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 마을 째오 래오 교회 성장사
이 연재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베트남에 입국한 찰리, 에그롱 선교사 부부가 전쟁의 참화 가운데에서 복음의 통로가 된 과정과 베트남 주민들의 상황을 담고 있다. 대하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는 베트남의 현대 선교사(史)를 이들의 회고록 ‘베트남에 사랑을 담아’(To vietnam with Love)를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부흥의 열기가 가득한 째오 래오
1971년 부흥이 시작될 때 우리는 쁠레이꾸에서 째오 래오(Cheo Reo)로 이주했다. 쟈라이어 사복음서와 시편의 번역작업을 끝내기 위해 좀 더 한적한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째오 래오는 쁠레이꾸에서 110Km 정도 떨어진 쟈라이 부족 지역이었다.
당시 프랭클린 어윈은 쟈라이 족들에게 ‘딥앤와이드(Deep & Wide)’ 전도 방법을 소개했다. 구역별 공과 교재인 그 책을 통해 크리스천들이 친구들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배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구역원이 16명이 되면 독립해 간증과 전도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자체적으로 성도들의 양육이 이루어지며 작은 교회가 되었다. 베트남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 있을 때 산속 부족마을의 교회가 성장한 것은 베트남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이야기로 남아있다.
우리는 쟈라이 사역자들에게 책임과 권한을 맡겼다. 이것이 그곳의 크리스천들이 부흥을 리드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됐다. 사실 우리가 째오 래오에 처음 들어갔을 때 리더십 역할을 요청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쟈라이 사람들은 사랑과 존경으로 교회 안의 실제적인 모든 문제를 나눠왔다.
그들은 나의 도움 없이도 주님을 잘 따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한 사건을 통해 리더의 책임감을 벗겨 주셨다. 째오 래오는 부흥의 여파로 기도 모임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그날 강대상 가까이 있는 옆문을 통해 교회로 들어갔다. 그런데 마치 주님께서 내 뒤를 따라 들어오신 것 같았다. 성전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사람이 무릎 꿇고 마루에 엎드러져 있었다. 그 때 주님이 오셔서 쟈라이 부족을 나의 손에서 교회의 누군가에게 옮기시는 것 같았다. 이 부흥의 주역은 바로 그들이었다. 그 후 나는 교회 일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쟈라이 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본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영원한 하나님의 처소로 떠난 순교자들
윙과 브로의 도움으로 성경 번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들을 만나는 시간 외에 나는 은자(隱者)처럼 살았다. 나는 가끔 집 앞에 있는 새까맣게 탄 오토바이를 바라보았다. 쁠레이꾸 교회의 전 사역자 아마 뚬(Ama Tum)의 것이었다. 난 그와 쁠레이꾸에서부터 오랫동안 동역했다.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영적 성장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면에서 나보다 앞서 있었다. 처음 사역을 시작하면서 그와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씨를 뿌리고, 때가 되면 다른 누군가가 거둘 것이다. 우리가 그 열매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의 일을 다 한것 아니겠는가.’ 그는 개인적으로 쟈라이 형제 200명 이상을 주님께 인도했다. 어느날 그는 오토바이를 몰고 째오 래오 남쪽 마을로 설교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베트콩들이 그의 가슴에 총을 쏘고 오토바이는 불살라 버린 것이다. 그는 아내와 7명의 자식을 남기고 주님 품에 안겼다. 수년 전 공산주의자들이 가하오를 고문하고 잔인하게 살해했을 때, 떤 목사를 죽이고 쓰레기처럼 길가에 버렸을 때처럼 나는 분노했다.
그러나 뚬의 순교를 통해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순교를 이해하게 됐다. 그들은 하나님 곁에 영원한 처소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기적이게도 나의 사랑하는 전도자 가하오와 떤 목사를 베트남에 붙잡아 놓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아마 뚬도 그들의 행렬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즐거움 가운데 들어간 것이다. [GNP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