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브뤼겔의 <베들레헴 영아 살해>
북유럽의 거장 피터 브뤼겔이 그린 <베들레헴 영아 살해>는 제목을 보지 않는다면 농촌 마을에 도착한 군대 정도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많은 인물을 그리면서도 한 명 한 명의 동작, 표정, 옷차림 등의 묘사 역시 놓치지 않고 그리는 브뤼겔의 세밀한 화풍은 관람자들을 그림 가까이에 다가가도록 한다.
특히 <베들레헴 영아 살해> 작품처럼 언뜻 보이는 장면과 제목이 연결되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림 소재인 영아 살해 사건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내용으로, 동방박사에 의해 메시아 탄생 소식을 듣게 된 헤롯이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고 한 사건이다.
성경에는 이 참혹한 사건 역시 예레미야의 예언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마 2:18)
그런데 브뤼겔의 그림 속 배경과 인물은 고대 이스라엘의 모습은 아니다. 브뤼겔은 이 비극을 16세기 플랑드르의 풍경으로 바꾸었는데, 그림에서 붉은색 옷을 입고 말을 탄 사람들은 스페인 군인들이며, 중앙에 갑옷을 입고 서 있는 무리는 독일 용병대이다. 16세기 중반, 종교개혁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스페인 왕 필립 2세는 용병까지 동원하여 플랑드르의 개신교도들을 무참히 학살하였고, 브뤼겔은 스페인의 만행을 성경 속 사건에 빗대어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10년 뒤, 브뤼겔의 작품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의 소유가 되었고, 필립 2세의 조카였던 황제에게 이 그림은 숨기고 싶은 과거와 같았다. 결국 브뤼겔은 그림의 아기들 위에 덧칠을 해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영아 학살에서 약탈 사건으로 바뀐 그림은 아버지의 작품을 복제 판매하였던 브뤼겔의 아들에 의해 숨겨진 비밀이 전해질 수 있었다.
성탄절에 일어난 영아 살해사건, 그리고 종교개혁 시기에도 반복되었던 학살, 이처럼 거룩한 기점들에는 끔찍한 박해도 함께 도사리고 있었다. 그만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 또한 얼마나 치열했었고, 또 지금까지도 얼마나 치열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쟁 과정이 어떻든 간에 그 끝에는 어린양의 승리가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GNPNEWS]
이상윤(미술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