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울 것이 없는 단란한 가정. 그런데 갑작스레 찾아온 병과 그로 인해 점차 삐거덕거리게 된 부부 사이. 결국엔 이혼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주님은 그 남편을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사실은 자신이 먼저 주님으로부터 설명할 수 없는 용서를 받은 자임을 깨닫게 됐다는 김경희 선교사. 그의 삶에 새겨진 ‘용서’. 그 사랑이 그녀를 주님께 헌신하여 캠퍼스 선교사로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기록하게 했다.
그녀는 헤브론선교대학교를 섬기는 교육선교사로서 지난 1년간 주방장을 맡아 섬겨왔다. 주방은 교회에서도 해보지 않았던 직임이다. 평생 직장과 가정을 오가는 생활을 했던 그를 잘 아는 교회의 배려였다. 캠퍼스이니만큼 학생들의 양육과 교제를 기대했으나 그 꿈은 시작부터 산산조각 났다.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서 그녀를 새롭게 빚어가셨다.
– 주방을 모두 몇 분이 섬기고 있나요?
“주방을 섬기는 선교사는 모두 3명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주방장인데, 나중에 합류하신 한 분은 주방 일을 정말 잘하시는 분이었죠. 그러다보니 적잖은 갈등으로 어려웠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얼마나 사랑이 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됐어요. 오직 주님의 마음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다시 알려주셨죠. 사실 이전에 나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남편을 용서하게 해주셨던 사실을 떠올려주셨어요.”
– 지나간 시간을 조금 나눠주세요.
“남편은 처음에 참 가정적이고 모범적인 사람이었어요. 결혼 생활에 차츰 금이 갔던 이유는 신앙의 문제였던 것 같아요. 저는 대학시절에 선교단체를 통해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을 만났고 졸업 할 때까지 성경책을 끼고 복음을 전하러 다녔죠. 남편은 믿지 않는 사람이었고 이런 제 과거의 모습을 두고 서로 어려움을 겪었어요.”
결혼 하면 함께 교회에 가겠다던 남편. 결혼 전에도 몇 번 같이 가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자마자 약속을 깨버렸다. 절에 다니시던 시어머니 핑계를 대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했다. 그런 남편을 핑계로 그녀도 역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았다.
주님의 마음을 알아가다
“결혼하고 난 이후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대학교 1학년 시절이 떠오르곤 했어요. 그때 저는 선교사로 저를 드린다고 고백했어요. 대학 4년 동안 예수님으로 인해 영혼의 기쁨을 누렸던 시간이 잊혀 지지 않더군요. 남편의 사랑을 받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어도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그러던 중 남편 유학 때문에 미국에 가게 되었어요. 미국에 가기 2개월 전에 당시 큰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고 결혼 전에 제가 사용하던 피아노를 친정에서 가져왔는데, 피아노 의자에 편지 한 통이 들어있더군요. 제가 대학생 때 부모님께 드렸던 편지였죠. 당시 예수님을 만나고 선교사로 살겠다고 할 때 제 뜻을 이해하지 못하시던 부모님에게 보낸 것이었어요. 왜 내가 이 길을 가야 하는지 이유를 적었더군요.
그 편지를 읽으며 대성통곡을 했어요. 주님이 이러시는 것 같았어요. ‘너, 약속했잖아. 너 이렇게 고백했잖아.’ 저를 일깨우시고 회개하게 하셨어요. 제가 쓴 편지였지만 꼭 하나님의 편지같이 느껴졌어요.”
그러나 예정대로 미국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하지만 뒤늦게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이후, 그녀의 심령은 갈급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주님이 보인다!”며 연신 소리를 질렀다.
선교사로 헌신을 선언한 옛 편지를 보다
– 가족들이 당황하셨겠네요.
“놀란 남편은 저를 큰 종합병원으로 데려갔어요. 그곳에서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되었죠. 거기서 한국인 간호사를 만나 교회에 가게 됐어요. 그리고 2년 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한국이 IMF사태로 어려워지면서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게 됐죠.”
–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셨네요.
“남편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었겠죠. 그런 와중에 남편이 외도를 했다는 사실을 2004년이 돼서야 저는 알게 됐어요. 받아들일 수가 없어 고민 끝에 결국 이혼을 하게 됐어요. 주님은 이런 어려움을 통해 제가 주님 품에 돌아오는 은혜를 주셨어요.”
이후 그녀는 가장으로 일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됐는데, 목마름은 여전했어요. 도대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대학생 때 이미 삶을 드린 공동체를 경험했기에 나름대로 기준은 있었어요. 그런데 교회에서 그렇게 헌신된 삶을 보기는 쉽지 않았죠.
그러다 어떤 집회에 참석해 사막에 강을 내고 광야에 길을 내실 것이란 말씀을 듣는데 선교사로 삶을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일이 기억나더군요. 그때가 2014년인데, 교회에 새로 부임한 여전도사님이 저에게 복음훈련 하는 곳을 추천해주었어요. 잘 모르지만 주님이 길을 여셨다고 믿고 참석했어요. 그곳에서 제 존재 자체가 죄인인 것과 예수님이 제게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 기뻤어요.”
– 그런 깨달음으로 누리게 된 은혜가 있으신지요?
