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사로잡힌 선교사를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
지난 호에서 아프리카의 절대적 필요와 유일한 해결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봤다. 이같은 전제 아래 아프리카에는 어떤 기독교적 사역이 일어나야 할까.
이에 대한 답으로 필자는 아프리카의 두 번째 아젠다, 즉 아프리카 기독교의 두 가지의 궁극적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복음적인 아프리카 현지교회를 세워 그들을 통해 아프리카 회교권을 선교하는 일이다.
첫째,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아프리카 토착교회를 세우는 과제를 생각해보자. 아프리카는 기독교 우세 지역과 회교도 우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기독교 우세지역에 있는 교회들 조차 상당수 그 영적 기초가 상당히 부실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원경 또는 현미경, 어느 것으로 볼까?
케냐의 사례를 보자. 최근 정부통계에 따르면, 국민의 82%가 여러 교파의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망원경으로 본 케냐의 기독교 모습이다. 망원경으로 볼 때 수억광년 떨어진 우주 하늘에 동일한 별들이 있다고 느끼듯, 망원경으로 케냐의 종교분포를 바라보면 교회와 기독교인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유대인은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다. 혈통으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모세의 제자라고 여겨온 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굳게 확신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비친 그들은 대부분 거듭나야 할 불신자들일 뿐이었다.
이렇듯 종교심만 가득했던 유대의 회당처럼 오늘날 상당수 아프리카의 교회가 그런 회당과 같은 분위기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아닐 듯 싶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도, 그리스도의 제자도 아닌 오히려 거듭나야 할 교회 내의 불신자들일 수 있다. 말하자면 기독교적 문화의 옷을 걸친 회당의 모습이다. 이것이 현미경으로 바라본 아프리카 교회의 실상이다.
망원경으로는 많은 교회가 보였는데, 현미경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회당 같은 교회들은 진정한 교회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복음이면 충분치 않고 돈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는 이 절대적 한계를 아프리카의 교회가 벗어나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적 교회로 회복되는 것만이 아프리카의 절대적이고 최우선적인 선교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위하여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사역적으로 숙련된 복음이면 충분한 선교사들이 필요하다
마음에 사로잡힌 선교사들이 필요
둘째, 아프리카교회를 통한 회교권 선교이다. 아프리카의 회교는 북부아프리카 지역과 대서양과 인도양 해안을 따라 마치 말굽형으로 포위하며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연약하고 열악한 기독교 회당으로는 강력하게 죄여 오는 회교도 회당을 이길 힘이 없다. 그렇다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회교권 선교의 전부를 감당할 수도 없다. 또 종래의 선교 방법으로는 빠르게 증가하는 회교권 거주자들을 전도하기란 실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주님은 이 땅의 모든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렇기에 무슬림이라는 회교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그리스도인이 될 후보자들이다. 우리가 그들을 참된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제 되지 않은 채 군림하는 듯한 태도로는 저들을 전도할 수 없다.
먼저 회교도를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몸과 삶으로 증거하는 전도가 밑바탕에 자리 잡아야 한다. 외국인으로 아프리카의 뿌리 깊은 문화적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복음의 대상인 그들의 문화와 삶을 충분히 알고 있는 같은 아프리카인 전도자에 의하여 회교도를 전도하는 것이야 말로 마땅한 길일 것이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역할은 이러한 두 가지 과제 즉 건전한 아프리카 교회를 세우고 그들을 통한 회교권 선교를 돕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머지 사역들 예를 들어 학교, 고아원, 병원 등을 세우거나 급식, 마을 개발 등의 모든 일은 위의 두 가지 사역을 돕는 보조적이고 보완적인 일이 돼야만 한다
우선 순위가 뒤바뀐 오늘의 선교현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날의 선교 현실은 우선순위가 뒤바뀐 감이 있다. 복음 전파와 교회개척 및 제자훈련 사역이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사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본주의적 구호 및 개발 사역이 보다 설득력을 갖고 선교를 주도해 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문제를 도와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에게 다시는 물을 긷는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우물 파주기를 요청 하였다. 당장의 현실적이고 시급한 필요를 채워주면 사람들이 좋아 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함께 기독교적 예배를 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선에서 끝나 버린다면, 이것을 기독교의 선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의 선교는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메시아와 주님으로 자리 잡을 때 까지 진행돼야 한다. <계속>
케냐 = 안정규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