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저 같은 죄인을 십자가 앞에 다시 세우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私のような罪人を十字架の前に再び立たせろという使命をいただきました”

십자가로 이끄는 목회자 박원옥 목사 (부천산돌교회)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는 어떻게 주님을 만난 ‘첫 사랑’을 기억하며, 복음의 능력을 누리고 있을까? 매년 수천 명의 목회자를 배출하고 있는 한국에서 목회자로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주님의 부르심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의 본질을 살아내고자 몸부림치다 마침내 ‘나의 죄인됨’을 깨닫고 성도들을 십자가복음 앞에 세우는 ‘복된 삶’을 누리고 있는 박원옥 목사를 만났다.

– 믿음의 삶을 이야기할 때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삼천포로 알려진 경남 사천시 바다마을 출신이에요. 대대로 불교와 유교와 샤머니즘이 혼합된 가정에서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죠. 아버지는 이발하는 일을 하셨는데, 제가 일곱 살 때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때 어머니는 스물여섯이셨죠.”

– 어머니 혼자 가정을 꾸려나가시기 만만치 않았겠군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이후에 어머니와 저희 삼형제는 큰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장사를 하셨죠. 이런 저런 껍데기들까지 보이는 대로 주워 먹던 기억이 나요. 배가 많이 고팠던 시절이었죠.”

– 장남으로 가정 살림에 대한 부담감을 일찍부터 갖고 계셨을 것 같군요.
“13살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생활을 했죠. 바닷가에 살았으니까 배의 전기장치 관련 기술을 배웠고, 혼자 배를 타고 섬들을 찾아다니면서 수금 하는 일을 하기도 하구요. 일찍부터 사회경험을 했죠.”

– 일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겠죠?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럴 상황이 안됐어요. 주위에서도 ‘공부보다 기술을 배워야한다’는 분위기였죠. 제가 15살 때 저희 가족이 큰집에서 나와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때도 신문배달, 아이스크림 판매, 전파상 직원 등 어떤 일이든 할 수만 있다면 했어요. 그렇게 생업에 매달려야 했죠. 그런데 학업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죠.”

학업에 대한 아쉬움으로 교회 출석

– 학업과 교회가 무슨 연관이 있었나요?
“당시에 정규 학교에 가지못한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기관에서 야학과정을 운영했어요. 그런데 한 교회가 야학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교회를 다니게 된거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교회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저의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죠. 그리고 신학을 하게 된 것도 야학 선생님이었던 당시 전도사님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 신학교를 가겠다는 결정에 대해 가족들은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물론 반대했죠. 특히 어머니와 갈등이 심했어요. 하루는 제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눈물이 마르지 않은 채로 교회 문을 나서는데, 저를 기다리시던 어머니께서 화를 내시며 다그쳤어요. “니 애미가 죽었냐? 왜 우냐?”라며… 이해하시기 어려우셨겠지요. 나중에는 ‘모자지간(母子之間)의 연을 끊자’라고까지 하셨죠. 그래도 어머니에게 계속 복음을 전했어요. 마침내 주님이 결국 그 마음을 돌이키셔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잘 하고 계세요.”

– 지금 섬기시는 교회가 처음 개척하셨던 그 교회라고 들었습니다.
“31년 전인 82년에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일단 처갓집 거실에서 교회를 개척했어요. 교인은 가족들 밖에 없었지요. 두 달여 후에 이 근처 ‘장씨 마을’에 한 공간을 빌리게 되었고, 당시 거름더미가 쌓여있던 장소를 치우고 자그마한 천막을 치고 본격적으로 교회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르렀죠.”

한국교회 회복 비전갖고 교회를 개척

– 개척하실 때 목회에 대한 어떤 비전이 있으셨나요?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공동체로서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교회를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독립운동이 있었던 3월 1일 오후 2시에 개척예배를 드렸죠. 순수하게 목회하려고 애를 썼어요. ‘내 것이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집을 팔아서 다 헌금을 하고, 주님만 믿고 따라가기로 결심하고 시작했죠.”

–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 생활과 재정에 대한 어려움이 실제적으로 하루하루 닥쳐오니깐 교회 성장에 대한 압박감이 밀려오더군요. 그리고 제가 설정한 목회방향대로 교회 분위기가 흘러가지 않는 점도 갈등요소였죠. 그런데 이런 갈등이 나중에는 한국교회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이 되더군요. 제 자신이 마치 정의의 사도인양 선배들의 목회 현장과, 성장 위주의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일삼았죠. 설교도 구약의 예언서를 가지고 비판적인 설교만 했던 것 같아요.”