“1년 후, 남편과 화해하는 시간을 주님이 허락하셨어요. 남편이나 저나 똑같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됐어요. 주님은 저 역시 마음으로 간음했던 자임을 인정하게 하셨어요. 제 마음이 얼마나 음란한지 상황만 되면 나도 그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사실이 인정되더군요. 남편에게 돌아오라고 했지만, 남편은 아직 주님께 돌아올 때가 아니라고 했죠. 주님은 그런 만남까지만 허락하셨어요.”
– 놀라운 일이네요. 이후에 주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나요?
“사실 복음훈련을 마치고 바로 공동체신앙훈련을 받으려고 했어요.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훈련을 준비했죠. 그런데 면접을 하면서 제가 훈련을 받을 준비가 안됐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중보기도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반 년이 지나 재도전해 공동체훈련을 받았어요. 그때는 정말 복음을 실제로 누리는 시간이었어요. 공동체훈련을 마친 이후에 해외선교를 꿈꿨는데 주님의 뜻은 내 생각과 달랐어요. 그래서 고민이 되고 잠을 잘 못자면서 또다시 예전 그 정신적 증세가 나타나려고 했어요.”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게 되다
– 부르심에 순종하려니 여러 방해가 있었군요.
“이런 내가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어요. 제 상황이 크게 보이더군요. 큰 아들은 함께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데 아직 그런 은혜를 잘 모르는 작은 아들이 걸렸죠. 이 상황을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지를 못했죠. 결국 파송단체에게 얘기하고, 다시 순종의 자리에 오기까지는 1년이 걸렸어요. 그리고 주님이 제 마음을 붙잡아주셔서 국내와 국외 어디로 부르시든 순종할 것을 고백하게 하셨죠. 그렇게 순종하여 오게 된 곳이 바로 헤브론선교대학교였어요.”
– 순종을 선택하기까지 쉽지는 않았군요.
“처음에는 어려웠어요. 선교사는 해외에 가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 선택을 주저했어요. 그러나 기도하다보니 분명해지는 한 가지가 있었어요. 캠퍼스 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주시며 기도하게 하셨던 예전의 고백을 되살려주시더군요. 제가 80학번이에요. 당시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듣고 함께 성경공부도 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사람 말을 듣는 것 자체를 거절하죠. 이런 캠퍼스의 상황을 들으며 캠퍼스가 곧 열방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큰 아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죠. 아들은 “주님이 부르셨네요. 캠퍼스 비전은 엄마가 기도했던 거잖아요.”라고 했어요. 주님은 말씀으로도 약속해주셨어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16) 이 말씀을 주시며 순종할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 그렇게 오셔서 맡은 직임이 주방이셨군요.
“처음 한 달 반 동안 정말 쉽지 않았어요. 사람들의 인정과 평판을 원했고, 칭찬을 듣고 싶었던 제가 드러나고 죽는 시간이었어요. 그때 주님이 물으셨어요. ‘무얼 좇아 왔니? 영생의 말씀을 좇아 왔니? 그럼 어떤 자리든 아멘이니?’ 비로소 주님이 불러주신 가장 완전한 자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더군요. 그때부터 실제로 주님을 경험하기 시작했어요.”
– 어떤 경험을 통해 부르심을 확정하셨는지 듣고 싶네요.
“지난 1년은 처음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시간이었어요. 그전까지는 일을 하면서 제가 벌어 살았죠. 하지만 여기서는 모든 재정을 주님의 공급하심에 맡기고 살아야 해요. 마음속으로 ‘아르바이트라도 했으면….’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매달 내야 하는 관리비를 두고 기도만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믿음일까?’ 그런 과정을 통해 오직 주님만이 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게 하셨어요. 주님만 붙들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요. 정말 은혜였어요.
함께 있는 지체들이 자신의 것을 나눠주기도 했어요. 그러면 내면에서는 ‘이거 언제까지 이래야 해? 주님 오실 때까지 해야 하잖아.’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죠. 지체들에게 재정을 받는 것도 믿음이 필요했어요. 베풀면 베풀었지 남에게 받기 싫어하는 나의 자아가 죽는 시간이었죠.
주님의 허락하심 안에서 믿음으로 받고 쓰면서 자녀에 대해서도 주님께 맡기게 됐어요. 큰 아들도 선교사로 헌신했는데 각자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자고 했죠. 작은 아들에 대해서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은혜를 주셨어요. 주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정말 영광이에요. 주님을 붙들 수밖에 없는 삶, 주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기심을 항상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은혜의 삶인 것이죠.”
– 실제 상황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군요.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이 삶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주님 떠나면 나는 죽음이다.’ 이것을 알게 하셨죠. 나를 부인하면 이 믿음의 걸음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어요. 매 순간 십자가의 자리에 나아가 저를 부인하는 거죠. 나의 옳음, 나의 기준을 내려놓는 거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더군요.”
– 끝으로 지나온 삶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눠주세요.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섬세히 알고 계신다고 믿어요. 삶을 돌아보면서 굴곡 없이 달려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젊은 나이에 헌신한 지체들을 보면 부러울 때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이 가장 완전한 때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주님만이 나의 주인, 나의 소망, 기쁨이시라고 완전히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기까지 주님은 기다려주셨어요.
이런 고난을 통해, 머리로만 알았을 주님을 가슴으로 알게됐어요. 하나님은 각자를 부르시고 세워가세요. 저의 서원을 주님이 이뤄주셨죠.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어요. 하지만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억지로 하지 않으셨죠. 지금이 저를 선교사로 쓰시기에 가장 완전한 때라고 믿어요.
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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