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내 인생은 나그네 길이요…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늘의 복을 사모하나 땅을 딛고 사는 자요, 열방의 복의 근원으로 크나 큰 부르심을 받았으나 질그릇 같이 유약한 육신을 입은 자였던 야곱…. 그러기에 위기일 수밖에 없는 그의 삶에 영혼의 닻처럼, 불도장(인)처럼, 붙들었고 새긴바 된 하나님의 표식(sign)이 있다.
벧엘. 그곳은 야곱의 영혼의 나침반 같은, 지명(地名) 이상의 곳이다. 위기와 혼돈의 순간마다 그곳을 건드리면 방향이 잡히고 누구도 줄 수 없는 위로와 용기가 생기고 잡념이 사라지고 새로운 믿음이 솟아난다. 순례의 여정 중에 만난 큰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표식을 보이셨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다. 너는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운명적 위기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하던 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태어나기 전부터 육정을 거스르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이 부르심은 저항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늙은 아버지 이삭의 혼돈과 고집, 형 에서의 살기(殺氣)에 찬 위협,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야곱의 최선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는 거짓밖에는 길이 없어 보였다.
결국 이 일은 기약할 수 없는 도망자의 길로 그를 내몰았고 그 누구의 보호도 어떤 보장도 없는 여정으로 들어서게 했다. 그가 만난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오직 홀로, 가장 무력한 자로, 약속에서 멀어져 버린 절망의 이 땅에서, 그리고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운명에 내던져진 바로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조상들의 하나님이 바로 너의 하나님이심을! 그 약속을 반드시 내가(하나님) 성취하리라!고. 너와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절망을 소망으로, 두려움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신 것이다. 다른 이에게는 ‘루스’라고 불리던 그 땅이 야곱에게는 벧엘이 되었다. 기름을 붓고 제단을 쌓고, 서원을 했다. 운명적 위기는 운명적 결단을 하게 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가 되실 것입니다!”
외적 위기 밧단아람에서 라반을 떠나 도망하던 때.
신앙결혼을 하겠다고 지켜온 순절은 외삼촌이자 장인이 된 라반의 세속적 기만행위로 4명의 부인과 함께 하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삼촌 라반의 탐심의 울타리는 수용소의 철조망보다 견고해 보이고 무법한 그의 계략으로 귀향길은 까마득한 꿈이 되었다.
밤낮 없는 그의 수고로도 보상받지 못한 20년의 노력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소유는 늘었으나 그 일이 화근이 되어 이제는 더 이상 머무를 수도, 평화적으로 떠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위기’ 자체였다.
야곱,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그 밤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벧엘로 올라가라!” 벧엘로 가는 일은 위협적이었으나 결코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하나님의 길이었다.
내적 위기 가다가 멈추어선 타협의 자리, 세겜 땅에서 당한 위기였다.
벧엘에 가까이 왔으나 우선 안주한 곳 ‘세겜’은 그의 가족들의 내적인 신앙모습과 흡사했다. 딸 디나의 분별없는 호기심은 강간사건의 빌미가 되었고 오라비인 시므온과 레위의 거짓과 잔혹한 보복행위는 세상의 어떤 악함보다 전혀 모자람이 없는 A급 범죄였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하늘의 부르심을 소유한 거룩한 공동체, 그들의 내적 위기의 수위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세속과 구별되지 않은 이름만 남은 야곱 공동체에는 잡다한 우상들이 숨겨져 있었고 육적 소욕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세상 그 자체였다.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 선 야곱, 그에게 그의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벧엘로 올라가라” 드디어 이르게 된 벧엘에서 30여년 전 드렸던 서원을 따라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매 야곱을 이스라엘로, 도망자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신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 그에게는 ‘벧엘의 하나님’이 계신다.
이제, 당신에게 하나님은 어떤 표식을 주셨는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서는 나그네가 된 자. 복의 근원으로 직임 받은 질그릇에 거하는 자. ‘그 날’을 바라며 결코 멈출 수 없는 순례의 길 가는 자에게 세상은 위기의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충돌과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위기-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이 다르고 결코 섞일 수 없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피해갈 수 없는 위기-가 존재한다.
눅 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갈 4:29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도다.