–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되셨나요?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이 모든 것 보다 저의 존재적인 문제들이 저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어요. 처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해도 끊을 수 없는 죄에 대한 문제가 저를 더 미치게 하는 것이었죠. 한국교회의 문제보다, 변하지 않는 교인들보다, 끊임없이 설교를 하지만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 제 자신 때문에 절망스러웠던 거죠.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별 짓을 다했어요. 그래도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알 수 없었죠.”

–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눠주신다면요.
“저는 스스로 겉보기에는 괜찮은 목사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죄의 실제적인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죠. 그래서 죄 부분에 대해서 설교할 때에도 결정적인 부분을 말할 수 없었어요. 사탄이 저의 죄를 알기 때문에 계속적인 정죄가 있었고, 그렇게 자기 죄에 종노릇하면서 절망에 붙들려 있는 제 모습, 그것이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죠. 가족을 비롯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속이면서, 겉모습을 위장하는 삶을 살았던 거죠.”

죄에 종노릇하면서 겉으로는 위장

– 그러면, 죄가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있을까요?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죄의 내용은 자기만족, 자기도취, 자기를 숭배하고 끊임없이 추구하게 만드는 정욕과 향락으로 채워져 있지요. 교회 안에서도 목회 성공과 인기, 세상과 똑같이 싸움과 다툼과 미움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죠.”

– 그런 죄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을 통해서 은혜의 복음을 만나게 되셨군요.
“안식년을 통해서 제가 십자가복음 앞에 서는 은혜를 누리게 됐어요. 죄가, 영원한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십자가의 예수님과 믿음 안에서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깨닫게 되었죠.”

– 복음을 만난 이후에 실제적인 변화들이 있었나요?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아내와 아이들에게 저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어요. 저는 회개가 입술로 시인하고, “주님아시죠? 미안해요.”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속았던 거죠. 십자가 앞에서 회개가 무엇인지, 죄를 떠나는 것이 무엇인지 철저히 보게 되었어요.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다고, 사람 앞에서 눈가림을 한 채,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복음을 무력화시키는 사단의 엄청난 속임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경험

– 자신의 죄 된 존재를 드러내시는 시간을 통해 특별한 은혜를 누리셨군요.
“네. 죄를 드러낼 때, 정말 두렵더군요. 그런데 그 사건을 통해 진정한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어요. 주님은 저를 다시 세우셨고, 저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얻게 되었어요. 그때 비로소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인다’는 찬송의 고백이 실제가 되었어요. 또 나를 짓누르던 모든 어둠과 두려움들이 사라졌죠.”

– 목회 현장은 어떠셨나요?
“먼저 설교가 달라졌어요. 실제로 교회 중직들이 와서 ‘성도들이 죄에 대한 설교를 많이 힘들어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고, 헌금도 줄어들고 있다.’고 하소연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그렇게 좋으세요? 정말 복음이면 충분하세요?”라고 물어보는 교인들도 있었어요(웃음). 그래도 지속적으로 십자가 복음을 전했는데 이제는 조금씩 변화되는 교인들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아 감사해요.”

명목상의 성도들을 다시 십자가 앞으로

– 그 십자가 복음이 삶에서 실재되는 경험을 하신 이후, 어떤 비전을 가지고 목회를이어가고 계신가요?
“사실 복음 앞에서 비춰진 저의 실존을 보고 ‘나는 목사를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목회를 내려놓아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참석한 한 집회에서 선교사로 헌신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목회현장을 내려놓고, 해외 선교사로 헌신하려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허리 밑으로 강한 통증이 와서 다시 주저앉게 되었어요. 마치 누군가가 저를 눌러 앉히는 느낌이었죠.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 그 사건의 의미가 궁금해지는군요.
“나중에 그 의미를 깨닫게 됐어요. 해외선교사가 아닌, 지금 저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목회로 다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던 거죠. 얍복 강가에서 주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던 것처럼, 주님이 저를 꺾으시고 자격 없는 저를 다시 세우셔서 지금 교회 안에서 예전의 저와 같이 고통 중에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십자가복음 앞에 세우라는 소명을 주신 거죠. 이것이 지금 제 목회의 부르심입니다.”

– 지금은 어떤 은혜를 누리고 계신가요?
“저는 지금 허락하신 이 상황이 너무나도 행복해요. 주님 때문에 행복한 거죠. 문제는 이 행복을 나 혼자만 누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에요. 이 행복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지고, 안락해서 오히려 점점 불편해지고 있어요. 너무 과한 누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최근 주변 정리를 좀 해야겠다. 짐을 가볍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떻든 주님 때문에 너무 행복해요.”

