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파 운동이 올해로 500주년을 맞이했다.
500년 전,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된 재세례파(再洗禮派, Anabaptists)는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인의 신앙 고백 후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 유아세례를 당연시하던 사회에서 이런 신념은 큰 도전으로 간주되어 심한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신념은 살아남아 오늘날 세계 기독교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에반젤리컬 포커스는 최근 멕시코의 언론인이자 여러 저서의 저자인 카를로스 마르티네스 가르시아(Carlos Martínez García)가 재세례파의 역사와 원칙, 영향력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소개했다.
재세례파 운동의 시작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의 제자들이 신약성경을 연구하고 읽으면서 이해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약 2~3년 전부터 신약성경을 그리스어로 직접 공부하며 풍부한 묵상을 해왔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발견한 후 세례는 의식 있는 신자, 즉 자신이 행하는 행위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행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그 행위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행동을 반영해야 했다. 첫째, 거듭남, 회심을 경험한 후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이었다. 둘째, 세례를 통해 회심을 공개적으로 증거하고, 더 나아가 같은 원칙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이다.
약 20~23명으로 구성된 이 그룹에는 펠릭스 만츠(Felix Manz), 콘래드 그레벨(Conrad Grebel), 조지 블라우록(George Blaurock) 등이 포함됐다. 이들은 1525년 1월 21일 토요일 저녁 해가 거의 질 무렵,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표현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이 실천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조지 블라우록은 콘라드 그레벨에게 펠릭스 만츠의 어머니 집에서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하지만 취리히 시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러한 모임과 성인 세례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을 금지했다. 뿐만아니라 시의회는 이 금지 명령을 어길 경우 엄격한 처벌을 내렸다. 시민은 징역형, 비시민은 추방형이라는 처벌이 내려졌다.
재세례파의 확장
이 운동은 여러 가지 이유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 중 하나는 그들이 발견한 것을 다른 곳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취리히 인근에서는 이미 농민, 제화공, 재단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 특히 남성, 여성, 어린이 등 다양한 사람들의 가정에서 성경 공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취리히 인근의 졸리콘이라는 마을에는 이미 같은 신념을 가진 그룹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공식 교회의 일부 교인들조차 어린 자녀에게 세례를 주기를 거부했고, 당국은 유아 세례를 시행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거부했다.
한편으로는 높은 수준의 학문적, 성경적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 1월 21일 행사에 참여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이미 시 의회의 공식 법령에 불복종하고 있었다.
1월 22일, 그 공동체의 신자들이 이 새로운 신념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곳은 졸리콘이었다. 시의 법령에 따라 지방 당국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여 투옥 또는 추방을 부과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제재를 피하고 싶다는 욕구와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내적 확신에 이끌려 거의 바로 다음 날부터 그들의 실천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한편,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같은 신념을 가진 소규모 그룹이나 개인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신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조성됐다. 가톨릭 지역과 개신교 교회 모두 여러 곳에서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는 빠른 확산에 더욱 기여했다.
재세례파 종교개혁과 루터의 종교개혁의 차이
역사상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1세대 종교개혁자들 중 루터(Luther), 멜랑히톤(Melanchthon), 스위스의 쯔빙글리(Zwingli)와 같은 인물이 있다.
재세례파 운동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처음부터 독립적인 신앙 노선을 걸었던 것이 아니라 초기에는 개신교 종교개혁의 주류인 루터나 츠빙글리 같은 주류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동의했거나 따랐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재세례파는 급진적 종교개혁의 다른 흐름과 함께 성경이 교황청 종교개혁자들이 지지하는 것 이상의 것을 가르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를 들어 재세례파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만남이라는 성경적 인물과 “거듭남”에 대한 가르침을 자주 사용하면서 개인적 회심과 “거듭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신자들의 공동체는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공교회 또는 영토 교회의 원칙에 의문을 제기했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교회는 하나의 신앙 고백만을 허용하고, 그 외의 신앙 고백이나 종교 활동, 특히 재세례파의 신앙이나 실천을 이단으로 간주하거나 배제했다.
재세례파 교회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공동체여야 하며, 예수님이 가르친 윤리적 원칙을 실천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실제로 재세례파의 중요한 분파는 화해와 평화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급진적 종교개혁에는 재세례파 분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루터와 동의했지만 나중에 루터와 결별한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도 있다. 뮌처는 반란을 통해서라도 사회의 불의한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했다. 그는 “폭풍에 의한 천국”이라는 사상을 옹호했으며, 이는 농민전쟁을 지지하는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1524년 뮌처는 농민 봉기와 ‘12개 조항’을 지지한 반면, 루터는 이 운동을 비판했고 두 사람 모두 무기를 사용해 자신의 입장을 옹호했다.