이 땅에 속하지 않은 하늘의 순례자를 놓아두지 않으려는 외적위기가 끊이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의 유업을 빼앗으려는 사단에 속한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주관자가 그들을 둘러 진치고 위협하며 미워하고 핍박한다.
요 15:18~20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사람들이 나(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하리라.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위기는 내적위기이다. 암 5:17 사자와 곰을 피한 후에 제 집에서 뱀에게 물려 죽은 자와 같이 적당한 타협을 가장한 세속의 더러운 가치가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경계를 허물고 때로 영적인 모습으로 또는 인간 중심의 합리주의로 사데 교회 같은 위기로 교회를, 공동체를 위협한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광야 노정의 위기는 완전하신 하나님, 전능자의 그늘 아래 피한 자 만이 승리할 수 있다. 어떤 위기에서든 영혼의 닻처럼, 등대처럼 그곳만 건드리면 방향이 잡히고 위로와 용기가 솟구치고 새로운 믿음이 약동하는 ‘벧엘’ 하나님의 표식을 가진 사람 말이다.
바울은 이렇게 외친다. “그러나 내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갈 516)” 오직 십자가면 충분했다. 갈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곳만 건드리면 혼돈은 확신으로 위기는 승리로 바뀐다. 벧엘로 올라가라! 십자가로 나아가라!
할렐루야! 오직 십자가만이 자랑이 된 자.
「그날이 오기까지」에서 전재
ときに神はヤコブに言われた、‘あなたは立ってベテルに上り、そこに住んで、あなたがさきに兄エサウの顔を避けてのがれる時、あなたに現れた神に祭壇を造りなさい’(創世記35:1)
‘私の人生は旅人の道であり。。険しい年月を送りました。’
天の祝福を望んでいるが、地を踏んで生きる者よ、世の祝福の根本として大きくて、大きく声かけをいただいたが、土器のように柔弱な肉親を持ったヤコブ。。。それなので危機になるしかなかった彼の人生に、霊のいかりのように、火の印鑑のように、捕まえて刻んだ神様の記し(sign)があります。
ベテル。そこはヤコブの魂の羅針盤のような、地名以上の場所です。危機と混沌の瞬間の時に、そこを触ると方向が決まり、だれもくれない慰労と勇気が生じ、雑の考えがなくなり、新しい信仰があふれでます。巡礼の旅の中で会った大きな危機の時に、神様はヤコブに標識を見せてくださいました。
‘私はベテルの神様である。あなたは起き上り、ベテルへ上りなさい!’
運命的な危機、兄さんエサウの顔を避けて逃亡した時
‘大きな者が小さいものに仕える’、生れる前から肉情にさからう、ただ神様からの呼びかけは、抵抗を受けないはずがありませんでした。年寄りのお父さんイサクの混沌と頑固、お兄さんからの殺気の脅威、お母さんリベカと一緒にいられなかったヤコブの最善は、お父さんとお兄さんを欺くしか道がなさそうに見えました。
結局、このことは予期できない逃亡者の道へと彼を追い出して、誰の保護も、どんな保障もない旅へと歩き出しました。彼が会った一生一大の‘危機’でした。天の下、地の上に、たった一人で、一番無力者として、約束から遠ざかる絶望のこの地で、そして自身から何も期待できない運命に追いだされたその時。。
天が開いて、生きておられる神様が現れました。先祖たちの神様が、つまりあなたの神様であることを!その約束をかならず私(神様)が成し遂げる!と。あなたと永遠に共にいる!と。
絶望を希望へ、恐れを確信へと変えてくださることです。他の人たちには‘ルス’と言われる、その地がヤコブにはベテルになりました。油を注ぎ、祭壇を築き、誓願をたてました。運命的な危機は、運命的な決断をするようになります。‘ただ神様だけが主になります!’
外的危機、バッタンアラムでラバンを離れて逃亡したとき.
