더 과도하게 드러나는 데 선전용으로 사용되거나 또는 복음의 핵심적인 차별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쪽으로 악용된다면 나는 더 이상 그런 집회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맥락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지지 말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그은 경계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문제는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 부담이 되어가는 분리와 관련한 주제인데, 바로 교단간의 연합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불필요한 분리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슬프게도 개신교의 역사는 한마디로 분리의 역사다. 그것은 그동안 얼마나 개신교회가 일치에 관해서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큰 교단 안에서 발생한 정통의 붕괴가 평범한 기독교인에게 심각한 도전을 초래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나 다 교회 지도자가 딱 한 번 심각한 문제의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했다고 교회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지만, 문제는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가다. 언제 바울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이 명령에 따라서 결단해야 하는가의 여부다.  

모든 상황은 다 다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기본 원칙이 있다. 기독교의 정통 신앙 고백을 적용하기 위해 확립한 기본 과정을 통해 지켜지는 복음의 기초가 유지될 수 없을 정도로 교회가 타락했다면, 그때는 그 교회를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가 부활을 부인한다고 그 즉시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능한 교회법에 따른 모든 법적 절차를 다 동원해도 지도자가 여전히 그런 이단 메시지를 전한다면, 그때는 떠나야 한다. 분리는 힘들고 또 지금 이 시대의 문화와도 맞지 않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환경에 처하면 분리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명령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불필요한 분리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슬프게도 개신교의 역사는 한마디로 분리의 역사다. 그것은 그동안 얼마나 개신교회가 일치에 관해서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준다

Carl R. Trueman | 펜실베니아 그로브시의 Grove City College 성경과 종교학 교수. www.tgckorea.org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협약에 따라 본지에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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