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를 주님께 드리고 싶었어요”

순종의 길을 선택한 김정옥.김현의 집사 부부

복음을 만난 후, 가장 귀한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었다. 흔히들 가장 안정적인 시기라 말하는 나이 마흔이 되기 전, 39세가 되던 해 11월. 한국에서의 터를 모두 허물고 선교지로 떠난 김정옥·김현의 집사 부부(성남 선한목자교회). 선교사라는 이름보다 작고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이들의 고백을 들어보았다.

– 어떻게 선교지로 떠날 결정을 하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김정옥(이하 정): “저는 처음부터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서른 초반에 복음을 만났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고민해보니 제겐 시간이 가장 중요하더군요. 그래서 마흔이 되기 전, 1년을 온전히 주님께 드려보자는 생각이었죠.”

김현의(이하 현): “저는 남편과 생각이 조금 달랐어요. 2009년에 십자가 복음을 만난 이후, 여러 훈련들을 통해 선교사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받고 남편에게 나눴어요. 선교는 젊은 시절 안정적으로 돈을 번 후, 노년에 나가는 거라고 하면서 꼼짝을 않더군요. 남편은 당시 잘나가던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일했어요. 그것도 잠시, 남편의 회사 상황이 어려워지고 퇴사하게 되면서 복음 앞에 서게 됐죠. 2012년, 감리교선교사훈련원(MMTC)을 통해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게 됐어요. 그런데 언제, 어디로, 어떻게 갈지는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언제든 주님이 부르시면 나가려고 전심으로 훈련을 받으며 준비했어요.”

– 이후 선교사로의 길이 열렸나요?

현: “아니오. 훈련만 받으면 쉽게 길이 열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높은 장벽 때문에 평신도 선교사로 나가는 건 쉽지 않았어요. ‘NGO 단체를 통해서 가야 하나? 아니면 가진 것은 얼마 없지만 무작정 열방에 나가서 한번 버텨볼까?’ 다양한 생각을 해봤죠. 그렇게 막막한 중에 교회에서 파라과이 선교사님의 편지를 우연히 보게 됐어요. 그때 주님이 ‘파라과이’에 대한 마음을 저희에게 주셨죠.”

정: “‘나라를 품는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군요. 기도하면 ‘이 나라다!’ 하고 답을 알려주시나? 궁금했어요. 하지만, 먼저 저희 둘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시리라 믿었어요. 아웃리치 갔을 때 만났던 선교사님들로부터 요청이 와도 저희가 한 번도 마음이 맞아 본적이 없었거든요. 파라과이 기도편지를 보고 난 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그 나라가 너무 궁금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어요. 그때 아내에게서 ‘우리 파라과이로 가요.’라는 문자메시지 한 통을 받게 됐어요.

그것을 주님이 주신 사인으로 받았어요. 결정한 지 1년 후, 파라과이 선교사님이 한국에 들어오셨어요. 첫 만남에 다짜고짜 ‘선교사님, 죄송합니다. 저희 파라과이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저희를 받아 주실 의사가 있으십니까?’라고 여쭈면서 전적으로 선교사님을 돕겠다고 했어요. ‘주님이 말씀하셨으면 오셔야죠.’라는 선교사님의 대답을 듣고 1년 후, 파라과이로 가게 됐어요.”

“선교사님, 가겠습니다” 출정 선언

– 1년간의 준비과정은 어땠어요?

현: “꿈쩍도 안 하던 남편이 선교의 마음을 받으니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더군요. 나중에는 제가 너무 두려울 정도였어요. 어느 날 남편에게 물었어요. ‘한국에 다시 돌아오면, 우리의 이전 경력도, 재산도 아무것도 없을 텐데 꼭 가야겠어?’라고 하니까 꼭 가야 된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아무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어요. 오로지 우리의 초점은 ‘선교’였죠. 가지고 있던 모든 짐을 보관하려니 그 비용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래서 가벼운 것들부터 버리기 시작했어요. 14년 동안 소중하다고 여겨서 꽁꽁 싸매고 있던 것들을 쓰레기장에 내버리니 그냥 쓰레기더군요.”

정: “저는 가족과 선교사의 꿈을 나누기 전에 기도를 많이 했어요. 어릴 적 어머니의 인도로 교회에 다니게 됐지만, 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5분도 채 되지 않아 쉽게 허락을 해주셨어요. 주님이 두 분의 마음을 붙잡아 주셨죠. 지금은 그 누구보다 저희의 든든한 지원자세요.”