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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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字架へ導くバク・ワンオク牧師(ブチョンのサンドル教会)

福音を伝える牧師はどのように神様に出会い、その’初の愛‘を覚えて、福音の能力を感謝しているのか。毎年数千人の牧師を輩出している韓国で、牧師として教会に仕えているのはどんな意味なのか。神様の呼びかけによって教会を開拓して、福音の本質のままに生きようとして、ついには’自分の罪人としての存在‘に気付いて、聖徒たちを十字架の福音の前に立たせる’祝福の人生‘を感謝しているバク・ワンオク牧師に出会った。

-信仰の人生を話す時、幼年時代の話がなくては。。
“サンチョンポとして知られているギョンナン道、サチョン市の海の村出身です。代代に仏教とシャマニズムが混ぜてある家庭で、三兄弟の長男として生まれました。お父さんは床屋さんをしていましたが、私が7歳の時、早くなくなりました。その時、お母さんは26歳でした。”

-お母さん一人で家庭を養っていて大変だったでしょうね。
“お父さんがなくなってから、お母さんと私たち三兄弟はおじさんの家で住みました。お母さんは商売をしました。あんなこんな皮を見るたびに拾って食べていた記憶があります。お腹がすいていた時代でした。”

-長男として家庭の生計に対しての負担感を早くから持っていたと思いますが。。
“13歳から昼には仕事をして、夜には勉強する生活をしました。海で住んでいたので、船の電気装置関連の技術をならって、ひとりで船に乗って島を訪ねながら、集金する仕事をしたりもしました。早くから社会経験をしました。”

-仕事しながら勉強するのは、大変ではなかったですか。
“勉強がしたかったです。しかしそんな状況ではなかったですね。周囲でも‘勉強より技術を習わないといけない’という雰囲気でした。私が15歳の時、家族がおじさんの家から出てソウルへ引っ越ししました。その時も新聞配達、アイスクリム販売、電気屋さん職員など、どんなことでも出来ることはやりました。そのように家計のために頑張りました。”

学びに対しての物足りさで教会出席

-学びと教会は何の関係がありましたか。
“当時定期学校へ行けなかった人たちのために、多様な機関で夜学過程を運営していました。しかしある教会が夜学を運営していたのです。それでその教会に通うようになりました。昼には仕事をして、夜には教会で勉強をしました。そのように信仰生活を始めて、イェス様を信じるようになりました。私の存在の意味を悟る時間でした。そして神学を学ぶようになったのも、夜学の先生だった当時の伝道師の勧めがあったからです。”

-神学校へ行くとの決定に対して家族たちはどのように反応しましたか。
“勿論反対しました。特にお母さんとの葛藤がありました。ある日は私が昇天の祈祷会を終えて、涙ぐんで、教会の門を出ようとした時、私を待っていたお母さんが怒って言いました。‘あなたはお母さんが死んだのか。なぜ泣いているの?’と。。理解しにくかったでしょう。後には‘母子の縁を切ろう’とまで言いました。それでもお母さんに続けて福音を伝えました。ついに神様が結局、その心を変えてくださって、いままで信仰生活をよくしていらっしゃいます。”

-いま仕えている教会が初めての開拓した教会だと聞きました。
“31年前の1982年に神学校を卒業して、一旦妻の実家の居間で教会を開拓しました。聖徒は家族だけでした。2カ月後にこの近所の‘ジャンさん村’というある空間を借りて、当時油が積んであった場所を片付けして、小さな天幕をかけて、教会を始めてに至ります。”

韓国教会の回復のビジョンを持って、教会を開拓

-開拓する時、どんなビジョンを持っていましたか。
“韓国教会が真に救われる共同体としての回復が必要だと思いました。それで‘教会を変える教会になろう’というスローガンを出して、独立運動があった3月1日午後2時に開拓礼拝を捧げました。純粋な牧師になろうと努めました。‘私の物でないといけない’と思って、家を売って全部献金に捧げて、神様だけを信じて従おうと決心して始めました。”

-大変な時はありませんでしたか。
“教会に仕えている間で、生活と財政に対しての大変なことが実際に寄せ押すと、教会成長に対しての圧迫感がありました。そして私が設定した方向のままに、教会雰囲気が流れないことも葛藤の要素でした。しかしこんな葛藤が後には、韓国教会に対しての不満として出てきました。私自身がまるで正義の使徒のように、先輩たちの教会の現場と、成長を第一にする韓国教会に対しての批判と非難をよくしました。説教も旧約の預言書をもって、批判的な説教が主でした。”

