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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사도 요한(1) : 분파적인 사랑의 사도

▲ 블라디미르 보로비콥스키(Vladimir Borovikovsky, 1757–1825)의 “St. John the Evangelist”. 위키피디아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 그는 신약성경 저자들 가운데 어느 저자보다도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기록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져야 할 사랑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참된 신자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성도 간의 사랑을 특히 강조했다. 사랑의 주제는 그의 모든 글을 통해서 흘러 나온다.

그러나 사랑은 그의 천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요한은 자기 형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우레의 아들’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중세 미술품에서 묘사된 것 같이 요한을 온유하고 부드러우며 창백하고 사내답지 못한 모습으로 예수님 곁에 누워서 부드러운 눈매로 그분을 올려다 보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상상이다. 요한은 다른 어부 출신의 제자들처럼 건장하고 철저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는 모든 면에서 자기 형과 같이 참을성이 없고 야심에 차 있으며 열정적이고 폭발적인 사람이었다.

공관복음서에서 요한에 대한 기록은 요한 자신이 직접 말한 단 한 번의 기록뿐이다. 이 기록에서 그는 공격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뻔뻔스럽고 참을성이 없는 그의 특성을 잘 드러냈다. 바로, 주님께 자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한 사람을 책망했다고 말할 때이다.(막 9:38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요한이 매우 분파적이고 편협하며 고집이 세고 성급하고 충동적인 사람이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변덕스럽고 무례했다. 또한 공격적이었다. 열정적이고 감정적이며 야심만만한 사람, 형과 그는 한 통속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바르게 늙어갔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의 모든 약점은 장점으로 바뀌었다. 그 젊은 제자 요한을 나이 든 믿음의 조상 요한과 비교해 보면, 성숙해 가면서 그는 자신의 최대의 약점을 최대의 장점으로 발전시켜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면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본이다. 그것은 우리의 약함 가운데서 주님의 힘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도 요한에 대해서 생각할 때, 대개는 마음이 온유한 나이 든 사도를 생각한다. 일 세기 말에 이르러 교회의 명망 있는 장로로서 요한은 널리 사랑 받았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전 세계의 성도들에 대한 큰 사랑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정확히 바로 그런 이유로 요한이 “사랑의 사도”라는 명칭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진리에 대한 사도 요한의 열정을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랑은 그를 균형 잡힌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깊고 지속적인 사랑을 유지하였고, 그 사랑을 마지막까지 담대하게 선포했다.

진리에 대한 요한의 열심은 그의 글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신약성경의 모든 저자 가운데 요한의 사고방식은 흑백이 가장 분명하였다. 그는 생각하고 철저하게 기록했다. 무엇이든 확신을 가지고 다루었고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의 가르침에는 회색 지대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그가 조건 없고 수식어가 붙지 않는, 대조식 언어로 사실을 서술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서 그는 흑암과 빛, 죽음과 생명, 사탄의 왕국과 하나님의 나라, 사탄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자녀들, 악인의 심판과 의인의 심판, 저주의 부활과 생명의 부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 열매 없음과 열매 맺음, 불순종과 순종, 증오와 사랑을 대비시키고 있다. 요한은 절대적인 진리와 그 반대쪽을 함께 다루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명확한 선이 필요한 것을 깨닫고 있었다.

똑같은 접근 방법이 그의 서신서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우리가 빛 가운데서 행하든지, 아니면 어둠 가운데서 행하든지 하라고 명령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다. 아니, 죄를 지을 수 없다(요일 3:9).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하든지”, “세상에 속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요일4:4-5).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다(요일 4:7-8).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그는 요한이서에서 모든 거짓으로부터의 완전하고 전적인 분리를 촉구했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의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 9-11)

그는 요한삼서에서 11절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낸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11절)

요한은 그렇게 흑백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요한의 글은 그의 개성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는 진리를 향한 열정이 있었다.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진리를 흐리게 하지 않았다. 절대적이고 확실한 용어로 말했고, 회색 지대를 채색하는 일에 잉크를 허비하지 않았다. 모든 예외들을 나열하지 않고 가장 우선적인 법을 말했다. 예수님도 종종 그처럼 절대적인 형식으로 말씀하셨는데, 요한이 그런 스타일을 주님으로부터 배웠음이 틀림없다.

비록 언제나 따스하고 개인적이며 목회적인 어조로 썼지만, 그가 썼던 내용이 항상 읽기에 부드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과 절대적인 헌신을 담고 있다.

요한과 같은 성향의 사람이 가진 위험성은, 어떠한 사태를 극단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의 젊은 시절은 약간 극단주의적이었던 것 같다. 그는 영적인 평형 감각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열심과 분파주의와 불관용과 이기적인 야망은 모두 이러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죄악들이었다. 그것은 덕목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죄악된 극단으로 치우쳐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의 가장 큰 장점이, 아이러니하게도, 가끔 가장 현저한 실수를 저지르는 원인이 되었다.

때때로 우리 모두는 바로 이 원리에 의해 희생된다. 이것은 사람이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 중 하나이다. 우리가 가진 최상의 장점조차도 때로는 죄로 부패해서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진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열심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열심은 성급하게 판단하고 냉담하며, 동정심이 없는 것이 될 수 있다. 야심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만약 그것이 겸손과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야심은 죄악된 교만-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죄악 – 이 된다. 자신감도 역시 훌륭한 덕목이지만 그것이 죄악된 자기 중심적인 자신감이 될 때, 우리는 오만하게 잘난 체하게 되고 영적으로 무관심하게 된다.

분명 진리에 대한 열심과 성공하려는 욕망,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정당한 덕목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덕목이라 할지라도 균형을 잃으면 영적인 건강에 치명상을 줄 수 있다. 균형을 잃은 진리가 심각한 오류로 인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균형을 잃은 사람은 불안하다. 한 사람의 균형 잡히지 않은 성격은 일종의 방종으로 자제력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그 자체로 죄악이다. 그러므로 진리나 어떤 자질의 한 측면을 무한정 한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본 젊은 시절의 사도 요한이다. 초기에 그는 사랑의 사도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삼 년은 자기중심적인 광신도를 균형 잡힌 성숙한 사람으로 바꾸어 나갔다. 예수님과의 삼 년은 이 ‘우레의 아들’을 ‘사랑의 사도’로 만들어 갔다. 그가 가장 균형을 이루지 못했던 점들을 그리스도께서 바꾸셨고, 이로서 요한은 완고하고 성급한 사람에서 초대 교회의 사랑이 많은 경건한 장로 치리자로 변모해 갔다.

앞으로 얼마 동안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삶에서 가장 필요했던 균형을 잡아 주셨는지 자세히 알아 보려고 한다. 사실 이 균형은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복음기도신문]

원문: http://www.gty.org/Blog/B150629/john-the-divisive-apostle-of-love

존 맥아더(John MacArthur)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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