– 귀한 순종의 걸음이지만 1년에 모든 것을 걸기에는 모험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나요?

현: “저희는 단지 1년만 생각한 게 아니었어요. 이 시간을 통해 주님이 하실 일을 보고 싶었어요. 선교사의 꿈은 주셨는데, 제가 복음으로 살 수 있을지 짐작이 안 되더군요. 이전에 현지적응훈련으로 한 나라에갔을 때, 복잡하고 큰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15일간 못 먹는 어려움 때문에 좌절한 경험이 있었거든요.”

정: “열방의 영혼을 사랑하며 사는 것, 언어를 습득하는 문제 등 많은 부분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도 돌아온 후를 생각해서 여지를 남겨놔야 될 것 같은 주위 분위기에 사실 저도 걱정되긴 했어요. 그런데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순종했을 때 주님이 어떻게 이루셨는지 보는 귀중한 시간이었죠.”

현: “한국을 떠나가기 전,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안정기라는 고백을 하게 하셨어요. 선교를 꿈꿔도 20대는 스펙(점수)을 쌓아야 할 것 같고, 30대는 발로 뛰어 정보를 모아야 할 것 같았어요. 세상의 기준에 맞추면 한 걸음도 떼기 힘든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기회와 상황을 고려하는 건, 참 어리석은 생각이더군요. 당장 뭐 하나 포기하면 세상이 다 뒤집어 질 것 같잖아요. 주님이 지금 ‘이때’라고 하시면 바로 순종만 하면 되는데요. 가끔 저희에게 재정의 어려움이 있지만, 더 이상 이 문제가 우리를 뒤흔들 수 없어요.”

순종을 결정하자 모든 두려움 사라져

– 처음 선교지에 도착해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정: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국교가 가톨릭인 이 나라에서 제가 본 것은 예수님도, 마리아도 아닌 ‘까꾸뻬’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모습이었어요. 성당 건물은 많이 보이지만 사제가 없어서 미사 한 번 드리기도 어려운 상황이에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 고민이 됐어요.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던 언어라 걱정을 많이 했죠.”

현: “저희가 간 곳은 도심지에서 많이 떨어진 시우닷델에스테(동쪽 도시)라는 곳인데, 언어를 배우기에는 어려운 환경이었어요. 2~3개월간 아무 말도 못해서 너무 답답했어요. 그런데 저희가 파라과이로 간지 3개월 만에 이전에 없던 온라인 스페인어 강의가 개설됐어요.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이틀을 고민했지만, 현지인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열정이 더 커서 남편이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죠. 배운지 5개월 만에 현지인과 가볍게 대화할 수준이 됐어요. 정말 주님이 하셨어요. 어느 날 현지인들이 이렇게 물어요. ‘너희는 도대체 왜 왔어?’”

정: “뭐라고 대답할지 모르겠더군요. 그 누구도 저희를 선교사라고 소개해주지 않았고 그저 우린 ‘알렉스, 루시아’였거든요. 그런데 무슨 담대함이었는지 ‘우리는 당신들을 위해 선교사로 왔고, 다시 이곳에 오겠다.’라고 말했어요. 아침 7시에 하루를 시작해서 오후 3시면 마무리되는 파라과이에서 매일 낮에는 선교사님과 연합해 교회 건축 사역을 하고, 밤에는 일주일에 세 번 성도들을 대상으로 악기를 가르쳤어요.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가 생각나네요. ‘시작’이라는 말을 몰라서 아이들을 앉혀놓고 눈만 멀뚱멀뚱. ‘끝’이라는 말도 몰라서 책을 막 뒤지면서 말했던 게요(웃음).”

현: “‘왜 한국인이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우리를 가르쳐주고, 섬기지?’라고 궁금했다고 해요. 저는 현지인들이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자잘한 일상을 사진으로 찍어 선물로 줬어요. 현지인들로부터 격이 없고 인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저희가 처음부터 ‘선교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가갔다면 이런 친구들을 얻을 수 없었겠죠. 우리에게서 큰 열매는 바랄 수 없겠지만,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하나님에 관해 나누며 찬양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 그런 일상들 속에서 많은 일이 있었겠죠?

현: “초반에 합선으로 전기가 나가서 두 달간 완전한 어둠 속에 살아야 했어요. 해가 지기 전 밥을 먹고 선풍기를 틀 수 없으니 매일 밤, 더위와 싸워야 했죠. 그런데도 이곳에 와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 같아서 너무 감사했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희가 생각했던 선교의 방향과는 다르고, 여러 작은 어려움이 쌓이다 보니 제 자신을 감당할 수 없었어요. 많은 경험과 훈련을 해봤으니까 잘 할 줄 알았는데, 정말 저는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그런데 저희 남편은 저보다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든든하게 서고, 저까지 붙잡아 줬어요.”