1525년 1월 재세례파들은 이미 뮌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는데, 성경이 개인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루터가 당국과 힘을 합치고 농민 지도자들이 원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재세례파들은 이 편지에서 자신들만의 길을 열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칼을 사용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단순히 기존 교회의 부패를 바로잡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신앙 운동들을 탄생시켰다. 그중 하나가 재세례파와 급진적 종교개혁이다. 흥미롭게도 이 운동들은 교황청과 초기 개신교 개혁자들이 원했던 방향에서 벗어난 ‘의도치 않은 산물’로 나타났다.
재세례파가 박해 받은 이유
16세기, 교황청 종교개혁과 고전적 개신교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대립과 파열, 그리고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러나 그들은 영토 교회의 핵심 원칙, 즉 특정 지역(영토)에서는 단 하나의 공식적인 신앙만 허용되고, 다른 신앙이나 종교 표현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유지했다. 이는 가톨릭, 루터교, 츠빙글리교, 칼뱅주의 등 다양한 교파가 있지만, 모두 그리스도교 국가 체제의 연속성 속에서 작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종교와 국가의 권위가 밀접하게 얽혀 있었으며, 종교는 공적인 영역에서 강제되고, 대중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해야 했던 체제였다.
재세례파들은 처음에 이 원칙을 어겼을 때 종교적 반체제 세력이 됐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반체제 인사로도 간주됐다. 그들은 영토 통합을 깨뜨렸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당국은 재세례파 같은 신앙 운동이 기존의 종교적 질서를 어지럽히고, 이로 인해 영토의 정치적·사회적 안정성이 약화된다고 봤다. 종교적 단일성이 깨지면 사람들이 분열되고, 영토가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재세례파가 의도적으로 정치적 반체제 인사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신앙과 신념 문제에 대한 그들의 반체제적 입장은 필연적으로 지배 계층에 맞서게 만들었다.
재세례파에 대한 비난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영토 모두에서 동일했으며, 이는 일탈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단 혐의뿐만 아니라 외부 정치적 이익에 봉사한다는 의혹을 받아 영토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됐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박해를 받았는데, 처음에는 투옥됐고 많은 경우 수천 명이 처형됐다. 이 박해에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많은 여성도 희생됐다.
재세례파 운동이 시작된 지 5세기가 지난 현재 연구에 따르면 유배, 투옥 또는 사형과 같은 형벌이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지역 모두에서 부과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처형은 로마 가톨릭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개신교 지역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편협함을 보여줄 만큼 충분한 사례가 기록됐다.
재세례파가 박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재세례파에 대한 박해는 특히 잔인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투옥되고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재세례파 운동은 지하에서 성장해야 했다.
재세례파를 받아들이기 전 로마 가톨릭 사제이기도 했던 시몬스(Simons)는 약 25년간의 사역 기간 내내 끊임없는 박해를 받으며 살았다. 특히 황제 찰스 5세조차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을 때 그가 어떻게 체포되지 않았는지 놀라울 정도다.
그가 여러 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일부 사람들은 발각되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핍박받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에 대해 당국이 무자비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많은 경우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취약하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힘이 부족했음에도 탈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네트워크가 있었다. 이들은 편지, 메모, 기발한 전술을 통해 소통을 이어갔고,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에 대한 놀라운 저항을 보여주며 현재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저항의 핵심은 재세례파들의 신앙에 대한 깊은 헌신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신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헌신은 그들이 ‘세 가지 세례’라고 부르는 물의 세례, 성령의 세례, 피의 세례에 기꺼이 직면하려는 의지에 반영됐다. 후자는 신앙을 위해 순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징했다. 그러나 그들이 순교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인 가능성이었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운동의 생존은 또한 특정 시기와 특정 장소에서 관용을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를 들어, 1520년대 말과 1530년대 초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재세례파를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다른 지역의 많은 재세례파가 그곳으로 이주했다.
나중에 모라비아에서도 재세례파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그곳으로 대거 이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적인 상황은 오래 가지 못했고, 재세례파들은 끊임없이 이동하거나 정착한 곳에 비밀리에 머물면서 탈출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러한 끊임없는 이동과 은신 덕분에 재세례파는 ‘출애굽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고, 그 세기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그들의 신앙과 전통을 보존하는 데 성공한 집단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 급진적 종교개혁의 후예인 공동체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
재세례파의 발전
16세기부터 재세례파 그룹은 자신들을 용인하는 곳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탈출을 감행했다. 재세례파 중에는 메노 시몬스의 가르침을 따랐던 메노나이트라는 그룹도 있었는데, 이들은 여러 지역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처음에는 모라비아에 정착했고 나중에는 프로이센, 우크라이나 및 동유럽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 공동체들은 종종 자신들의 신념을 전파하지 않는 등 엄격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러시아에서 메노나이트 그룹은 관용을 받고 토지를 부여 받았지만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재세례파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평화와 비폭력의 가르침을 따라, 무기를 들거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정치 체제에도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을 다하려 했다.