-そんな状況でどのように自由を得るようになりましたが。
“しかし正直に言うと、この全ての事より、私の存在的な問題が私をもっと苦しめました。すごく悲しんで涙を流して、悔い改めても絶えない罪に対しての問題が、私を苦しめました。韓国教会の問題より、変わらない聖徒たちより、絶えない説教しているが、本当に変わらない自分のせいで絶望でした。この問題を解決してみようと、いろんな事をしました。それでも何が問題であるのかさえ分からなかったです。”

-もっと具体的に言ってもらえないでしょうか
“私はみずから表では良い牧師だと思っていました。しかし否定できない罪の問題に対しては、自由になれなかったです。それで罪の部分に対して説教する時には、決定的な部分においては言えなかったです。サタンが私の罪を知っているので、持続的な罪の定めがあって、自分の罪に縛られている絶望におかれている私の姿、それが死よりももっと怖かったです。家族を含めて、他の人たちを欺いて、他の人たちを欺いて、表面を偽装する人生を生きたのです。”

罪に縛られて、表面は偽装

-そうすると、罪は何であると定義できますか。
“罪は本質的に神様に逆らうことです。そしてその罪の内容は、自己満足、自己を崇拝して、絶えず追及する情欲と行楽に満ちていることです。教会内でも牧会成功と人気、世と同じ戦いと喧嘩と憎しみの実になって現れます。”

-そんな罪に対しての凄絶な葛藤を通して、恵みの福音に出会うようになったんですね。
“安息年を通して、私が十字架の福音の前に立っている恵みをいただきました。罪が、永遠の死が、どんなに怖いことであるか、十字架のイェス様と信仰で連合することがどんなに大きな恵みであるか気付くようになりました。”

-福音に出会った以来、実際的に変化がありましたか。
“教会で聖徒たちに、妻と子供たちに私の全ての罪を告白して謝りました。私は悔い改めが口で認めて、‘神様、知っているでしょう?ごめんなさい’と言えばそれでいいと思いました。騙されていました。十字架の前で悔い改めが何であるか、罪から離れることが何であるかを、徹底的に気付くようになりました。神様の前で悔い改めても、人の前で罪を認めず、許しを求めないならば、それは福音を無力化させるサタンの欺瞞だと知りました”

十字架の死と復活を経験

-自分の罪人である存在が現される時間を通して、特別な恵みをいただいたのですね。
“はい。罪を現される時、本当に恐れました。しかしその事件を通して、真の‘死’と‘復活’を経験しました。神様は私を再び立たせてくださって、私は本当の自由と喜びを得ました。その時、‘世と私は行くところなく、救い主の主だけが見えます’という讃美歌の告白が実在になりました。また私を圧していた、全ての暗闇と恐れがなくなりました。”

-教会の現場はどうでしたか。
“まず説教が変わりました。実際に教会の役人たちが来て、‘聖徒たちが罪の対しての説教を辛く思っていて、離れる人もいて、献金も減っている’と言ってきました。そして私に‘そんなにうれしいですか。本当に福音だけで十分ですか’と聞く聖徒もいました(笑)。それでも持続的に十字架の福音を伝えましたが、いまはすこしずつ変わる聖徒たちの姿が見えて感謝です。”

名目上の聖徒たちを再び十字架の前へ

-その十字架の福音が、人生で実在する経験をした以後、どんなビジョンをもって進めていますか。
“実は福音の前に映された私の実存を見て、‘私は牧師をする資格がない’と思いました。それで牧師を辞めようとしました。ちょうどその時、私が参加していた集会で宣教師として献身する時間がありました。教会の現場を下して、海外の宣教師として献身しようと立ったが、急に腰に激痛が走って、座りこむようになりました。まるで誰かが私を押して座らせる感じでした。そんな経験は初めてでした。”

-その事件の意味が知りたいです。
“後でその意味に気付きました。海外の宣教師ではない、今の自分にとって決して全うできない牧師として、再び呼んでくださる神様の恵みでした。ヤッポクの側でヤコブの足の骨を折らせたように、神様が私を折って、資格ない私を再び立たせて、今の教会の中で以前の私のように苦しみの中にいる、名目上のクリスチャンたちを再び十字架の福音の前に立たせろという、使命をくださったのです。これがいま私への召しです。”

-いまはどんな恵みをうけていますか。
“私はいまのこの状況がとても幸せです。主のために幸せです。問題はこの幸せを一人だけいただけないという事実です。この幸せに慣れて、楽になって、安楽して、だんだん不安になっています。溢れるほどの恵みだと思います。それで最近周辺整理を少ししよう。荷物を軽くしようと思っています。とにかく神様のためにとても幸せです。”

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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