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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교열전 (8) – 전라북도 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132주년을 맞고 있다. 구한말부터 본격화된 개신교 선교 역사는 문화, 교육, 의료 분야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며 한반도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됐다. 우리나라 곳곳의 선교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편집자>
군산 선교부의 설립
최초로 군산에 온 선교사는 레이놀즈와 의사 드루 일행이었다. 이들은 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전라도 답사 중 군산에 상륙했다. 선교부는 이들의 유익한 보고를 받고 전주에 이어 군산에 두 번째 선교부를 열기로 했다. 1895년 3월, 전킨과 드루 선교사가 선교부 임무를 받고 군산에 도착했다. 이들은 수 주일 동안 군산과 주변에서 아침마다 설교를 하고 아픈 사람들을 돌봤다. 사람들은 생선, 굴, 달걀, 미역 같은 것들을 답례로 가져왔다. 그때 접촉한 사람들 중 군산의 김봉래와 송영도 등이 믿기로 작정하고, 선교사들이 다시 군산에 올 때 원입 교인으로 문답해 줄 것을 청했다.
1896년 2월경, 전킨 목사의 가족이 모두 이사를 왔다. 두 달이 지난 후 의사인 드루 선교사의 가족도 이사 와서 자택 사랑방에 진료소를 열고 환자들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전킨은 진료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전도했고, 주일에는 사랑방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드렸다. 1896년 7월 20일(월요일)에 전킨 목사의 집 사랑에서 김봉래와 송영도 두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이 두 사람이 전라도 지방에서는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 유아 세례는 그해 10월 송영도의 어린 딸이 받은 것이 전라도 최초의 유아 세례였다. 이는 전주에서 실시된 세례식보다 일 년 앞선 것이었다.
전킨과 드루는 군산 선교 기지를 궁말(구암리) 산 밑으로 정하고, 인근 지방을 다니며 순회 전도를 했다. 1897년에는 김제군 송지동까지 왕래하며 송지동 교회를 세웠다. 당시 여자들의 예배 참석은 큰 사건이었다. 그 무렵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조선남녀의 구별된 생활은 신기하게 보일 정도였다. 전킨은 1897년 7월 어느 날 군산 주일예배 광경을 이렇게 적었다.
“여자들은 문이 닫혀있는 사랑방에서 예배에 참여하고, 남자들은 사랑방의 문을 열고 예배를 드렸다. 여자들은 창호지로 된 문을 통해 들려오는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1899년부터 전킨은 새로운 기지로 자리 잡은 궁말 기슭에 선교 센터와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군산 숙소와 10리가량 떨어진 궁말을 왕복하며 건축 공사를 진행했다. 늦가을이 지나 건물이 완성되자 그곳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12월 4일 주일 예배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구암리 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구암리 교회, 군산 선교기지 되다
미국 사람들이 군산에 살고 있다는 소식이 두루 퍼지자 인근 각지에서 남녀노소가 구경삼아 모여들었다. 어떤 이들은 주일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에 와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이튿날 월요일에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5월 1일에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모든 조직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새 개항 조약에 따라 일본이 해안지대를 장악하자 항구에 살던 기독교인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전킨은 신자들이 사는 외곽과 시골 마을인 지경, 만자산, 남차문, 김제 송지동, 성말에까지 가서 순회 전도하며 기도 처소를 세웠다. 인원이 많아지면 교회를 설립했다. 드루 선교사는 자원 전도인들을 인솔하고 전도선으로 서해 고군산 섬들과 오식도와 연안의 곳곳을 들르며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에 관한 책자와 전도지를 수천 명에게 나누어 주어 많은 열매를 맺었다. 1899년에는 군산 선교의 다음 주도자가 될 불(William F. Bull) 선교사가 도착했다. 그는 군산에서 그 후 40년간 사역을 분담했다.
고군산섬, 오식도 등 섬 전도
군산 선교부는 양손에 복음사역과 의료사역을 동시에 들고 시작해 놀랍게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드루 선교사는 선교부가 열린 즉시 의료선교를 했고, 병자들은 자유롭게 선교부를 방문했다. 전킨은 그들과 곧 친구가 되어 사랑방에 초대했다. 조선인들은 이 외국인들을 이 먼 곳까지 오게 한 믿음에 대해 더 많이 듣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플 때도 있고 자리를 비울 때도 있었지만 그는 첫 두 해 동안 4000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그러나 이 혹독한 일정의 사역으로 드루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1901년 건강 때문에 선교부의 소환 명령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갔고, 다시 군산에 돌아올 수 없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참고문헌: <전라북도 기독교 근대문화유산의 현황과 의미>(2012) <한국선교이야기, 조지 톰슨 브라운 지음, 도서출판 동연>(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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