이러한 신념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했지만, 특히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는 특정 지역에 머무르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 혁명으로 재세례파는 전환점을 맞았다. 메노나이트 그룹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병역이나 전쟁에 관한 정부 명령을 거부하면 다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다. 따라서 그들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수의 그룹이 미국, 특히 종교적 관용이 더 큰 펜실베니아 주로 이주했다. 캐나다에서는 처음에는 환영을 받았지만, 의무 병역의 요구로 인해 일부 메노나이트 그룹은 새로운 지역을 찾게 됐다.
1922년, 그들은 당시 알바로 오브레곤(Álvaro Obregón) 대통령이 이끌던 멕시코 혁명 정권 아래 멕시코에 도착했다. 혁명의 폭력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정부는 이들의 신념을 존중하여 치와와주의 시우다드 쿠아우테목 인근의 인구가 없는 지역에 땅을 허락했다. 메노나이트는 그곳에 정착하여 오늘날까지 번성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후 메노나이트는 파라과이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으로 계속 이주하여 수 세기에 걸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평화로운 공존의 원칙을 지켜온 공동체가 됐다.
재세례파 운동이 세계 기독교 미친 영향
재세례파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 복음을 실천하며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역사상 다른 그룹도 같은 발견을 했지만, 반드시 남유럽이나 다른 지역의 재세례파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여러 지역과 네덜란드, 그리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도 재세례파 그룹이 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재세례파-메노나이트 교회는 유럽, 캐나다,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에 있다.
재세례파라는 이름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이름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이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성인이 된 후 다시 세례를 받는다고 생각해서 ‘다시 세례를 주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재세례파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신자의 세례’를 실천한다고 믿었다.
재세례파는 신앙과 국가 권력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완전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가가 교회의 신앙에 간섭하거나 강제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상은 이후 종교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 분리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칼을 사용할 자리는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신념을 강요하는 것은 자발적인 행위여야 한다. 이 원칙은 1530년 스트라스부르의 재세례파가 작성한 문서에 등장하는데, 이 문서에서는 시 당국이 왜 그들의 신념을 존중해야 하는지, 정치적 관할권이 개인의 양심을 어떻게 간섭해서는 안 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정치적 조약은 아니지만 공공 질서를 신앙적 관점에서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제안이며, 신자 공동체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 사이의 구별을 다루고 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종종 재세례파의 공헌을 잊곤 한다. 하지만 재세례파는 16세기에 이미 신앙의 자유와 강요받지 않는 개인의 양심을 명확히 주장한 최초의 그룹 중 하나였다.
재세례파 운동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항상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었지만 많은 곳에 영향을 미쳤다.
재세례파의 신념은 라틴아메리카와 스페인의 복음주의 기독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모든 신앙 공동체가 재세례파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게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재세례파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 경우도 있었다.
현재 재세례파가 가장 많이 성장한 곳
오늘날 대부분의 재세례파-메노나이트 교회는 유럽, 캐나다, 미국이 아니라 아프리카, 특히 가장 큰 메노나이트 세계총회 소속 교회가 있는 케냐와 에티오피아에 있다. 이러한 재세례파 신앙의 확장은 아시아 등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3년 전에는 세계 총회가 열렸다.
과거에는 재세례파와 메노나이트 운동이 주로 유럽과 북미의 백인 공동체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오늘날 이 운동은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같은 세계 남반구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특히, 신자들의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재세례파 모델은 다문화적 기독교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메노나이트 세계대회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수평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대회는 전 세계 다양한 언어, 부족, 국가 출신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세계적인 연합’의 비전을 실현하려고 한다.
재세례파 500주년을 맞으며
모든 재세례파가 메노나이트는 아니기 때문에 재세례파 메노나이트 세계대회로 명칭을 바꾸려는 전환기를 맞고 있다.
5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활동이 있다. 멕시코의 경우, 재세례파의 급진적 개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일 년 내내 심포지엄, 컨퍼런스, 도서 출판 및 글로벌 회의가 있을 예정이다. 특히 5월 21일부터 29일까지 독일과 스위스에서 기념대회가 열린다.
또한 16세기 재세례파들의 인용문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주석이 포함된 묵상집과 ‘재세례파 성경’이 나올 예정이다. [복음기도신문]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 gpnews@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