信仰結婚をすると守ってきた貞節は、おじさんであり、義理のお父さんになるラバンの世俗的な欺きの行為で、4人の妻と共の混沌へとおぼれて、おじさんラバンの貪欲のかこいは、収容所の鉄条網より硬く見えて、無法な彼の計略で帰郷への道ははるかに遠い夢になりました。
昼も夜もない彼の苦労でも償えない20年の努力は、神様の奇跡的な介入で所有は増えましたが、そのことが火の種になり、これからはこれ以上住む場所も、平和的に離れることもできない、選択がない危機に会いました。彼を囲むすべての状況が‘危機’そのものでした。
ヤコブ、彼が出来ることは何もなかったその時、その夜に神様が現れました。‘ベテルへ上りなさい!’ベテルへ行く道は危険なことでしたが、決してだれも手出せない神様の道でした。
内的危機、行く途中に止まって妥協の場、セゲムの地であった危機でした。
ベテルへ近くなったが、まず安住した場所、‘セゲム’は彼の家族たちの内的な信仰の姿とよく似ていまいた。娘デナの分別ない好奇心は、強姦事件になって、お兄さんであるシムオンとレイの嘘と残酷な報復行為は、世のどんな悪と全然比べられないほどのA級犯罪でした。
‘塩が味を失うと何でしょっぱくするだろうか’天の声かけを所有した清い共同体、彼らの内的危機の水位を見せてくれた事件でした。世俗と区別できない名前だけ残ったヤコブ、共同体には数多い愚像たちが隠されていて、肉的欲がまっぴらに現されるこの世、そのものでした。絶対絶命の危機の前に立ったヤコブ、彼に神様が現れます。
‘ベテルへ上りなさい’ついに到達したベテルで、30年前に捧げた誓願によって祭壇を築き、ヨホバの名を呼んだヤコブをイスラエルへと、逃亡者を祝福の元へと立たせてくださいます。イスラエルになったヤコブ!彼には‘ベテルの神様’がいらっしゃいます。
これから、あなたに神様はどんな標識をくださいましたか。天の呼びかけをいただいて、この地では旅人になったもの。祝福の元として召された土器にとどまるもの。‘その日’を望み、決して止めない巡礼の道を行く者に、世は危機の旅にすぎないです。
衝突と抵抗を受けるしかない運命的な危機―肉親の考えと聖霊様の考えがちがっていて、決して混ざれない天の呼びかけをいただいた者には、避けられない危機―が存在します。
ルカの福音書9:23 それから、皆の者に言われた、‘だれでも私についてきたいと思うなら、自分を捨て、日々自分の十字架を負うて、私に従ってきなさい。 ガラテヤ人への手紙4:29 しかし、その当時、肉によって生まれた者が、霊によって生まれた者を迫害したように、今でもどうようである。
この地に属してない天の巡礼者を、ほっとこうとはしない外的危機は絶えないです。キリストイェスに属した人の遺業を奪おうとする、サタンに属した世と権力と暗闇の主管者が、かれらを追うて脅かして嫌って迫害します。
ヨハネの福音書15:18~20 もしこの世があなた方を憎むならば。。。。。。もし人々が私(イェスキリスト)を迫害したなら、あなた方をも迫害するであろう。
しかし何より深刻な危機は、内的危機であります。アモスの書5:19 人がししの前を逃れてもくまに出会い、また家にはいって、手を壁につけると、へびにかまれるようなもののように適当に妥協を、一番世俗の汚い価値が、清いキリストの体である教会の境界を崩して、時には霊的な姿でまたは、人間中心の合理主義で、サデ教会のような危機へ教会を、共同体を脅かします。
きわどく見える荒野の道旅の危機は、完全なる神様、全能者のかげの下に身を隠したものだけが勝利できます。どんな危機であれ、魂のいかりのように、灯台のように、そこだけを触ると方向が決まり、慰労と勇気があふれ出て、新しい信仰が動き出す‘ベテル’神様の標識を持ったひとであります。バウルはこのように叫びます。‘しかし私にはキリストイェスの十字架以外には決して自慢できない(ガラデヤ人への手紙5;16)’ ただ十字架であれば十分でした。カルボリ、キリストの十字架。そこだけ触れれば、混沌は確信へと、危機は勝利へと変わります。ベテルへ上りなさい!十字架へ出なさい!
ハレルヤ!ただ十字架だけが自慢になるもの。
≪巡回宣教団 代表≫
[その日が来るまで]から転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