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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가장 낮은 자에게 복음의 빛을 안겨준 선교사

무어 선교사 (Samuel Foreman Moore 1860-1906)

은혜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조건없이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호의’라면, 비할 데 없는 최고의 은혜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죄인에게 베푸시는 십자가복음이다. 주님은 이 민족의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 자들에게 이 고귀한 은혜가 베풀어지도록 한 사람의 축복의 통로 를 세우셨다. <편집자>

“우리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으니 선교사님도 알아야 할 것이요” 갑자기 교회에 나오기를 거절한 양반 교인 중 한 명이 무어 선교사에게 말했다.

“우리가 귀천 분리의 많은 풍속을 포기하 였기에 우리보다 한참 낮은 계층의 낮은 사 람들과도 함께 앉는 것을 용납할 수 있소. 하지만 백정을 교회로 들여서 함께 앉는 것 은 도저히 참을 수 없소. 그리스도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이렇게 계속할 수는 없소.” 당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라는 사람이 세례교인이 되어 양반 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자 이와 같이 양반 교인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양반 교인들은 가치관 전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복음을 전부로 수용할 수 없는 연약함을 드 러냈다.

이 일은 무어 선교사가 세운 곤당골교회 에서 1895년에 일어났다. 언더우드 선교사 의 영향을 받아 한국 땅을 밟은 무어 선교 사는 백정과 같은 최하층민들에게 각별한 열정과 애정을 쏟으며 선교 사역을 감당했 다. ‘천민 사역’으로 인해 그는 외부로부터 는 몰이해와 조롱을, 내부적으로는 불일치 와 불만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떤 선교사는 미국에도 낮은 계층의 사 람들이나 흑인들과 따로 예배드리려는 사 람들이 많은데 역사가 짧은 한국교회 초신 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 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어 선교사 는 물러서지 않고 조선의 최하층민인 백정 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교회로 이끌었다.

곤당골교회에 4명의 백정이 학습교인이 되었을 때였다. 양반들은 예배당 앞쪽으로 양반자리를 따로 마련해주고, 백정들의 자 리는 뒤쪽에 만들라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만약 이마저 들어주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 겠다고 압박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교 회 안에 계층의 구분을 두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양반들의 요구 를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양반 교인들은 창덕궁 근처에 홍문섯골교회를 따로 세웠다. 양반들이 떠나버린 아픔을 뒤로하고 곤당 골교회 교인들은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전 도인을 파송하기 위해 힘써 작정헌금을 하였다.

그 열매로 노방전도에만 전념할 수 있는 전도인 두 사람이 세워졌고, 점점 더 많은 백정들과 서민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3년 후인 1898년에 곤당골교회당에 화재 가 발생했다. 주님은 이 일을 통해 곤당골 교회와 홍문섯골교회가 다시 연합하게 하 셨다. 전에 갈라져 나갔던 홍문섯골교회 교 인들은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곤당골교 회와 합하여 중앙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그 뒤에 오늘의 승동교회(서울 종로구 인사동 소재)로 발전했다.

이같이 무어 선교사는 ‘백정 전도의 개척자’라 불렸다. 그는 1895년 갑오개혁을 통 해서 조선 유교 사회의 신분차별이 법으로 철폐되었을 때, “나는 이것이 복음을 전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천대받아 온 계층에서 한국인 성도들을 많이 불러내실 것이라고 믿습니다.”라며 조선의 가장 ‘낮은 자’들을 향한 그리스도 의 마음을 내비쳤다. 그는 매일 아침 20~30명의 한국인들과 만나 사귀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서울 거리와 한강 유역에 있는 천민들의 마을들로 찾아가 전도했다. 특히 백정 출신인 박성춘은 경기도 일대의 백정 들을 대상으로 전도에 힘썼다.

그 결과 일부 성도들은 신주(神主)를 불 사르고 가정예배를 드리거나, 제사를 그만 두어 주위로부터 모진 핍박을 받기도 하고, 성경공부 모임을 조직하기도 하는 등 적극 적으로 복음에 반응을 보였다. 1898년 한 해 동안만 무어 선교사는 33명의 백정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해 경기도에만 132명의 백정들이 교회에 출석했다. 병들고 가난하고 억눌림을 받는 사람들 과 늘 가까이 지내던 무어 선교사는 결국 장티푸스에 전염되어, 1906년 12월 22일 제중원(1885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서양 의료기관)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는 그의 묘에는 그의 첫 열매인 승동교회와 마지막 열매인 동막교 회가 세운 추모비가 은혜의 통로로서의 그 의 복된 삶을 지금도 증언하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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