정: “가진 능력도 많고, 모나지 않은 성격에 어디에서나 인정받을 줄 알았는데 우리의 능력이 선교지에서는 필요 없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어요. 우리와 다른 언어와 예배 방식에 정말 많이 갈급했어요. 선교지에 있다는 것으로 감정적이고 열정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어느 때는 아내와 함께 찬양 책을 보며 2시간 넘게 찬양을 드리기도 했어요. 때마다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또 기도케 하셔서 회복됐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삶이었어요.”

나의 재능이 소용없는 선교현장

– 두 분이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하네요.

현: “저는 예수님을 안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제가 23살 때, 알코올 중독에 의한 간경화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20대 초반에 친오빠가 저를 교회로 인도했고, 그때 남편을 만났죠.”

정: “안면이 있던 형의 동생이라는데 둘 사이가 너무 좋아 보였어요. 처음 보자마자 ‘저 사람이랑 결혼하면 어떨까? 너무 좋을 것 같아.’라는 생각을 했죠. 그 후 공부를 핑계로 만날 약속을 정하고 친구로 자연스럽게 지내다 28살에 동갑내기 결혼을 하게 됐어요.”

현: “허물이 없고, 자연스러운 남편 모습에 반했어요. 제가 약속에 늦곤 했는데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기다려준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배려와 사랑을 받았는데도 이전에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많은 상처를 남편에게 줬어요. 그런데도 남편은 저를 떠나지 않고 지켜줬어요. 복음을 만난 후, 하나님 사랑을 아버지 사랑이라고 하시는데 이해가 안됐어요. 주님께 떼쓰듯 가르쳐달라고 말했는데 ‘정옥이가 네게 준 사랑이 내 사랑이야.’라고 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것이 100% 믿어졌어요.”

– 총체적 십자가 복음은 언제 만나셨나요?

현: “결혼 5년차가 되던 2009년에 미국에서 남편과 일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미국에 간다는 생각으로 둘 다 회사를 그만두고 재산을 정리했죠. 그런데 남편 비자가 잘못돼서 3일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어요. 몇 년 동안 번 돈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순간이었죠. 그 때 아기를 간절히 원해서 시험관 시술까지 한 상태였는데 실패였어요. 소망이 다 끊어지자 기도하고 싶단 생각밖에 없었어요.”

“복음이면 충분하지!”

현: “그때 한 지인이 일주일간 복음에 흠뻑 빠졌다가 나올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훈련을 받았어요.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창조주 하나님이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려 나 대신 죽으셨다는 말이 믿어졌어요. 그런데 어떻게 믿음으로 살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복음을 더 알고 싶어서 남편에게 6개월간의 양해를 구하고 여러 훈련들을 받기 시작했어요.”

정: “아내가 아웃리치를 갈 때면 통장 잔액이 0원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게 이 복음을 권하는 거예요. 그 권면을 받지 않았어요. 사람이 양심이 있지 제가 쓸 돈은 남겨놔야죠. 그러지도 않는데, 누가 이 상황을 쉽게 받을 수 있겠어요(웃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자랑이었던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안정된 터가 영원히 보장되지 않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어요. 그때 총체적 복음 앞에 서게 됐죠. 교회를 오랜 시간 다녔지만 체계적으로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제게 충격이었어요. 어느 날 아내가 물어요. 이보다 더 큰 대가지불을 한다 해도 복음이 제게 그만큼의 가치가 있느냐고요. ‘물론, 충분하지!’라고 답했어요. 그때부터 믿음의 삶이 시작된 것 같아요.”

–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정: “기대할 수 없었는데, 현재 교회 파송 선교사로 자격을 얻게 돼서 절차에 따라 훈련을 받고 있어요. 믿음의 삶을 결정하고 나니 이전보다 훨씬 큰 연봉제의가 들어왔는데, 거절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어요. 우리를 이렇게 바꿔놓으신 주님께 너무 감사해요.”

– 마지막으로 기도제목이 있으시다면요.

정: “이전의 제 삶은 권위와 질서가 없는 자유로운 삶이었어요. 철저한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이 사역을 일로 여기지 않도록 기도해 주세요. 2년 후 다시 열방에 나갈 때, 눈에 그럴듯한 준비보다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현: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바로 저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GNPNEWS]

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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